< 48화 마봉편(魔封鞭) (3) >
“하아.”
긴 탄식을 내뱉는 작은 눈의 중년인.
그는 이곳 곤륜산의 성지인 설선의 주인이자, 은자림의 수장인 림주였다.
겉모습은 젊어보여도 그의 세수는 삼백육십을 넘겼다.
그의 앞에는 세 명의 장로들이 정좌를 하고 있었고, 그들은 하나 같이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은자림의 수많은 기인들의 희생을 비롯해 보천동에 갇혀 있던 금모 구미호가 풀려났다.
다른 것보다도 림주를 가슴 아프게 한 것은 여식 내외의 일이다.
“그 아이는 찾았는가?”
림주의 물음에 경천극을 비롯한 장로 성진규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림주의 딸인 하백령이 자신들을 속였으나, 그녀가 림주의 유일한 혈육이기에 그 행방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보천동이 무너졌을 때 휘말렸다면 시신이라도 있을 텐데 그것조차 없었다.
‘필시 그 아이는 죽었다.’
림주의 방 안의 장식장에 놓여 있던 적색 초가 꺼져 있었다.
이는 선법으로 그녀의 숨결을 불어놓은 초였다.
‘모든 것은 응보인가.’
림주가 긴 탄식을 또 다시 흘렸다.
그는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었다.
맥위강이 강경파의 수장으로서 은자림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심지어 하백령마저도 변해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선법을 갈고 닦는 이로서 흘러가는 순리라고 여겨 이를 내버려뒀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백령아. 백령아.....아아아.’
딸을 잃은 아비의 마음이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슬픔으로 가득한 그의 모습에 장로들이 바닥에 머리를 숙이며 사죄했다.
“전부 저희들의 부덕입니다. 림주.”
“저희를 꾸짖어 주십시오.”
이에 림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네. 전부 노부의 부덕에서 벌어진 일인데, 어찌 장로들을 나무랄 수 있겠는가.”
방 안의 분위기가 더욱 무거워졌다.
림주 이상으로 가장 마음의 짐이 큰 것은 악영이었다.
곤륜산의 성지가 이렇게 많은 피로 물든 날도 이곳이 생긴 이래로 처음일지도 몰랐다.
“그는 어디에 있는가?”
림주의 물음에 악영이 답했다.
“보천봉에 있습니다.”
“보천봉에?”
“.....림주를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습니다.”
림주가 물은 자는 바로 천여운이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을 들었기에 림주는 그를 만나보려 했다.
* * *
봉우리의 윗부분이 날아간 보천봉.
그곳에서 천여운이 마봉편을 시험해보고 있었다.
-파파파팍!
허봉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탄성을 내질렀다.
“우왓! 주군 무슨 채찍 줄이 이렇게 늘어난답니까?”
천여운이 휘두른 줄이 수십 미터가 넘게 늘어나 뻗어있었다.
마봉편은 신기하게도 사용자가 원하는 만큼 늘어나는 기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얼마만큼 길어질지는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파파파팍!
‘얻기는 얻었다만 익숙지 않군.’
마도관의 비급서 중에서는 편법도 존재한다.
하지만 편법의 경우는 특별히 뛰어난 무공이 있지 않기에 마봉편의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흠, 이 기회에 편법을 한 번 만들어볼까?’
애써 얻은 절세신병을 그저 제압용으로만 사용하기는 아까웠다.
-새근새근!
천여운의 귓가로 작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어깨에 손바닥 만한 황금빛 털을 가진 작은 여우가 용케 몸을 웅크리고서 잠을 자고 있었다.
이 새끼 여우처럼 보이는 것이 금모 구미호였다.
그녀는 사람으로만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도 작게 바꿀 수 있었는데, 이렇게 새끼 여우처럼 작게 변해서 붙어 있었다.
“흠.”
달라붙지 말라고 했더니, 이런 식으로 들러붙어 있었다.
처음에는 이 모습으로 달라붙지 못하게 했던 천여운이지만, 그나마 이게 낫다고 여겼는지 어깨에 붙어있는 것을 그냥 내버려뒀다.
-차차차착!
천여운이 천마기를 불어넣자 마봉편이 그의 발목의 보호대로 변해서 착용되었다.
분해되는 천마검과 다르게 뱀처럼 감기는 식으로 붙는다.
개성이 있다고 해야 할까.
이를 보면서 천여운은 한 가지 고민이 되었다.
‘다른 무구들도 얻는 편이 좋을까?’
이 이외에도 도면에 있던 두 무구의 위치를 알았다.
하나는 고향인 러시아로 돌아간 단가 일족들의 고향인 알혼섬.
그리고 또 하나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보았던 적미노선이라는 선인이 말했던 오지산에 있을 것이다.
‘이것들이 전부 모였을 때 어떨지 궁금하긴 하구나.’
이런 생각에 잠겨있을 때, 보천봉의 위로 네 명의 무리가 나타났다.
그들은 이곳 은자림의 림주와 악영을 포함한 장로들이었다.
천여운에게로 다가온 림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어깨에서 하품을 하면서 늘어져서 자고 있는 금모 구미호에게로 향했다.
겉모습만 본다면 영락없이 귀여운 반려 동물이다.
‘저것인가?’
어느 누가 저 작은 여우가 태고 시절부터 세상에 혼란을 가져왔던 대요괴라고 짐작할까?
하지만 선법을 익혀 선기로 충만한 림주의 두 눈에는 거대한 요기가 느껴졌다.
잘 갈무리를 했지만 언제라도 저것이 터져 나온다면 뒷감당을 하기 힘들 것이다.
“그대가 림주로군.”
천여운의 오만한 말투에 일성 장로 경천극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의 말투는 적응했지만 자신이 모시는 자를 상대로 조금의 예우도 하지 않아주는 것이 거슬렸다.
하지만 악영이나 장로 성진규에게서 그가 천 년 전의 전설이라 불리던 마신이라는 것을 들었기에 차마 입밖으로 나오진 못했다.
[림주. 저 자가 바로...]
전음으로 림주에게 그를 알리려 했던 경천극이 말을 마치지 못했다.
‘림주?’
림주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천여운을 쳐다보고 있었다.
표정만 보면 굉장히 놀란 듯 했다.
‘이럴 수가....’
림주는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근 삼백오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선법을 익힌 그는 반선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선백안(仙白眼)은 일부 천기를 읽어내 타인의 운명의 방향을 짚어내기도 한다.
‘이 자는 대체....’
그 운명의 방향은 때론 색으로 표현된다.
림주의 두 눈에 천여운은 혼돈 그 자체였다.
천여운의 주변 공간이 심하게 일렁였고 수많은 색이 복합적으로 아지랑이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정말 인간이 맞단 말인가? 전혀 읽어낼 수가 없다.’
천기로 설명할 수 없었다.
천기를 읽어서 그 운명의 흐름만 본다면 그가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 알 수 있는데, 도저히 가늠기가 힘들었다.
“언제까지 쳐다볼 거지? 그 눈 특이하군.”
천여운의 그 말에 림주가 화들짝 놀라했다.
‘선기를 읽은 것인가?’
선백안을 펼칠 때, 선법을 익히지 않은 자의 눈에는 아무렇지 않게 보인다.
하지만 선법을 익히고 본다면 림주의 두 눈에 흰빛으로 물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눈으로 뭘 하려고 한 거지?”
천여운의 그 물음에 당황해하던 림주가 입을 열었다.
“......귀하가 어떤 사람인지 보려고 했소.”
차마 천기를 읽어 운명을 보려 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천여운 역시도 이것까지는 짐작하지 못했는지 물었다.
“그래? 내가 어떻게 보이지?”
“전혀 알 수 없구려. 노부와 같은 범인이 읽을 수 없는 자인 듯 하오.”
반선이라 할 수 있는 그가 범인이라면 평범한 사람은 대체 무엇일까.
천여운이 피식하고 웃더니 말했다.
“몸은 완전히 회복했나 보군.”
그 말에 림주가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공이 이 노구를 살려줬다는 이야기는 장로들에게 들었소. 그 점은 정말 감사하오.”
“다른 것은 아닌 모양이군.”
그 점이라고 짚었다는 것은 불만인 것도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이에 림주가 쓰라린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참 많은 희생이 있었소. 부덕하지만 하나뿐인 혈육도 잃었소이다. 귀하의 탓이 아님을 알지만 가슴이 아픈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인가 보오.”
심경이 복잡할 수밖에 없는 그였다.
하지만 천여운은 이런 그의 사정을 일일이 헤아릴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자가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둔 것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책임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데...”
림주가 본론을 꺼내려고 하는데, 천여운이 물었다.
“천살성. 그 자에 대해서 듣고 싶다.”
“천살성?”
림주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설마 그가 천살성인 그 자에 대해서 궁금해할 줄은 몰랐다.
사실 림주가 깨어나기 전에 천여운은 경천극을 비롯한 장로 성진규에게 천살성인 그 자에 대해서 물어봤었다.
하지만 그들이 아는 것은 꽤나 단편적인 부분이었다.
‘유일하게 림주 일가를 수호하는 경가를 누르고서 일성 장로의 직위에 있던 자이자, 림주를 제외하고 가장 오랜 세월 동안 은자림에 있었던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살성이라는 것에 발목이 잡혀 쫓겨났다고 들었다.
물론 엄밀히 이야기하면 자신의 발로 은자림을 나갔다고 했다.
“이곳을 나가기 전에 그대와 대화를 나눴다지.”
“.......어찌 그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 것이오?”
림주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짐작 가는 바가 있어서.”
“짐작?”
“녀석이 언제부터 이곳에 있던 거지?”
천여운의 그 물음에 림주의 시선이 장로들에게로 향했다.
그들이 어느 정도 알려주지 않았다면 천여운이 이 사실을 물어볼 리가 없었다.
림주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난처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엇을 짐작하는 것인지 물어봐도 되겠소?”
“은자림이 이곳에 정착한 것은 삼백여 년 전이라고 하더군. 한데 그 천살성은 아무리 봐도 내가 있던 시절에 들어봤던 자인 듯 해서 말이야.
천여운이 있던 원래 시대에 사파의 천재라 불렸던 초신성.
천여운은 천살성의 정체가 그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다만 그러기에는 정말 오랜 세월을 살았다고 할 수 있는데, 장로들 중에서 누구도 그가 얼마나 살아왔는지 제대로 아는 이가 없었다.
초 노사와 친분이 있다고 하는 악영조차도 몰랐다.
‘아아.....그러고 보니, 이 자가 천 년 전에 명성을 떨치던 자라고 했던가.’
림주는 이 사실에 대해서 악영과 장로 성진규에게 듣고서 꽤나 놀라워했었다.
호흡법과 내공을 수양하는 무림인들이 장수한다는 사실이야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천 년은 인간의 수명을 완전히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누가 이 자를 천 년이나 살았다고 짐작할까?’
천여운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이십대 초반에 불과했다.
물론 실제로 그 나이였다.
시간을 뛰어넘었다는 사실을 굳이 알릴 필요가 없기에 말하지 않은 것일뿐.
그때 림주가 갑자기 손가락을 허공에 가볍게 휘저었다.
-스스슥!
그러자 허공에 붉은 빛의 글씨가 새겨지더니, 이내 천여운과 그의 주변으로 원형의 막이 생겨나며 바깥과 차단되었다.
“림주!”
“주군!”
바깥에 있던 허봉과 장로들이 당황해하며 막을 바라보았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화르륵!
허봉이 화기를 일으켜 막을 파괴하려 했다.
이를 악영이 만류했다.
“멈추십쇼. 허 공. 아무래도 두 분이서 따로 대화를 나눌 듯 합니다.”
“뭐?”
악영의 말대로 막 안에서 림주가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는데, 바깥에서는 전혀 들리지가 않았다.
그의 예상대로 림주는 천여운에게 무언가 수작을 부리는 것이라기보다는 둘만의 대화를 위해 막을 친 것 같았다.
“잠시 둘이 대화를 나눠도 괜찮겠소?”
그때 천여운의 어깨에 늘어져 있다가 선기로 쳐진 막 때문에 잠들어 있던 금모 구미호가 깨어났다.
금모 구미호의 털들이 바짝 곤두섰다.
-너 선인의 후예로구나!
두 눈이 요기가 넘치는 금안으로 물드는 것이 한바탕 하려는 듯 했다.
“날뛰면 죽인다.”
천여운의 날카로운 경고에 금모 구미호가 섭섭하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너무해. 흥흥!
그리고는 천여운의 정장 상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는 필사의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이에 림주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저 금모 구미호가 마치 저 자를 주인처럼 여기는 듯이 행동하는 구나.’
참으로 기이하다고 여겼다.
저 위험한 대요괴가 통제가 가능할려나 싶었는데, 이 자는 정말로 그것이 가능해보였다.
“괜찮나?”
천여운이 자신의 품속을 파고든 금모 구미호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에 림주가 상관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천여운이 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림주가 이를 개의치 않고서 입을 열었다.
“그대라면 초 노사와 인연이 있을 수도 있겠구려.”
림주의 그 말에 천여운의 눈이 반짝였다.
아무래도 자신의 짐작이 맞은 모양이다.
“그는 자신의 모든 운명을 거스르고 있소이다. 정해진 수명도, 그리고 부여된 살업조차도 말이오. 노부는 그것이 너무도 무서웠소.”
“무엇이 말이냐?”
“그대야말로 초 노사가 생각하는 답인 것 같구려.”
“뭐?”
“초 노사는 젊음을 얻기 위해 이곳 설선으로 들어왔소.”
이것은 설선에 있는 장로들 누구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그 역시도 초 노사가 독면을 요청해서야 알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노부 역시도 몰랐소. 그저 그가 선법을 익혀 살업을 누르려고 한다고만 여겼소.”
“......그게 아니었군.”
“그렇소. 그의 목적은 그게 아니었소.”
선법을 전수하던 어느 날.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내 안에 있는 혈살기를 억누르지 않고 선법을 익힐 방법은 없소?]
혈살기는 말 그대로 살의로 가득한 기운이었다.
이것을 유지한 채로 선법을 익힌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었다.
선법을 익힐 때마다 혈살기가 억눌린다는 것을 인지한 초 노사는 그에게 이를 우회할 방법을 물어보았다.
“나는 당연히 불가능하다고 했소.”
이 말에 초 노사가 한 말은 림주가 처음으로 그를 위험하다고 판단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선법이 효과가 없는 것이오?]
[무엇이 말인가?]
[......선법을 익혀도 노화를 막을 수가 없소.]
그가 보았던 초 노사는 살업마저 억누르고 운명을 개척하는 자였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이 지금까지 그를 잘못 알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선법을 익힌 것은 젊음을 얻기 위해서였소.”
무공을 익히지 않았는데도 장수하는 비결.
그것이 선법이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는데도 림주는 노화가 느렸고 딸인 하백령 역시도 제 나이로 보이지 않았다.
림주는 이런 초 노사의 본심을 꿰뚫어보았고 그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러던 차에 초 노사 스스로가 은자림을 나가겠다고 했소.”
은자림에는 한 가지 규칙이 있었다.
그들은 세상을 떠나서 사는 만큼 한 번 들어오게 되면 다시는 속세로 나가지 않겠다는 약조를 한다.
만약 나가게 된다면 스스로 무공을 폐하고 선법으로 이지를 상실시키는 것이 대가였다.
“멀쩡하게 나간 것 같던데.”
타임 리마인드 능력을 본 그는 멀쩡했다.
림주가 말없이 막 바깥을 등지고서 자신의 상의의 단추를 살짝 열고서 가슴을 보였다.
그의 가슴에 날카로운 상흔이 남아 있었다.
“50여 년 전 그는 내게 독대를 신청했소. 그때 그가 남긴 상처요.”
이에 천여운이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협박을 당했군.”
“......선법으로 나는 그를 제압하려고 했지만 도리어 당했소.”
무공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 선법이다.
림주는 내심 그를 제압할 자신이 있었지만 도리어 죽을 위기에 처해지고 만다.
“그는 만약 노부가 자신을 막는다면 이곳 은자림에 있는 자들을 전부 몰살시킬 거라고 했소.”
“하!”
천여운은 그제야 림주가 소리를 차단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은자림의 사람들이 알고 있던 사실과는 정반대되는 진실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자림의 기인들은 그가 절대로 사망곡을 벗어나지 않기로 약조한 대가로 오랜 세월 동안 은자림의 동료임을 감안하여 예외적으로 멀쩡히 내보냈다고 알고 있었지만, 실상은 완전히 달랐다.
“모두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소.”
그 말에 천여운이 피식하고 웃으며 말했다.
“웃기는군.”
“뭐요?”
“죽일 수도 없고 목숨의 위협을 받았으니, 어쩔 수 없이 보내놓고는 체면치레를 생각하는 꼴이 안 웃기게 생겼나?”
그 말에 림주는 울컥했지만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선법을 익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두려움 때문에 이 사실을 은폐했다.
“결국 위험한 줄 알고도 그냥 놓쳤다는 말을 참 어렵게도 하는군.”
비아냥거리는 듯한 천여운의 말에 림주가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천여운조차 이렇게 생각하는데, 다른 자들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 반응이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여겨졌다.
림주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말했다.
“......그대의 말이 맞소. 전부 본인의 부덕으로 일어난 일이오. 처음부터 운명을 거르는 천기를 가진 자를 보았을 때, 그를 들여서는 안 되었소.”
“천기?”
의아해하는 천여운에게 림주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초 노사, 아니 초유신 그 자 이후로 천기를 볼 수 없던 자를 본 것은 두 번째요.”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성 장로에게 들으니, 그대는 속세에서 천마라고 불린다고 들었소.”
그 말과 함께 림주가 손을 펴서 바닥을 가리켰다.
그러자 막 안의 땅바닥 전체가 붉은 빛의 글씨들로 가득 차졌다.
-우직! 우직!
막 안의 공간이 일렁이며 이상한 징조를 보였다.
안의 기운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팽배해졌는데, 품속에 있던 금모 구미호조차 놀라서 튀어나올 정도였다.
-야!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우리 선인의 후예인 하가에서는 봉인이 깨지는 순간을 대비하여 오랜 세월 동안 선기를 모은 이 법의를 만들었소.”
림주가 입고 있던 검은 상의를 탈의하자, 그 안에 금색 글씨가 새겨진 흰 옷이 드러났다.
글씨들에서 강한 기운이 퍼져 나왔다.
이것은 선인의 후예들이 대대로 선기를 응집하여 만든 법의였다.
림주가 결의에 가득 찬 눈으로 천여운과 금모 구미호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노부는 같은 실수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 하오. 그대처럼 위험한 자와 금모 구미호를 세상으로 보낼 수 없소이다.”
림주가 두 팔을 활짝 폈다.
그는 자신을 희생해서 천여운과 금모 구미호를 멸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천여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기껏 살려놨더니....”
“미안하지만 이것이 발동한 이상 그대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소. 이 죄는 훗날에...”
-쾅!
바로 그때 천여운의 한쪽 발이 바닥을 파고들었다.
그 순간 바닥이 갈라졌다.
그와 함께 바닥에 붉은 글씨들이 빛을 잃고 말았다.
‘이런!’
그것은 이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고정하는 선법의 진술식이었다.
당황한 림주가 곧바로 법의의 기운을 폭사시키려고 했으나,
-팍!
천여운이 번개처럼 그의 법의를 뜯어버리더니, 손 위로 그것을 들어 올리자 공간이 일렁이며 회오리를 치며 법의가 빨려 들어갔다.
-슈우우욱!
그러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터질 듯이 팽배하던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 대체 이게....”
“설마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나?”
'!?'
림주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천여운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둘만 대화를 하자고 해놓고 금모 구미호가 듣게 내버려둔다? 선법만 익혀서 그런지 정말 멍청하구나.”
“자, 잠깐....”
“딸내미나 애비나 별 차이가 없군.”
“뭐?"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여운의 검결지가 림주의 이마에 박혔다.
-푹!
< 48화 마봉편(魔封鞭)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