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마봉편(魔封鞭) (1) >
‘고집이 세군.’
천여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이나 눈빛을 보면 방금 전과 달리 깨달음이라도 얻은 사람처럼 맑았다.
아마도 스스로의 질문에 해답을 얻었으리라 여겨졌다.
“마음대로 생각해라.”
천여운은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충분히 그녀에게 사실을 밝혔기에 더 이상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금모 구미호는 제대로 이해한 듯 했다.
“너는 그를 많이 닮았구나. 그의 직계라 하는 녀석들은 전부 그와 닮지 않았었는데.”
그녀는 수십 년 동안이나 천마의 후손들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누구 하나 천마의 향수를 찾기 힘들었다.
눈앞의 이 남자를 제외하면 말이다.
“나 죽일 거야?”
금모 구미호가 자신의 목에 여전히 닿아 있는 오행의 무형검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에 천여운이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대자연의 기운을 흩어지게 했다.
-스르르륵!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녀를 위협하던 오행의 무형검이 사라졌다.
그녀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날 안 죽이면 세상이 위험할 수도 있는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말하는 그녀.
겉보기에는 귀여운 18세의 소녀 같지만 태고 시절부터 존재해온 최악의 대재앙이라 불리는 금모 구미호다.
그녀를 쳐다보던 천여운이 말했다.
“관심 없다.”
그 말에 그녀의 입 꼬리가 히죽하며 올라갔다.
“역시 닮았어.”
천여운이 속으로 혀를 찼다.
그는 심상 속에서 천마 조사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무엇이 닮았다고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조사님과 인연이 있었다니, 이걸로 끝이다. 그만 가라.”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한 천여운은 더 이상 그녀에게 관심이 가지 않았다.
천마 조사와 인연을 보아서 놓아줄 생각이었다.
어차피 지금 그녀의 모습을 보면 더 이상 세상에 해악을 끼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예상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럼 네가 날 살렸으니까. 이제부터 너 따라다닐래.”
천여운이 한 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사실 평소의 그라면 이 정도 전력은 어떤 식으로든 이용하거나, 자신의 산하로 거두었겠지만 뭔가 끌리지가 않았다.
그래서 놓아주는 것인데 내심 당혹스러웠다.
“오랫동안 갇혀 있었다고 했는데, 이제 네 자유를 누려라.”
“싫어. 너랑 같이 갈래.”
뭔가 벌써부터 귀찮아지려고 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천여운에게 그녀가 요염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봐. 나 정도 이렇게 잘 빠진 몸매의 미녀가 같이 가주겠다는데, 좋은 일이 아니야? 맞지?”
‘........’
요력이 줄면서 그녀는 현재 십대 소녀로밖에 안보인다.
"쯧."
"지금 혀 찬거야?"
천여운은 무표정한 얼굴로 관심이 없다는 듯이 지상으로 내려갔다.
반파된 봉우리의 위쪽은 엉망이었다.
-탁!
금모 구미호가 천여운을 따라서 밑으로 내려왔다.
여전히 나신인 그녀의 모습이 거슬렸는지 천여운이 말했다.
“계속 그러고 다닐 참이냐?”
“아아, 하도 오랫동안 갇혀 있었더니 깜빡했네. 왜 이 몸을 보니까 아랫도리가 불끈불끈 한 거야? 헤에.”
“......죽고 싶나?”
“쳇, 넌 그 사람보다 어째 더 차갑다.”
-휙!
그녀가 탐탁지 않다는 듯이 중얼거리더니, 이내 뒤로 빙글 한 바퀴 돌았다.
그러자 천여운이 원래 있던 중원 시절에나 볼 법한 예쁜 여성의 의복이 어느새 입혀졌다.
‘흠.’
구미호가 기문둔갑술에 능하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것이 그저 풍문만은 아닌 모양이다.
“자! 이제 됐지?”
천여운이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탁!
그런 그의 앞으로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은자림의 일성 장로인 경천극과 이성 장로인 성진규였다.
경천극이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금모 구미호를 노려보면서 천여운에게 말했다.
“어째서 그 사악한 요물을 죽이지 않는 것이오?”
전쟁이라도 치르듯이 전투를 벌인 것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터무니없이 갑자기 끝나버렸다.
경천극이나 성진규는 위험한 존재인 금모 구미호를 죽이지 않는 천여운의 저의를 알 수 없었다.
천여운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더 이상 문제가 될 건 없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오? 대요괴요. 태고적부터 세상에 해악을 끼친 존재를 그냥 내버려두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언가가 경천극에게로 날아왔다.
그것은 황금빛 꼬리였다.
-팍!
“큭!”
당황한 경천극이 무형검을 만들어내 이를 막아냈다.
그의 신형이 방대한 요력이 담긴 꼬리에 의해 옆으로 튕겨나갔다.
-타타타타타탁!
그러나 아까처럼 심하게 튕겨나간 것은 아니었고 열 보 가량 밀려났다.
“쳇. 요력만 줄지 않았어도 한 방에 보내는데.”
그녀가 입맛을 다셨다.
확실히 아홉 개의 꼬리 중에 두 개를 잃으니, 요력이 약해졌다.
‘이게 약해진 거라고?’
장로 성진규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경천극은 생사경의 경지에 오른 은자림 최고의 고수였다.
그런 그를 본신도 아닌 인간의 모습으로 저렇게 튕겨낸 것만 보더라도 여전히 강했다.
‘역시 위험하다.’
장로 성진규가 앞으로 나서며 포권을 취했다.
-탁!
그리고는 천여운에게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의미지?”
불과 아까 전만 하더라도 그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그였다.
그런데 지금 태도는 대체 무엇인가?
“무림의 말학 성진규가 무림의 전설이자 대선배이신 마신께 인사 올립니다.”
‘아아.’
천여운은 그제야 그가 어째서 자신에게 예를 갖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아까 전에 2대 천마라고 밝힌 것을 들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의외였다.
자신의 후손들조차도 처음에 자신의 정체를 밝혔을 때, 쉽게 믿지 못했는데 성진규의 반응을 보면 확실하게 인정한 듯한 태도였다.
“나를 알고 있나 보지?”
“어찌 무림에서 활동했던 무인으로 대선배님의 명성을 모르겠습니까?”
“그래도 멀쩡한 녀석 하나는 있구나. 창천 사상에 물들어서 전부 썩었나 싶었더니.”
천여운의 그 말에 장로 성진규의 눈빛이 묘해졌다.
‘역시 그 이야기가 사실이었구나.’
그는 오랫동안 은자림에서 있었기 때문에 과거의 일들을 알고 있었다.
과거 천여운의 조부인 천마신교의 22대 교주가 은자림의 일원이었고, 공동의 적인 극도신을 상대하면서 연을 맺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선배님의 조부이신 천인지 공께서 저희 은자림의 일원이셨으니, 선배님과 저희의 연이 어찌 얕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네?”
“온갖 예를 다 갖추며 띄웠으니 할 말이 있는 것이 아니냐?”
천여운의 그 말에 성진규가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입을 뗐다.
그의 인간을 뛰어넘는 엄청난 능력을 보았기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배님. 금모 구미호는 아까 경 장로가 말했다시피 대요괴입니다. 선인께서 가두신 것에는 저 존재가 살겁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괜히 대요괴를 풀어주었다가 혹여 속세에 재앙이라도 닥칠 수도 있는데, 풀어주시는 것을 부디 삼고해주십시오.”
장로 성진규는 대요괴인 금모 구미호가 풀려나는 것을 우려했다.
그렇다고 마신이라 불리는 천여운에게 그를 죽이라고 종용하기는 어려우니, 돌려서 최대한 말한 것이다.
그런 그에게 천여운이 말했다.
“그리 위험하다 여겨진다면 직접 죽여라.”
“네!?”
그 말에 성진규를 비롯한 경천극이 내심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꼬리가 잘려서 약해졌다고 해도 상대는 구미호였다.
한 번 점프를 하는 것만으로 지상이 쑥대밭이 되는 저 괴물을 무슨 수로 잡는단 말인가.
“내 발로 나가겠다는데 불만이야? 그럼 너희를 전부 죽이고 가면 되겠네.”
금모 구미호가 혀를 날름거리며 그들에게 말했다.
장난기 넘치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걸 실제로 행할 능력이 된다.
“서, 선배님!”
“정녕 대요괴를 내보낼 작정이오?”
두 장로가 우려를 담아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그들로서는 금모 구미호도 그렇고 천여운 둘 다 막을 수가 없었다.
‘별 수 없구나.’
장로 성진규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말했다.
“하면 선배님. 단 한 가지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
“선배님이 아니시면 이 금모 구미호를 통제할 자는 누구도 없습니다. 부디 구미호가 세상에 해악을 끼친다면 선배님의 손으로 막아주실 수 있을 런지요?”
“성 장로!”
경천극이 당혹스러웠는지 그를 다그쳤다.
장로 성진규는 지금 금모 구미호를 내보내는 것을 막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 어찌하실 거요? 경 장로. 저 요괴를 막을 수 있겠소이까?]
[허어.....]
사실 그로서는 그저 차선책을 제안한 것뿐이었다.
어차피 천여운이 아니면 저 괴물을 막을 수 있는 자도 없었다.
천여운이 귀찮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찰싹 달라붙으려고 하는 금모 구미호를 쳐다보았다.
“그래그래. 날 막으려면 네 옆에 꼭 붙여놔야지.”
“달라붙지 마라.”
“......너 많이 매정하다.”
토라진 표정으로 흥흥 거리는 금모 구미호.
천여운이 혀를 찼다.
‘혹 덩어리를 붙이는 꼴이로군.’
샤케나가 달라붙는 것도 귀찮은 판국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금모 구미호의 능력이 쓸모없다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활용가치는 높았다.
잠깐의 고민 끝에 천여운은 그녀를 데려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흠칫!
천여운이 갑자기 바닥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파스스슥!
그러자 파편들이 부서지며 그 밑에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지름이 2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둥글고 검은 구였다.
‘이건?’
의아해하면서 그것을 만지려는 순간 구에서 검은 밧줄 같은 것이 뻗어 나와 이내 천여운의 몸을 휘감으려 했다.
-팍!
천여운이 검결지를 휘두르자 날카로운 예기가 이를 튕겨냈다.
-차차차창!
검은 밧줄은 굉장히 길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긴 것이 천여운의 주변을 넘실거리며 뱀처럼 움직이는데, 기이한 현상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검은 밧줄이 늘어나면서 검은 구 내에 있던 자의 모습이 드러났는데, 이를 본 장로 성진규가 노기가 서려서 소리쳤다.
“맥위강!”
놀랍게도 그 안에 있던 자는 바로 이성 장로인 맥위강이었다.
'살아 있었구나!'
금모 구미호의 금요안에 사로잡혀서 멍하게 있다가 부서진 봉우리의 파편에 깔려 죽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망할 요괴 놈!’
맥위강이 살기어린 눈으로 금모 구미호를 노려보았다.
그는 자신이 요기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사로잡혀 있는 동안의 기억들이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네놈이 그 맥위강이란 놈이군.”
천여운의 그 말에 맥위강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주 공교로운 날이구나. 신기를 얻는 날에 선조님의 원수를 눈앞에서 이렇게 보게 되다니.”
그는 마봉편으로 만든 구체 내에서 모든 것을 들었다.
장로 성진규가 마신이라고 하는 말에 적잖게 놀랐었다.
마신 천여운은 맥가를 무림의 수면 아래로 수백 년 동안이나 숨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잘됐구나. 푸른 하늘을 위해 살아남은 마도의 종자들을 모조리 없애려고 했는데, 그 수장이 나타났으니 이 자리에서 죽여주마.”
장로 성진규가 그 말에 도리어 어처구니가 없어 했다.
그의 무위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자신과 거의 동수를 이루는 수준이었는데, 무슨 수로 저 괴물을 죽인다고 호언장담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꼬리가 잘릴 때 풀렸나 보네. 그럼 다시!”
금모 구미호가 맥위강을 쳐다보며 금요안을 발동했다.
그런데 맥위강에게 금요안이 걸리지 않았다.
“응?”
“어리석은 요괴여. 내가 마봉편의 주인이 된 이상 그런 요망한 술법이 통할 것 같으냐?”
맥위강이 채찍의 손잡이를 그녀에게 휘둘렀다.
-촥!
채찍의 검은 줄이 그녀에게로 날아갔다.
그녀가 이를 비웃으며 꼬리로 이를 쳐내려고 했는데, 그 순간 채찍의 검은 줄이 그녀의 꼬리를 휘어 감았다.
“앗!”
-휘리리리리릭!
뱀이라도 되는 것처럼 채찍은 꼬리를 타고서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그녀의 요력이라면 충분히 이것을 뿌리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꼼짝도 하지 못했다.
“망할 신기!”
그것은 마봉편의 줄이 그녀의 요력을 흡수하고 억눌렀기 때문이었다.
“하하하하하하핫!”
맥위강이 득의양양한 듯이 웃었다.
그리고는 천여운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신기는 이런 식으로 쓸 수 있지.”
맥위강이 잡고 있는 마봉편의 검은 채찍 줄에서 신묘한 빛이 흘러나왔다.
“아흑!”
그러자 채찍줄에 묶여 있던 금모 구미호의 금안이 초점을 잃고서 멍하게 변했다.
감정을 잃은 것처럼 무표정하게 바뀌어갔다.
마봉편(魔封鞭).
신기라 불리는 이 무구는 단순한 채찍이 아니었다.
상대를 제압하고 그 힘마저 흡수할 수 있다.
가장 무서운 것은 마봉편은 요괴나 요물, 영물과 같은 존재의 심지를 제압하여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꼬리가 두 개 잘려서 요력이 줄어들고,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녀는 제압당하기 딱 좋은 상태였다.
“금모 구미호여. 다시 저 마도의 종주와 이차전을 할 때가 되었...”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욱씬!
“끄억!”
맥위강이 자신의 심장 부근을 움켜잡았다.
심장에 날카로운 예기가 박혀서 터질 것만 같은 고통이 엄습해왔다.
“이, 이게.....”
그런 그에게 천여운이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멍청한 놈. 설마 그걸 쓰도록 계속 구경할 거라 생각했나?”
공간을 뛰어넘어 의지로 다루는 검.
그것이 바로 심검(心劍)이었다.
‘이, 이럴 수 없어.’
이제야 겨우 얻은 신기를 제대로 써보기도 전에 심장에 박힌 심검에 맥위강은 고통으로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 48화 마봉편(魔封鞭)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