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대요괴 (2) >
돌문이 닫히는 순간,
은자림에서 최고 고수들이라 할 수 있는 일성 장로인 경천극과 이성 장로인 성진규에게는 크나큰 시련이 닥쳤다.
-콰콰콰콰쾅!
금빛 꼬리가 휘몰아칠 때마다 동굴의 스티로폼이라도 되는 것처럼 부서졌다.
두 장로들은 쉴 새 없이 경공을 펼치며 이를 피했다.
이를 석단 위에 교태스러운 자세로 앉아서 여유롭게 향 장로의 심장을 물어뜯으며 지켜보고 있는 금모 구미호였다.
-우적우적!
섬뜩한 광경인데 심장을 먹는 금모 구미호는 고상한 얼굴로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극상이로군.”
금모 구미호의 입 꼬리가 흡족함으로 올라갔다.
삼성 장로인 향 장로의 심장은 보통 사람들보다 그녀의 요력을 회복하는데 더욱 큰 효과를 가져왔다.
“좋아.”
심장을 먹어치운 금모 구미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나신인 그녀의 하반신을 붙들고 있는 검은 채찍에서 붉은 글씨의 빛이 강하게 흘러나왔다.
“언제까지 나를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으냐. 흥!”
그녀가 손가락으로 검은 채찍을 톡하고 건드렸다.
그 순간 검은 채찍에 새겨져 있던 붉은 글씨들이 산화되듯이 사라졌다.
-스르르륵!
붉은 글씨들이 빛을 잃고 사라지자 금모 구미호의 얼굴에서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후련하다는 것처럼 그녀가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편을 풀어라.”
금모 구미호의 그 말에 멍하게 서있던 맥위강이 편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반신을 묶고 있던 편이 벗겨지면서 그 길이가 줄어들었는데, 신기하게도 이내 일반적인 채찍과 같은 길이가 되었다.
-착!
“아아!”
금모 구미호의 얼굴이 감격으로 물들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갇혀 있다가 풀려나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기지개를 피듯이 두 팔을 들어 올리며 그녀가 활짝 웃었다.
“호호호호호호홋!”
그렇게 웃어대던 그녀가 이를 멈추고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맥위강의 손에 들려 있는 채찍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증스러운 신기!’
선인의 신기인 저 채찍만 없었어도 이곳에 갇혀 있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손을 뻗자 맥위강이 채찍을 공손히 갖다 바쳤다.
금모 구미호가 손잡이를 오른손으로 잡고서 왼손으로 채찍의 끝을 잡았다.
‘이 자리에서 부숴주마.’
그녀가 양손으로 이를 힘껏 잡아당겼다.
금방이라도 뜯겨나갈 것 같이 팽팽하게 늘어나는 채찍.
그런데 채찍은 멀쩡하기만 했다.
‘어째서?’
금모 구미호의 눈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갔다.
오랫동안 요력이 억눌려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중원에 단 셋뿐인 대요괴였다.
‘꼴에 신기라 이거지? 그렇다면 본신으로 부숴주마.’
어차피 인간 형태로 끌어낼 수 있는 힘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제 신기에서 풀려났으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이 가증스러운 신기를 부숴버릴 것이다.
그녀가 본신으로 돌아가려던 찰나였다.
‘이 요괴! 내 검을 받아랏!’
-슉!
금모 구미호의 꼬리를 피하던 경천극이 무형검 두 개를 키워 이를 막아낸 후에 하나의 무형검으로 그녀의 뒤를 찔러왔다.
“제법이네. 세월이 꽤 흐르긴 했나봐. 꼬리 하나를 막아낼 정도로 강한 녀석도 있고 말이야.”
-휘릭!
‘아닛?’
경천극이 다급히 허공을 박차고서 신형을 위로 날렸다.
그녀의 뒤에서 또 다른 거대한 꼬리가 나타나 그를 후리치려 한 것이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다고 여겼는데,
-팍!
“크헉!”
금모 구미호의 또 다른 꼬리가 위에서 그를 밑으로 내리쳤다.
꼬리를 동시에 두 개나 더 뺀 것이다.
-쾅!
경천극의 몸이 바닥에 세차게 부딪쳤다.
그를 중심으로 5미터 가량 되는 구덩이가 생겨났다.
“끄으으.”
반탄강기로 몸을 보호했는데도 속이 진탕이 된 것 같았다.
빨리 몸을 일으켜 세워야 하는데, 충격의 여파로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금모 구미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정도 되는 인간의 심장은 참으로 맛있겠구나.”
그녀가 혀를 날름거렸다.
“일단 좀 다져놓을까?”
경천극이 비틀대고 있는 구덩이가 그림자로 드리워졌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금모 구미호의 꼬리가 거대한 방망이라도 되는 것처럼 위로 들어올려져 있었다.
-휘릭!
귓가로 들려오는 선명한 파공음.
거대한 꼬리가 그를 다질 기세로 내려쳐졌다.
“경 장로 피하시오!”
장로 성진규가 다급히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경천극이 두 눈을 감았다.
‘아아....’
그 오랜 세월동안 익혀왔던 무공은 이 대요괴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야말로 괴물 그 자체였다.
바로 그때였다.
-촥! 파아앙!
“아악!”
금모 구미호의 목소리로 추정되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경천극이 눈을 떴다.
그녀의 꼬리가 어느새 옆으로 휘어져 있었다.
자신이 그렇게 무형검으로 쳐내도 베이기는커녕 오히려 튕겨나가기 일수였는데,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 그의 귓가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려고 했는데, 꽤 단단하군.”
“그대는?”
그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천여운이었다.
천여운이 쥐고 있는 거대한 형태의 무형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노오오옴!”
금모 구미호가 화가 났는지 목소리에 살기가 넘쳐났다.
겉보기에는 천하절색의 외모를 지녔는데 뿜어져 나오는 요기는 공동 전체를 아우를 만큼 무시무시했다.
‘무슨 기운이 이리도.’
꼬리를 피해 다니던 장로 성진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저 풍겨지는 기운만으로 현경의 경지에 오른 자신이 이런 두려움을 느낄 줄은 몰랐다.
“죽여주마. 인간!”
금모 구미호의 엉덩이 쪽에서 꼬리 세 개가 동시에 튀어나왔다.
-슈슈슉!
그녀의 꼬리는 굉장한 속도로 천여운을 향해 쇄도했다.
꼬리의 털 하나하나가 흉기라도 되는 것처럼 날카롭기 짝이 없었다.
천여운이 검결지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차차차차차차창!
10미터 정도 되는 무형검 열두 자루가 생겨나 엑스(X) 자로 교차하며, 날아오는 꼬리들을 동시에 짓눌렀다.
‘세상에!’
이를 본 경천극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무형검은 말 그대로 무형의 진기를 유형화시킨 검이다.
그것을 키우기 위해서는 굉장한 진기가 소모되는데, 대체 저 정도 크기의 무형검들을 자유자재로 다룰 정도면 도무지 얼마나 많은 진기를 지녔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이 인간.....강하다.’
금호 구미호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녀는 천여운이나 두 장로들에게서 선기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우습게 여겼다.
선인이 아니라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한데 눈앞의 저 자는 달랐다.
“내 본 모습으로 상대해주마. 인간!”
-고오오오오!
그녀의 몸이 눈부신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 순간 안 그래도 엄청났던 요기가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고오오오오!
“틈을 주는군.”
천여운이 변해가는 그녀를 향해 검결지를 뻗었다.
그러자 무형검 두 개에서 화기(火氣)와 한기(寒氣)가 치솟으며, 붉고 새하얀 광선이 이내 그녀를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갔다.
-촥! 촥!
속성을 담은 역량의 일원화였다.
-파치치치칙!
그러나 황금빛 요력에 광선이 막혔다.
산봉우리마저 관통시키는 속성을 담은 역량의 일원화가 저것을 뚫지 못한 것이다.
‘이걸 막아?’
S등급 정도 되는 알파 위험개체들에게도 통하는 것이 변신하는 도중에 나오는 저 요사스러운 기운을 뚫지 못했다.
‘태고 시대부터 존재해온 대요괴라 이거지.’
악영에게 그녀의 정체를 들었던 천여운이었다.
산해경을 읽은 천여운은 오령과 삼요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오령의 경우는 대자연의 영기가 순환되듯이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고, 세월이 흐르면 승천하여 선계로 간다.
이와 달리 악한 것들이 모여서 태어난 삼요는 태고적부터 단일 개체라 들었다.
죽지 않고 계속 강해지며 존재해온 대재앙들이다.
‘재밌군.’
천여운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이곳 미래로 떨어진 후로 정말 제대로 싸워본 기억은 없었다.
절반의 여력조차도 발휘하지 못했는데, 어쩌면 이 대요괴라 불리는 금모 구미호가 이를 가능하게 해줄 수 있다고 여겼다.
-고오오오오!
완전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금모 구미호.
근 2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황금빛 여우의 모습은 대요괴라고 하기에는 장엄하기마저 해보였다.
어째서 이만한 공동에 가뒀는지 알 수 있을 만큼 너무도 거대했다.
“이, 이런 게 설선에 있었다니....”
장로 성진규는 기겁을 했다.
황금빛 여우에게서 풍겨지는 기운은 그를 너무도 무력하게 만들었다.
인간 형태일 때도 괴물 같았는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금모 구미호는 그야말로 천지를 위태롭게 하는 존재 그 자체였다.
경천극 또한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늘마저 두려워하는 마(魔)가 이렇게 깨어났구나.”
림주가 그렇게 경고했던 예언이 지금 벌어진 것이다.
인외의 존재라 할 수 있는 저 괴물을 한낱 인간인 자신들이 대체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망연자실해하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오싹!
“이, 이건?”
어디선가 흉폭하면서 어두운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은 금모 구미호가 풍기는 사악한 요기와는 완전히 다른 기운이었다.
심연에 가까운 어둠 그 자체였다.
“마기?”
경천극이 놀란 눈으로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그의 몸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넘실대며 피어올랐는데, 마기(魔氣)가 유형화 된 듯 했다.
이를 내려다보는 금모 구미호의 눈빛이 묘해졌다.
이때 천여운이 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싸우기에 여긴 협소하구나.”
-우우우웅!
바로 그 순간 허공으로 오색 빛을 내뿜는 검이 생겨났다.
이것은 평범한 무형검이 아니었다.
‘저건 대체?’
오색빛에서 하나가 아닌 여러 기운들이 동시에 느껴졌다.
이것은 오행의 기운을 하나로 응집시킨 무형의 검이었다.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모든 기운을 하나로 모아준 천마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팟!
천여운이 검결지를 하늘로 찔렀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콰아아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봉우리 전체가 흔들렸다.
사방이 흔들리는 강한 진동에 경천극을 비롯한 장로 성진규가 균형을 잡지 못해서 벽면을 붙잡아야 할 정도였다.
“우웃!”
이윽고 그 진동이 멈췄을 때, 그들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어두웠던 공동이 햇빛으로 환해졌다.
장로 성진규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위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세...세상에.....위가 사라졌어.”
공동의 위가 통째로 사라진 것이었다.
그 말인즉 거대한 산봉우리 위를 전부 날려 보냈다는 의미였다.
이것 역시도 놀라웠지만 방금 전에 그 일격을 날릴 때 느껴졌던 기운을 그야말로 천지를 찌를 듯 한 기세였다.
‘마, 막을 수 있을 지도 몰라!’
장로 성진규의 어두웠던 얼굴에 희망이 피어올랐다.
그저 끝인가 싶었는데, 천여운이라면 금모 구미호를 상대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부웅!
천여운이 능공허도로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고는 거대한 금모 구미호에게 말했다.
“이제 제대로 해보자.”
이곳은 그들이 제대로 싸우기에는 매우 비좁은 곳이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우우우우웅!
‘응?’
갑자기 금모 구미호의 거대한 몸이 다시 황금빛으로 물들더니, 이내 몸이 줄어들며 어느새 인간의 형태로 돌아왔다.
왜 갑자기 인간의 모습을 한 건지 이해할 수 없어하는데, 그녀의 금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무슨 의도지?’
천여운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뭘 하는 거지?”
그때 그녀가 눈물을 터뜨리며 천여운을 향해 날아왔다.
그리고는 사무치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천마아아아아!”
‘!?’
< 47화 대요괴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