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은자림(隱玆林) (2) >
눈이 덮인 푸른 기와집의 대청마루.
그 위에 청색의 단아한 복장을 하고 있는 삼십대 중반 정도의 여인과 깔끔한 무복을 입은 중년인이 단호한 얼굴로 서있었다.
그리고 대청마루의 앞쪽 마당에 회색 수염에 도복을 입은 노인이 불같이 성토를 토해내고 있었다.
“허어! 림주를 만날 수가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벌써 나흘 째 밖으로 나갔던 장로들과 림의 무인들이 보이지 않건만.”
노인의 이름은 성진규.
지금은 이름조차 남지 않은 무성검문(武成劍門)의 마지막 후예이자, 이곳 은자림에서 이성 장로의 직책을 맡고 있다.
성진규 장로의 말에 여인이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서 답했다.
“들은 그대로에요. 성 장로. 지금 아버님은 몸이 편찮으셔서 대화조차 하기 힘든 상태랍니다. 그만 돌아가세요.”
여인의 이름은 하백령.
은자림 림주의 하나뿐인 무남독녀였다.
겉보기에는 삼십대 중반처럼 보이나, 그녀의 심후한 내공 덕분에 그런 것이지 실상 육십대 후반의 나이이다.
-으득!
성진규 장로가 이를 갈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옆에 서있는 중년인을 노려보았다.
‘맥위강 이놈!’
중년인의 이름은 맥위강.
그와 같은 이성 장로이자 하백령의 남편이다.
굴러 박힌 돌이 원래 있던 돌을 쳐낸다는 격이 이런 듯 했다.
50여 년 전에 저 자가 은자림 설선에 들어온 이후로 조금씩 변해가더니, 이제는 은자림이 그의 손에 휘둘리고 있었다.
‘그가 아가씨의 곁에 맴돌 때 떼어놨어야 했어.’
평생을 설선 안에만 지내온 하백령을 안타깝게 생각했던 은자림의 기인들은 젊은 유입자와 어울리는 것을 흐뭇하게 지켜봤었다.
그 결과를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끝까지 만류했을 것이다.
“......심각한 일입니다. 아가씨. 사성 장로 이상은 림주의 재가가 떨어져야 나갈 수 있습니다. 부군인 맥 장로가 독단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사실 따지자면 한도 끝도 없었다.
300여명이나 되는 은자림의 무인들이 무단으로 나간 점.
장로 회의를 하지도 않고서 멋대로 천살성을 척살하라는 명을 내린 점.
징계나 장로 박탈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다.
‘놈을 따르는 자만 많지 않았어도.’
원래는 강경파와 온건파의 경계는 십여 년 전만 해도 그럭저럭 팽팽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강경파로 옮겨간 자들이 늘었다.
삼성 장로 중의 두 사람이나 맥위강을 따랐다.
8할이나 되는 장로들이 그를 따르면서 실질적인 실세가 된 셈이었다.
“아버님을 대신하여 제가 림주 대리로서 결정한 사안입니다. 크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하백령의 말에 성진규 장로가 속으로 혀를 찼다.
‘허어....’
이 정도면 거의 끼고 보호하는 수준이었다.
적어도 그가 나타나기 전만 하더라도 영석하고 사리분별이 뛰어난 하백령이 그의 일이라면 저렇게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비호했다.
‘별 수 없구나.’
잘잘못을 따지고 싶어도 당장에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하면 별 수 없군요. 아가씨께서 대리를 자처하셨으니, 연락이 두절된 장로들을 찾을 추적대 편성을 허락해주십시오.”
성진규 장로가 허리를 살짝 숙이며 부탁했다.
언뜻 요즘 같은 세상에 그가 하백령에게 깍듯이 하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었지만 림주 일가는 존중받아 마땅했다.
한때 전쟁으로 세상이 피폐해졌을 무렵 은자림의 기인들을 설선에 받아준 은가(恩家)였으니 말이다.
‘이것만큼은 어쩔 수 없으리라.’
자그마치 삼백 명이 넘는 자들이 사라졌다.
그들 중에는 절반 이상은 강경파도 섞여 있으니, 맥위강이라고 해도 마냥 반대하지는 않을 거라 여겼다.
하백령이 대답이 늦어졌다.
‘눈동자가 계속 움직이는 것을 보아 분명 전음으로 놈과 대화하고 있구나.’
상의를 하는 듯 했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확실히 그것은 일리가 있군요. 림주 대리로서 허락하겠습니다. 성 장로와 향 장로 두 분께서 수고해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성진규 장로의 표정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자신과 더불어 향 장로는 온건파의 수장 격이었다.
그런 그들더러 추적대가 되라고 권한다는 이런 상황에서도 대놓고 수작을 부리겠다는 의미였다.
성진규 장로가 결국 화를 참지 못했다.
-으득!
“정녕 이런 식으...”
바로 그때였다.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사방의 공간이 일렁이더니 이내 허공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쩌저저저적!
“아닛?”
“이, 이게 무슨?”
세 사람이 동시에 이를 보면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곳 설선의 전체는 천화만변진으로 둘러싸여 사방에 그저 드넓은 초원에 둘러싸인 것처럼 보였다.
그나마 이곳이 설산 한가운데라 알 수 있는 것은 내리는 눈 때문이었다.
‘천화만변진이 깨지려고 하다니?’
허공에 금이 간다는 것은 진에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었다.
성진규 장로가 다급히 말했다.
“아가씨. 당장 설선의 입구 쪽으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진법의 기관은 설선의 입구 쪽에 있었다.
만약 외부인이 침입한 것이라면 막고서 진을 보수해야 했다.
그런데 그와 달리 이 변화에 놀라했던 두 사람은 대청마루에서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가씨?”
“우리는 이곳을 지키겠습니다.”
“네?”
“림주께서 위독하신데 어찌 이 자리를 벗어난단 말입니까?”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림주를 지키는 자는 뻔히 림주의 거처 앞 태청봉에 떡 하니 버티고 있었다.
“경 장로가 태청봉을 지키고 있잖습니다!”
일성 장로 경천극.
림주를 제외한 은자림 최고이자 최강의 고수였다.
그렇게 뛰어난 오성을 지녔다고 자랑하는 맥위강 역시도 이 자의 아성만큼은 여전히 뛰어넘지 못했다.
오래전 유입된 기인들과 달리 경천극은 먼 옛날부터 림주 일가를 수호해왔다.
“아가씨의 말을 못들으셨소? 성 장로.”
이제야 입을 떼는 맥 장로.
하지만 이는 오히려 성진규 장로를 자극하고 말았다.
“이노오옴! 진을 보수할 수 있는 자가 림주와 아가씨뿐이라는 것을 잊었더냐?”
“지금 누구더러 그런 상스러운...”
-슥!
하백령이 화를 내려하는 것을 맥위강이 괜찮다며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다시 성진규 장로에게 말했다.
“당장에 적이 쳐들어왔다면 그럼 그들이 있는 앞에서 진을 보수하라는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니겠지요?”
“그, 그건....”
성진규 장로가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분명 맞는 말이었다.
림주마저 저리 위독한 마당에 그녀마저 잃는다면 성지인 설선이 세상에 드러날 지도 몰랐다.
“큭!”
“빨리 가보시오. 림주는 우리 두 사람이 지킬 터이니.”
맥위강을 노려보던 성진규 장로가 결국 몸을 돌렸다.
더는 그들에게 강요할 수 없었다.
-팟!
말없이 성진규 장로가 경공을 펼치며 나가버리자, 하백령이 가증스럽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언제까지 애 취급을 할 생각이야. 저 영감탱이는...”
방금 전의 그 단아함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런 그녀를 맥위강이 살짝 끌어안으며 달랬다.
“괜찮소. 어차피 곧 모든 것이 바뀌잖소.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부인.”
“서방님.”
하백령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는 진심으로 자신의 남편인 맥위강을 사랑했다.
그가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은 것이 그녀의 마음이었다.
“방해를 받았으니, 다시 하던 일을 마무리 지읍시다.”
맥위강이 마루 위에서 멀리 설선의 입구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로 적이 침입한 것이라면 지금만큼 혼란스러운 시기야 말로 원하는 바를 노리기 가장 적절한 시점이었다.
-달칵!
림주의 거처인 안방의 문을 열자 매캐한 냄새가 풍겨져 나왔다.
마치 살이 썩는 것만 같은 냄새.
그 어두운 방안에는 림주로 짐작 가는 인물이 침상에 누워있었다.
-까득! 까득!
림주는 두 눈을 부릅뜨고서 이를 갈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상태가 이상했다.
파랗게 일어난 핏줄부터 시작해 피부의 상당 부분이 썩어들고 있었다.
부친의 상태가 이 정도로 위독한데, 이를 바라보는 하백령의 표정은 냉담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림주에게 다가간 맥위강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스포이드가 들어있는 작은 병이었다.
이를 열은 그가 스포이드에 병안에 액체를 빨아서 림주의 눈동자로 가져가서는 입을 열었다.
“자. 림주. 아까 하던 말을 계속 해봅시다. 보천봉의 절진을 어떻게 열 수 있는지 빨리 말해보시오.”
-톡!
그 말과 함께 맥위강이 액체 방울을 림주의 부릅뜬 눈동자로 떨어뜨렸다.
그러자 림주가 거품을 물면서 고통스러워했다.
“끄그그그극!”
림주는 마치 이것을 견디려는 것처럼 두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이 모습에 맥위강이 혀를 내둘렀다.
“과연 선인 피를 이은 자 다운 인내심이오. 하지만 그 버팀이 언제까지 갈까.”
그가 다시 한 방울의 액체를 떨어뜨렸다.
그러자 몸을 파르르 떨던 림주의 동공이 점차 풀리기 시작했다.
그림자로 드리워진 맥위강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 * *
한편 설선의 입구.
“이럴 수가.”
악영은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천여운의 일검에 천화만변진 전체에 금이 가더니, 이윽고 절벽을 잇는 흔들다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천화만변진이 깨지다니.’
천화만변진은 림주의 선조라 할 수 있는 선인이 만든 천고의 진이었다.
이것이 깨졌던 적은 이곳 진이 만들어진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방금 그 검은 대체....’
모든 것을 파멸시키는 검.
무상천마검이었다.
공간마저 베어내는 이 검은 놀랍게도 진마저 강제로 베어냈다.
진을 유지시키는 장치들을 파괴시킨 것이 아니라 일시적이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진을 부순 자는 처음 본다.
“히히히! 역시 주군이십니다.”
허봉이 엄지를 척 들어올렸다.
최근 배운 제스처였는데, 이것은 즐겨 사용하고 있는 그였다.
“가자.”
천여운이 앞장서며 말하자 악영이 정신을 차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길게 이어지는 흔들다리를 건너자 중간에 금이 가있는 공간의 경계면이 나타났다.
그곳을 지나치는 순간,
“오옷!”
그 안에 새로운 신세계가 펼쳐졌다.
꼭대기가 평지처럼 되어 있는 산봉우리들이 흔들다리로 이어져 있고, 그 위에는 수많은 기와들이 늘어서 있는 이곳이 바로 성지 설선이었다.
‘이런 곳이 숨겨져 있었다니.’
천여운 역시도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진의 기운에 숨겨져 있었는데, 안으로 들어서자 수많은 강한 기운들이 여기저기서 느껴졌다.
‘대단한 진이군. 이 많은 기운들을 전부 차단시키다니.’
천여운도 약간은 반신반의했던 부분이었다.
혹시나 악영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 아닐까 의구심을 품었지만 아니었다.
이 진법을 만든 자가 궁금해졌다.
-우르르르!
그때 다리를 건너 첫 번째 봉우리에 발을 밟는 그들의 앞으로 수많은 노란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 몰려왔다.
이에 악영이 말했다.
“스승님. 저들은 설선의 입구인 인평봉의 무인들입니다.”
인평봉(人平峰).
성지 설선의 첫 번째 봉우리의 이름이었다.
설선은 총 아홉 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다.
첫 번째가 입구인 인평봉, 두 번째 지중봉, 세 번째 육성봉, 네 번째가 오성봉, 다섯 번째가 사성봉, 여섯 번째가 삼성봉, 일곱 번째가 이성봉, 여덟 번째 봉우리가 태청봉, 그리고 마지막 아홉 번째 봉우리가 천선봉이다.
마지막 천선봉이 림주가 기거하는 거처가 있는 봉우리다.
정상적으로 초빙되어 들어온 기인들이라면 교시(橋試)라 하여, 다리를 건널 수 있는 자격을 위한 시험을 치르게 된다.
이를 통해 다음 봉우리를 건너가게 되는데, 육성봉부터는 장로의 칭호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천여운은 강제로 천화만변진을 깨부수고 들어왔다.
이는 결국,
-우르르르르!
노란 무복의 무인들이 봉을 들고서 포위하고서 겨냥했다.
적으로서 들어온 셈이었다.
무인들의 틈새로 한 중년인이 걸어 나왔다.
“인편봉주.”
악영이 난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는 이곳 무인들을 가르치는 자이자 인평봉의 주인이었다.
실력만으로는 육성 장로에 버금가는 자였지만 후학 양성을 위해서 이곳의 봉주로 남은 자였다.
인편봉주라는 자가 입을 열었다.
“악 장로. 은자림의 오성 장로라는 자가 림주의 허락도 없이 속세인들을 데려오다니,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이들 은자림의 사람들은 외부인들을 속세인이라고 불렀다.
이에 악영이 난감하다는 목소리로 답을 하려고 하는데,
-슥!
“스승님?”
앞으로 나선 천여운이 갑자기 손을 뻗었다.
인편봉주가 무슨 짓인가 싶어 의아한 표정을 짓는데, 천여운이 뜬금없이 손바닥을 위에서 밑으로 내렸다.
그 순간,
-쿵!
“흐헉!”
인편봉주의 무릎이 강제로 꿇려졌다.
‘무,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진기가....’
말도 안 되는 진기였다.
그런데 그것은 그에게만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인편봉주를 비롯한 인편봉에 있는 수백 명의 무인들이 강제로 무릎이 꿇렸다.
아니, 그들의 몸을 엎어졌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끄으으으.”
“모, 몸이....”
악영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은거기인들의 가르침을 받은 인평봉의 무인들은 하나 하나가 절정의 이상의 경지에 이른 자들이었다.
그런데 이 많은 자들을 설마 봉주를 비롯하여 전부 강제로 저리 만드리라고 누가 여겼겠는가.
-고오오오오!
옥죄이는 진기는 그들을 숨조차 쉬지 못하게 만들었다.
온몸을 파르르 떨면서 짓눌림에 고통스러워하던 자들이 하나둘씩 정신을 잃어갔다.
"스, 스승님!"
사실 악영은 장로의 입장이었기에 대화를 시도해볼 생각이었다.
당황해하는 그에게 천여운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왜? 일일이 대화라도 할 참이었더냐.”
< 46화 은자림(隱玆林)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