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그림자 암살자 (1) >
27년 전.
천우진은 비밀 감옥에 갇히면서 단전이 폐해졌다.
오대고수 중 한 사람인 그의 무공이 혹여 회복될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고 여겼는지, 그것도 모자라 주요 혈도를 막고서 산공 장치들로 유폐시켰다.
'무공이 회복된다고?'
이미 포기했던 일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용천 그룹에 도착하여 운기 장치를 이용하여, 단전을 회복시켜보려 했으나 무리였다.
단전이 폐해진 지 너무 오래되어서 회복이 불가능할 지경이 되었다.
'이미 받아들였다고 여겼건만.'
가부좌를 틀고 있는 천우진의 눈빛이 일말의 기대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가 앉아 있는 이곳은 용천그룹 회장 연공실이었다.
참 사람의 마음이란 간사했다.
'내가 다시 무공을 펼칠 수 있을까?'
무림인, 아니 무인이 가장 큰 행복과 만족을 느낄 때는 스스로의 무위에 대한 성취감을 얻을 때였다.
그리고 가장 절망할 때가 그 무(武)를 잃을 때였다.
그런 무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내공을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나자, 그의 힘없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준비는 되었겠지."
천여운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천우진이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된 얼굴로 답했다.
"그렇습니다."
세수가 일흔 여섯이었지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의 그런 모습에 천여운이 피식 웃었다.
무인으로서 심경을 공감하기 때문이었다.
'성공적으로 되었으면 좋겠군.'
무공을 회복시키는 것은 천여운 역시도 이번에 처음 하는 일이었다.
대자연의 경지에 오른 후로 얻은 깨달음이었는데, 사실 가장 처음 무공을 회복시켜주고 싶은 한 사람이 있었다.
'장 호위.'
그는 어렸을 적부터 천여운을 돌봐준 호위였다.
소교주 쟁탈전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다른 종파의 함정에 빠져서 무공을 잃은 장 호위를 늘 안타까워하던 천여운이었다.
'지금이라면 가능하다.'
천여운이 천우진의 단전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긴장하고 있는 그에게 천여운이 말했다.
"많이 고통스러울 거다."
".......고통은 익숙합니다. 허허허."
천우진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답했다.
비밀 지하 감옥에서 한 시도 가만히 지낸 적이 없었던 그였다.
참을 자신이 있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고오오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천여운이 주변의 대자연의 기운을 그에게로 끌어 모았다.
무공을 잃은 천우진은 기감이 없어서 이를 느낄 수 없었지만 연공실 바깥에서 작은 유리창으로 이를 바라보고 있는 천유장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게 뭐지? 주변의 기운들이 급증하고 있다.'
현 시대로 오면서 대자연의 기운은 옅어졌다.
그 덕분에 무림인들은 운기 연공 장치를 이용하여 기운을 모아서 운기조식을 한다.
그런데 연공실로 맑은 기운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나를 매개체로 삼아.'
그 대자연의 기운들이 천여운의 몸으로 응집했다.
그와 동시에 천여운의 손바닥을 통해 천우진의 단전으로 대자연의 기운이 스며들었다.
"헛!"
천우진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운이 단전이 부근이 충만해져오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기운은 장치를 이용한 운기 조식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매우 순도 높은 맑은 기운이었다.
"지금부터 견디기 힘들 거다."
"괜찮습니다."
"좋다."
천여운의 손바닥에서 붉은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노의 스캔 기능으로 신체 내부를 보면서 동시에 대자연의 기운을 통제했다.
'단전이 있던 자리가 완전히 부서진 채로 굳어졌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이대로 완전히 고착되었군.'
스스로 운기해서 회복될 문제가 아니었다.
천여운이 그곳에 대자연의 기운을 집중시켰다.
-고오오오!
그러자 대자연의 기운이 단전 부위로 모여들면서 하나의 둥근 단(團)의 형태를 형성했다.
그러면서 그 부근에 굳어서 살점이 뭉쳐져 있던 것들이 파괴되어 갔다.
"끄윽!"
천우진의 입에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마치 단전이 파괴되었을 때의 고통이 다시 돌아온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천여운이 반대 손을 휘젓자 주변의 대자연의 기운들이 유형화되면서 아주 작은 구의 형태로 바뀌었다.
"강제로 막아놓은 혈맥들을 모두 뚫겠다."
-슥!
천여운이 손을 움직이자 대자연의 기운이 응집한 작은 구들이 동시에 천우진의 모든 주요 혈액으로 파고들었다.
엄청난 고통이 천우진의 몸을 잠식했다.
"끄으으읍."
천우진이 이를 꽉 깨물었다.
얼굴이 새빨개지고 안색이 파랗게 변할 만큼 아팠는데도, 신음성만 내고서 꿋꿋이 버텼다.
'제법 강단 있군.'
당연히 버티지 못할 거라 여겼는데 의외였다.
확실히 연륜과 인내가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님.'
유리창 너머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천우장의 손은 땀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그렇게 혈맥을 뚫는 고통이 한 시간 가량 지났을 무렵이 지났을 때였다.
'이 정도면 됐다.'
천우진의 몸이 대자연의 기운이 만들어낸 운기의 경로와 단전의 형태에 적응하고 있었다.
천여운이 주머니 속에서 작은 옥병 같은 것을 꺼냈다.
'기린의 피.'
옥병에 담겨 있는 것은 몇 방울 남아있는 기린의 피였다.
대장로 문란영을 회복시키고 호리병 안에 아주 조금 남아있던 것을 챙겨놓은 천여운이었다.
기린의 피는 단 한 방울로도 상당한 내력 증진과 대단한 회복력을 일으킨다.
"하아....하아."
온몸이 땀으로 젖어있는 천우진의 입을 벌리게 한 천여운이 옥병에 남아있는 세 방울 가량의 기린의 피를 털어 넣었다.
"삼켜라. 그리고 운기해라. 지금부터는 네 역할도 중요하다."
혈맥이 전부 뚫려져 있기에 스스로 운기해서 그것이 막히지 않게 해야 했다.
대자연의 기운으로 만든 단이 기린의 피로 인해 생겨나는 회복력으로 단전의 형태를 갖추도록 유지해야만 이를 회복할 수 있었다.
천여운이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기린의 피를 복용한 후에 생겨나는 화기를 극음의 한기로 제어해주는 일이었다.
"끄으으으으!"
고작 세 방울에 불과했지만 천우진의 몸에서 열기가 치솟았다.
내공이 안착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고작 세 방울조차도 견디기 힘든 상태였다.
-쩌저저저저적!
연공실 전체가 한기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엇?"
유리창마저도 김이 서려서 시야가 가려졌다.
덕분에 바깥에서 안절부절 하지 못하며 지켜보던 천유장은 더욱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두 시간 무렵이 지났을 때였다.
-쩌적!
얼어있던 연공실의 문이 열렸다.
문 안에서 온몸에 서리가 붙어 있는 천여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발자국도 꼼짝하지 않고 있던 천유장이 다급히 물었다.
"선조님. 어, 어떻게 되셨습니까?"
"직접 봐라."
"네?"
그때 하얀 수증기로 가득한 연공실 안에서 누군가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를 지켜보는 천유장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이 럴 수가.....'
설마 이 모습을 지금에 와서 다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불과 세 시간 전만 하더라도 일흔 먹은 노인 그 자체였던 천우진이 27년 전 구속되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겉모습만 본다면 사오십 대 중년으로 보였다.
"아, 아버님!"
눈빛에 흘러나오는 정기만 보더라도 천우진이 무공을 회복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당사자인 천우진 역시도 기쁨을 감출 수 없는지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선조님!"
천우진이 천여운의 앞에 무릎을 꿇고서 엎드렸다.
다시는 무공을 회복하지 못할 거라 여겼는데, 다시 회복한 것도 모자라 환골탈태마저 해서 잃어버린 세월을 되찾았다.
탱탱해진 피부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이....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그런 그에게 천여운이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말했다.
"은혜를 갚고 싶거든 완전히 회복한 후에 본교의 위신을 다시 살려라."
"아아아."
단전을 회복하고 환골탈태를 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성기 시절만큼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가장 불완전한 것은 근육의 상태였다.
체내의 경우는 천여운이 강제적으로 대자연의 기운을 통해 현경에 걸맞을 만큼의 상태로 되돌려놨지만 근육은 여전히 퇴화된 상태로 회복되어 외공 훈련이 필요했다.
-팍!
천우진이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말했다.
"빠른 시일 내로 회복하여 소손의 죄를 바로잡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당사자의 노력과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였다.
천유장은 자신의 아버지의 원기 넘지는 목소리에 할 말을 잃었다.
'27년 전에 잃은 무공을 회복시키다니....선조님께선 정말로 마신의 재림이시란 말인가.'
천여운의 끝 모를 능력에 경탄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불가능한 일이 있을까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런 천유장에게 천여운이 말했다.
"그거 완성되었다고 했나?"
"아! 코어 정제 기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무림 협회에서 탈환해가려 했던 코어 정제기기를 실은 트럭들을 전부 회수하는데 며칠이 소요되면서 설치가 늦어졌었다.
이제 이것을 활용하면 코어를 정제할 수 있게 된다.
"섹터 4 공장에 있다고 했나?"
"네. 그렇습니다만."
"가자. 한 번 봐야겠다."
"네? 선조님. 막 끝나서 공력 소모도 심하셨을 터인데, 쉬서야 하는 게 아닐지?"
연공실 밖을 지키고 있던 천유장은 안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기운의 유동을 세 시간 가까이나 느꼈다.
이 정도로 무리했으면 운기조식을 하면서 회복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를 천우진도 동의하는지 거들었다.
"유장이의 말이 맞습니다. 선조님. 아직까지 급한 게 아니라면 쉬시는 편이...."
"필요 없다."
단박에 거절하는 천여운이다.
걱정은 알고 있지만 천여운은 진기를 전혀 소모하지 않았다.
대자연의 기운을 이용한 것이었기에 일부 심력 소모는 있었지만 당장 쉬어야 할 만큼 지치진 않았다.
'허....'
이를 모르는 천우진과 천유장만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 * *
용천 그룹 부지 내 사옥 중 한 건물.
이곳의 지하에는 숨겨진 감옥이 하나 있었다.
감옥에는 긴 갈색 머리카락에 오똑한 콧날을 가진 이국적인 미남자가 불만에 가득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천여운에게 패한 마족 데오였다.
'칫.'
살면서 몇 번이나 기절을 해보았을까.
천여운의 명을 이수한 그는 이곳에 도착해서야 심장부 핵에 박혀 있던 심검을 제거 받을 수 있었다.
오랫동안 핵에 타격을 받은 그는 하루를 꼬박 기절해 있었다.
그것이야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다.
"여기.....감옥 아냐?"
"응. 맞아."
감옥 바깥에서 히죽거리며 그의 질문에 답한 것은 천여운의 제 2비서인 샤케나였다.
그가 깨어나면서 회복을 위해 마력을 일으킨 것을 감지한 그녀는 부리나케 이곳으로 온 참이었다.
마족 데오가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항복했는데, 나는 왜 이 안에 있고 샤케나 너는 밖에 있지?"
"나도 몰라. 주인님께서 네가 깨어날 때까지 이곳에 가둬두라고 했으니까."
해맑은 사케나의 말에 데오가 혀를 찼다.
"쯧쯧, 고작 인간에게 알랑방귀를 끼면서 살아남는 것을 보면 심장 사냥꾼도 그 명성이 다했군."
그들 일족에게 있어 인간은 벌레나 마찬가지였다.
그저 움직이는 것만으로 의식하지 않아도 밟혀 죽는 벌레. 그런 존재에게 항복을 하고서 충성 맹세를 한 것은 아직도 그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냈다.
"주인님은 다른 인간들과 달라. 너도 겪었을 텐데."
샤케나의 말에 데오가 답답했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그 인간은 차원이 달랐다.
"......그놈 정말 인간이 맞는 거냐? 오랫동안 이 행성에 일족들을 보냈지만 그런 괴물이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헤. 고작 사백 년 밖에 살지도 않았으면서 그런 소릴 하네."
그들 일족의 평균 수명은 인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더욱 강해질수록 수명이 늘어나는 구조로 후작급 이상만 되더라도 살아온 햇수가 기본적으로 천 년은 훌쩍 넘긴다.
"사백 년이면 충분히 오래 산거다. 너는 이곳에 온지 얼마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인간의 수명은 고작 백 년 채도 되지 않는다. 놈의 얼굴만 보면 고작 오분지의 일 채도 못한 것 같은데 그런 강함을 지녔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군."
"그래? 내가 비막헌이라는 인간한테 들었는데, 주인님은 천 년이 넘게 살아왔다고 하던데?"
"뭐엇? 천 년? 그놈 정말 인간이 맞나?"
천 년이라는 말에 데오의 믿기지 않는지 혀를 내둘렀다.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샤케나의 말은 오히려 데오를 납득시키게 만들었다.
'.......하긴 그 정도 강함이라면 천 년은 살아야 가능할 법하긴 하지. 내가 고작 이십 년 정도 밖에 살지 않은 인간 따위에 게 질 리가 없잖아.'
혼자서 자기 위안을 하는 그에게 샤케나가 물었다.
"그나저나 너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배신자 놈은 찾긴 한 거야?"
그런 그녀의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던 데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사케나가 이해가 가지 않는지 물었다.
"그런데 멀쩡한 거야?"
분명 배신자를 만났다면 필사적으로 그들은 싸울 수밖에 없었다.
한 쪽은 끝까지 도망쳐야 하는 입장이었고, 한 쪽은 마왕의 명으로 놈을 잡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데오는 그 질문에 인상만 찡그릴 뿐이었다.
이에 샤케나가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너.....졌구나."
그것 외에는 자존심이 강한 데오가 이렇게 입을 다물 이유가 없었다.
그녀가 그를 약 올리기라도 하듯이 말을 이었다.
"패했는데 살아남았다는 건 배신자에게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했구나."
동족 포식을 하는 배신자의 입장에서는 추적자를 살려둘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항복을 하여 충성 맹세를 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네, 네년도 인간에게 항복을 맹세 했잖아!"
"일족의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니잖아!"
사케나가 이를 비꼬듯이 말하는 것은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동족 포식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금기였다.
그 자를 척살하는 것은 율법이면서도 마왕의 명을 이행하는 것이었는데, 데오는 이를 어기고서 배신자에게 항복한 것이다.
"비굴하네. 백작의 칭호가 부끄럽지도 않나봐."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라. 네년도 그분을 뵈었다면 생각이 달라졌을 거다."
"그분?"
배신자를 높이는 말에 사케나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이를 전혀 개의치 않는지 데오가 말했다.
"그래. 그분은.....그분은 더 이상 배신자라 불릴 수 있는 위치의 존재가 아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배신자라고 불릴 수준이 아니라니."
"......그분은 더 이상 동족 포식이 필요치 않을 만큼 강해지셨다."
"뭐?"
"백작의 작위를 가진 나를 살려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나? 그분은 이미 공..."
바로 그 순간이었다.
-푹!
"끄헉!
데오의 가슴을 뚫고서 검은 그림자의 손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그 손에는 데오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핵(核)이 들려 있었다.
"이.....이건....."
데오가 놀란 눈으로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뒤쪽의 그림자 속에서 얼굴이 흉터로 가득한 이국적 외모의 사내가 상반신만 튀어나와서 그의 등을 향해 팔을 집어 넣고 있었다.
"카, 카일!"
그를 알아본 데오가 그 이름을 불렀다.
이에 카일이라 불린 사내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께서 데려오라고 했는데, 고작 벌레 따위에게 정보를 누설하고 있다니."
"너!"
카일의 존재를 알아본 샤케나가 분노가 섞인 목소리로 그를 부르더니, 이내 몸을 페이징시켜 감옥 안으로 들어가 놈을 잡으려 했다.
그 순간 카일의 몸이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쑤욱!
샤케나가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주위를 훑어보았다.
주변에 마력을 감지하려고 했는데, 아무 것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핵을 잃고서 죽어가는 데오가 말했다.
"소.....소용없어. 도망쳐라."
"무슨 소리야!"
"나....나 같이.....신참과 달리......그분의....밑에....있는 일족들......은.....강...하..."
-스륵!
데오의 목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야! 일어나! 죽으면 주인님한테 혼난단 말...."
-촥!
그 순간 감옥 바닥에서 검은 그림자가 날카로운 가시들을 만들어내며 사케나의 몸을 고슴도치로 만들려고 했다.
짧은 찰나에 샤케나가 페이징 모드로 이를 피해냈다.
-우웅!
그 상태에서 샤케나가 바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녀의 주변으로 보랏빛 에너지 구가 생겨나며 그것들이 바닥에 처박혔다.
-콰콰콰콰쾅!
바닥에 수많은 구멍이 뚫리며 아래층이 훤하게 보였다. 그런데 여전히 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딨는 거지?'
샤케나의 눈빛이 심각해졌다.
그녀는 카일이라는 마족을 알고 있었다.
백작 급의 마족으로 그녀보다도 서열이 한참 낮은 존재였는데, 예전에는 마력을 감추지 못해서 종종 기척이 드러났었다.
'마력이 느껴지지 않아.'
그런데 놈의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바닥에서 그림자가 튀어났을 때조차도 그 순간 소리로 알아차렸다.
샤케나가 큰 소리로 외쳤다.
"어디야? 카일. 숨어있지 말고 한 판 붙자!"
그녀의 외침에 메아리처럼 건물 안을 울렸다.
카일이라는 자는커녕 고요하기만 했다.
샤케나가 주변을 계속 돌면서 그의 종적을 찾아내기 위해 마력을 감지하려 했다.
그때였다.
-슉!
귓가를 울리는 소리에 사케나가 다급히 페이징 모드를 일으켰다.
어느새 그녀의 가슴 한복판으로 검은 그림자가 통과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핵을 당할 뻔했다.
"이 녀석!"
사케나가 짜증스럽게 뒤를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그 짧은 순간에 카일의 몸이 그림자 속으로 또다시 스며들었다.
"짜증나네."
전보다 완벽해진 능력 때문에 싸움의 형태가 이상해져버렸다.
기분 나빠하는 사케나의 귓가로 카일의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두 사람의 능력으로는 영원히 이 상태가 반복된다. 포기해라. 심장 사냥꾼."
"거기냐!"
샤케나가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에너지 구를 발사했다.
-슉! 쾅!
에너지 구는 애꿎은 벽만 부쉈다.
"쥐새끼 같은 놈!"
다른 쪽 방향에서 다시 카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같은 일족으로 기회를 주마."
'뭐?"
"항복하고서 나와 함께 천무성이라는 인간을 죽인다면, 그 분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영광을 주마."
이제는 항복 제의마저 건네는 놈의 말에 샤케나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헛소리 집어치워. 배신자의 수족이 된 주제에 누구더러 그 딴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네가 주인님을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아!"
-스르륵!
그때 천장의 그림자에서 카일의 머리가 드러났다.
카일이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크큭, 고작 인간 따위에게 주인이라니? 심장 사냥꾼이 한낱 인간의 펫이 다 되었구나. 인간은 언제든지 죽일..."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네놈은 뭔데 이곳에 있는 거냐?"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카일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그와는 달리 익숙한 목소리에 사케나가 환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주인님!"
"주인?"
카일이 의아해하던 그 순간이었다.
-쾅!
천장에서 손 하나가 뚫고나와 그의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엇?"
머리가 붙잡혀 버린 카일이 재빨리 그림자 속으로 몸을 집어넣으려 했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기운이 그를 억압하면서 그의 몸이 도리어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와 천장 위로 끌려가고 말았다.
-콰콰쾅!
"끄거거거거걱!"
< 38화 그림자 암살자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