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대가 (2) >
맛있는 향으로 가득해야 할 레스토랑이 피비린내로 가득하다.
자그마치 43명이나 되는 최상위, 상위 종파의 종주들이 이기어검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여 싸늘한 시신이 되고 말았다.
고왕현 부장과 우호법 섭형이 망연자실한 눈으로 시신들을 바라보았다.
이들은 설마 이런 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는 레스토랑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꿈도 꾸지 못했다.
'아아, 회장님. 어찌하여 이런.....'
분명 천마라고 보고까지 했었다.
주기적으로 도착 시점을 보고하라 했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털썩!
고왕현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천유성을 차기 교주로 모시기로 했기에 그의 죽음은 불충이나 다름없었다.
'회장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내 탓이다.'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한 고왕현이 소리쳤다.
"천마이시여. 이것은 저의 불충이기도 합니다. 제 목숨으로 사죄를 드리겠습니다!"
고왕현이 주먹에 십성 공력을 끌어 모았다.
우호법 섭형이 놀라서 소리쳤다.
"고부장! 자네. 지금 뭐하는 겐가!"
"우호법. 뒤를 부탁하오!"
그리고 자신의 머리 정수리에 있는 천령혈(天靈穴)로 주먹을 내리치려했다.
하지만 그의 주먹은 머리에 닿지 않았다.
심후한 진기가 이를 막았다.
-부들부들!
천여운이 그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고왕현이 붉어진 눈시울로 천여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찌하여 막으시는 겁니까?"
"네 녀석의 충정은 이해한다만 본교를 이렇게 만든 책임을 지지 않을 셈이냐?"
"그건....."
천마신교를 이끌어가는 최상위 종파의 종주로서 그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천여운은 그것을 꼬집은 것이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우호법 섭형이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고 부장, 아니 왕현. 솔직히 자네와의 교분 때문에 장자이신 천유성 이사님을 모시기로 했지만 그분은 그릇된 방법으로 본교의 율법을 어겼네.]
우호법 섭형 역시도 이번 일에 충격을 받았다.
혈손과 종주들에게조차 일말에 자비도 없는 천여운의 처벌은 그야말로 파격적 행보였다.
하지만 이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천마라는 칭호는 단순한 신분이 아닌 천마신교 그 자체를 상징했다.
'천마를 세뇌하려하다니.'
천마신교의 교인이라면 절대로 생각할 수 없는 발상이었다.
그것은 카톨릭 교인들이나 불교의 신자들이 예수님과 부처님을 세뇌하겠다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왕현. 교주님께서 그리 되시고 회사가 해체되던 날, 본교를 되살리자고 함께 맹세하지 않았나? 그 맹세를 쉽게 저버릴 셈인가?]
우호법 섭형의 말에 고왕현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날을 떠올린 것이었다.
천마신교의 모든 교인들 모두가 피눈물을 흘렸던 27년 전.
-으득!
그에게 있어서 그 날은 한이었다.
주먹을 움켜쥐고서 그 날을 되새긴 고왕현이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외쳤다.
"신이 어리석은 짓을 하려고 했습니다. 반드시 본교를 되살리고 그때 이 죄를 갚겠습니다."
"흥."
천여운이 우호법 섭형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것은 책망이라기 보다는 칭찬을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섭형이 황망했는지 고개를 다급히 숙였다.
'뭐지?'
마치 자신의 전음을 읽히기라도 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천여운은 나노의 주파수 도청 능력으로 상시 타인의 전음을 들을 수 있었다.
천여운이 벽면에 무형검에 꽂혀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왕신에게 다가갔다.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왕신이라고 했나. 왕전의 후예여."
"천마이시여."
어두운 안색으로 그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표정을 보면 이미 죽음을 각오한 듯 했다.
"어째서 저를 같이 죽이시지 않으셨습니까? 이것이 불충을 저지른 신을 향한 벌이옵니까?"
왕신이 씁쓸한 목소리로 물었다.
모시기로 했던 주군과 뜻을 함께 했던 동지들이 죽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다.
차라리 같이 죽었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내게 죽을 각오로 덤벼들더구나."
능력자인 여문형과 달리 왕신은 천여운이 얼마나 강한 무력을 지녔는지 알고 있었다.
그 격차가 하늘과 땅의 간극임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유성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검을 들었다.
"......송구하옵니다. 죽여주십시오."
어떠한 종주들도 그런 용기를 발휘하진 못했다.
불구덩이를 향해 몸을 날리는 격이었다.
"제법 싹수가 보이더군."
"네?"
천여운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칭찬에 왕신이 의아한 눈빛이 되었다.
상대의 역량을 알면서도 검을 든다는 것을 천여운은 높이 샀다.
그래서 곧장 죽이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벽에 막혀 있다.'
단 일 초식만으로 천여운은 그의 상태를 파악했다.
약간의 깨달음만 주어도 현경의 경지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 현재 왕신의 상태였다.
'현경의 가능성을 지닌 녀석은 드물지.'
화경의 경지와 달리 현경부터는 마의 구간이었다.
죽이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 천여운에게 왕신이 말했다.
"제게 혼자 살아남는 치욕을 주실 생각이십니까? 저 역시도 회장의 의견에 동조한 죄인입니다. 죽여주십시오."
"죽여달라?"
"어떤 이유로도 천마께 위해를 가한 죄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본교의 율법을 위해서라도 저 역시 목을 베어주십시오."
-팍!
왕신이 힘겹게 두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였다.
벽에 매달려 있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였다.
그 모습에 천여운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마음에 드는군.'
조금이라도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거나, 살고자 하는 마음을 먹었다면 단번에 죽여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죽음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천가의 피를 이어받은 천유성조차 죽음 앞에서는 천박하게 보일만큼 비굴해졌었다.
"부디 제게 죽음을."
왕신이 완고한 눈빛으로 천여운에게 말했다.
이에 천여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이내 손을 들어올렸다.
"원한다면 뜻대로 해줘야지."
-팍!
그때 고왕현과 섭형이 동시에 천여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에게 간청했다.
"천마이시여. 부회장 왕신은 본교에 있어서 없어선 안 될 인재입니다. 그는 실질적으로 천신 그룹을 운영해왔습니다. 그의 수완을 부디 높게 사시어 용서를 바랍니다."
"그는 죽이기 너무 아까운 인재이옵니다. 부디 한 번만 재고 해주시옵소서!"
두 사람은 왕신의 죽음이 너무도 아까웠다.
왕신은 자타공인 종주들 중에 있어 최고의 무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사업 수완도 좋아 현재의 천신 그룹을 중원 재계의 오십 위권 내로 진출시킬 만큼 경영에도 뛰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회장을 비롯한 대부분의 중진들이 죽은 마당에 그마저 죽는다면 천신 그룹은 빠르게 무너질 것이다.
"제발 부회장에게 죄를 갚을 기회를..."
그런 그들의 바람과 달리 천여운의 대답은,
"한 번 반기를 들었던 놈이 다시 반기를 들지 않는다고 확신 할 수 있나?"
"아...."
두 사람이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이를 뒤로 한 채 천여운이 왕신의 머리로 손바닥을 갖다 댔다.
"뜻대로 죽여주마."
"신에게 벌을 내려주서서 감사하옵니다. 천마이시여. 부디 본교를 다시 되살려 주시옵소서."
왕신이 고개를 숙이며 비장한 얼굴로 두 눈을 감았다.
천여운이 손에 진기를 일으켰다.
-팡!
"크헉!"
_주르르륵!
왕신의 칠공에서 피가 흘러내리더니 이내 고개를 떨궜다.
이 광경을 지켜본 고왕현과 섭형이 씁슬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천여운이 어딘가로 손을 뻗었다.
"까악!"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쿠당탕!
천여운의 진기에 의해 강제로 끌려와 바닥에 엎어진 그녀는 기억 조작 능력을 가지고 있는 그 여종업원이었다.
아직도 심장을 움켜쥐고 있는 그녀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천여운을 올려다보았다.
"사, 살려주세요. 제발... 아악!"
그녀가 간질이라도 난 사람처럼 몸에 경련을 일으켰다.
피를 토해내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우웩!"
고왕현과 섭형이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천여운이 그녀를 손 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는데, 이상 징후를 보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천여운이 그런 그녀를 향해 검결지를 아래로 내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촤악!
그녀를 중심으로 날카로운 예기가 일어나며, 이내 바닥에 사방으로 검흔이 생겨났다.
-쩌저저저적!
"우웃!"
"바, 바닥이!"
그녀에게서 흘러나온 검흔은 만찬장의 바닥 전체를 균열로 가득 차게 만들 정도였다.
거기서 흘러나온 날카로운 예기는 무엇이든 베어낼 것만 같았다.
고왕현과 섭형의 입이 쩌억하고 벌어졌다.
"무형검? 아니야. 이건...."
무형검과는 완전히 차원이 달랐다.
그때 섭형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설마....시, 심검!"
"뭐라고?"
그 말에 고왕현이 경악을 금지 못했다.
심검(心劍).
그것은 말 그대로 마음의 검이다.
자연경에 이른 절대고수가 내공도 진기도 아닌 오직 의지만으로 일으킨 검이었다.
전설 속의 경지인 심검을 본 그들의 몸은 전율로 떨려왔다.
'심검을 보게 되다니!'
무(武)를 갈고 닦는 무인으로서 최고의 영광이었다.
천여운이 손을 거두며 말했다.
"검을 뽑았으니 엄살떨지 마라. 계집."
"헉.... 헉..... 엇?"
그녀의 두 눈이 커졌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통이 사라졌다.
"계집."
"네... 네 넷!"
천여운의 부름에 그녀가 황급히 답했다.
"기억을 조작할 수 있다지?"
"그, 그렇습니다."
"좋아. 그럼 저 녀석의 기억을 내가 말하는 대로 조정해라."
"넷?"
천여운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자는 바로 왕신이었다.
아직까지 무형검에 의해 벽에 매달려 있는 그는 죽은 듯이 몸이 축 늘어져 있었다.
고왕현이 놀라서 왕신을 바라보았다.
'설마 죽이지 않으신 건가?'
칠공에서 피가 흘러나와 당연히 죽었을 거라 여겼었다.
그런데 집중해서 들어보니 미약하게 숨소리가 들렸다.
"아!"
살아 있었다.
천여운은 그의 숨통을 끊지 않았다.
"비켜줘라."
"네넵!"
천여운의 명령에 왕신의 곁에 서있던 고왕현과 섭형이 얼른 옆으로 물러났다.
여 종업원이 조심스럽게 왕신에게 다가갔다.
'그런 수가 있었구나. 허어, 이분은 정말.....'
고왕현이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설마 자신을 세뇌시키려고 했던 그녀를 이용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왕신의 앞에 선 여 종업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 어떻게 바꾸면 될지?"
"녀석의 충심을 내게로 돌려라. 그리고 이 사건을 크게 반성하여 죽음이 아닌 본교를 위해 희생할 각오를 심어줘라."
의외로 천여운은 많은 것을 바꾸진 않았다.
이렇게 되면 왕신은 더 이상 죽기를 고집하지 않을 것이다. 현명한 처사에 고왕현과 섭형이 다행스러운 눈길로 왕신을 바라보았다.
-탁!
여 종업원이 왕신의 머리에 오른손을 짚었다.
그녀의 손에서 흰빛이 일어나 왕신의 머리로 전이되었다.
-탁!
그녀가 곧바로 손을 뗐다.
천여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굉장히 빠르군.'
아주 잠깐 손바닥을 접촉하는 것만으로 기억을 수정시킨 것이었다.
"끝난 거냐?"
천여운의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제법 쓸 만한 능력을 가졌구나."
'아!'
여 종업원의 눈빛이 반짝였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죽게 될까봐 걱정했는데, 어쩌면 살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여겨졌다.
'잘 보여야 해.'
비밀감옥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선보여서 천유성에게 관심을 끌어냈던 그녀였다.
그만큼 기억조작 능력은 매우 유용했다.
상황 판단을 마친 그녀가 다급히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말했다.
"살려만 주신다면 오직 당신만을 위해서 제 능력을 쓰겠습니다."
"나를 위해 능력을 쓰겠다?"
"그렇습니다!"
천여운의 관심에 고왕현이 거들었다.
"그녀의 능력은 정말 쓸 만합니다. 잠시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기억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천유성이 그녀를 기용한 것이었다.
천마신교 재건 계획에는 적혀 있지 않았지만, 천유성은 그녀를 이용해 무림 협회와 정부의 각 인사들을 세뇌할 장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꽤 효용성이 높군."
그녀가 환해져서 더욱 자신을 어필했다.
"당신이 원하는 자들은 어느 누구라도 복종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천여운가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 말은 반대로 따르지 않게도 만들 수 있겠구나."
"네?"
"잠시 접촉하는 것만으로 기억을 바꿀 수 있을 정도면 너와 접촉한 자들은 얼마든지 네 편으로 만들 수 있을 테고?"
천여운이 하는 말들은 갈수록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당황한 그녀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충성을 맹세했는데 제가 어찌 당신의 명없이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 그런데 이렇게 충성심이 강한 자를 정부에서 중히 쓰지 않고 어째서 비밀감옥씩이나 되는 곳에 가둬 두었을까?"
천여운의 그 말에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오, 오해입니다. 그건 그들이 저를..."
-촥!
그 순간 천여운의 손날이 그녀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컥!"
그녀의 목에 붉은 선이 생겨나며 흔들거렸다.
두 눈을 부릅뜨고서 원망스럽게 노려보는 그녀에게 천여운이 차갑게 말했다.
"못 믿어서겠지?"
< 24화 대가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