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전설 (2)
광서성과 광동성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십만대산.
십만대산의 산 봉우리 중 하나인 영월봉(永月峰)에는 천마신교의 사당이 있다.
매년 신년 초와 정월 초에는 이곳에서 연례행사가 이뤄진다.
사당에는 역대 천마신교의 교주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었고, 그 내부에는 교주들의 물품 같은 것들을 유리관에 전시해놓았다.
옛 영광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천마신교의 상위 종파들 중에서도 가장 요직을 맡고 있는 열두 최상위 종파와 호법 가문, 그리고 교주 직계 혈손들만이 출입이 가능했다.
순각종(順脚宗).
원래는 일반 상위 종파였으나, 역대 종주 중 한 사람인 백기가 24대 교주의 최측근 육검(六劍)의 일인이 되면서 당당히 최상위 종파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28년 전,
블랙 스카이 컴퍼니 회장이자 천마신교의 교주인 천우진의 검찰 소환장이 발부된 당일, 모든 중진들이 마지막으로 사당에 모였다.
[엄마....엄마....]
[쉿. 종서야. 조용히 해야지.]
젊은 금오연이 쪼르르 달려온 어린 백종서를 다독였다.
사당 안에서 중진 회의가 진행 중이었다.
한참 분위기가 좋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회의장 바깥에서 기다리는 각 종파의 일가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거...이거 봐요.]
그런 금오연의 주의에도 어린 백종서가 그녀의 손을 끌었다.
어린 백종서의 끌림을 따라 간 곳은 역대 교주님들의 물품들을 보관한 전시관 쪽이었다.
백종서가 유리관의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엄마. 엄마. 쪼기 봐봐요.]
백종서가 가리킨 유리관은 역대 교주들의 신분패를 보관한 것이었다.
유리관 안에는 천마신교를 세운 개파 조사인 천마의 신분패를 포함한 총 마흔 세 개의 옥패들이 붉은 융천의 파여진 홈에 놓여 있었다.
[쪼기에 하나 누가 훔쳐갔나 봐요.]
파여 있는 홈 중에서 유일하게 비어있는 곳 하나가 있었다.
그곳은 23대 교주인 천유종의 차대 교주인 24대 교주의 신분패가 있어야 할 자리였다.
[오또케요? 공안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에구. 우리 아들.]
금오연이 어린 백종서를 뒤에서 꼭 안아주며 말했다.
[저기 24대 교주님의 패는 누가 훔쳐간 게 아니란다.]
[그럼요?]
[24대 교주님은 현세의 마신이 되셔서 우리 천마신교를 지켜주시고 계시 단다. 그래서 신분패가 없는 거란다.]
[우와!]
[조용히 해야지. 우리 아들.]
[헤에.]
사실 금오연 역시도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선조 대대로 물려온 순각종의 백가사기(白家史記)를 보면, 24대 교주는 갑자기 행방불명된 것으로 나온다.
천마 조사 이래로 두 번째이자 마지막 천마(天魔)의 칭호를 가진 교주.
제 2의 천마신교의 전성기를 구가했다던 그의 행방불명에 대해서는 본사의 역사가들도 의견이 분분할 만큼 의문이 많았다.
순각종의 14대 종주인 백기를 비롯하여 최측근 육검(六劍)들은 하나 같이 숨을 거둘 때까지도 24대 교주가 반드시 돌아올 거라 믿었다고 한다.
‘분실한 옥패라면 새로이 만들어서 보관해도 될 터인데.....’
그녀 역시도 어째서 역대 교주들이 그러지 않는지는 알 수 없었다.
교주 일가의 대대로 내려온 유지라고만 들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이 비어있는 신분패의 홈이 전설로 회자되는 천마신교의 역사의 일부일 거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탁!
[天魔神敎 二十四代 敎主 天黎雲]
천마신교 이십사대 교주 천여운
‘!!!’
바닥에 떨어진 옥패에 초대 천마 조사의 직인과 함께 새겨져 있는 글자들.
무심코 그것을 보게 된 금오연의 동공이 파르르 떨려왔다.
놀란 것은 백종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분은 현세의 마신이 되셔서 우리 천마신교를 지켜주시고 계시 단다.]
어릴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장성해서는 뭔가 숨겨진 비사가 있을 거라고 여겼던 유리관에 비어있던 신분패.
그것이 그들의 앞에 떨어진 것이었다.
옥패에 찍혀 있는 천마령의 직인을 본다면 이것은 절대로 가짜가 아니었다.
‘대체 이것을 어떻게?.....아!’
떨리는 눈으로 옥패를 바라보던 금오연은 문득 떠올랐다.
‘24대 교주께서 마지막으로 천마검의 소유자이셨는데 행방불명되었다.’
그렇다면 설명이 되었다.
장자인 천유성이 사라진 천마검을 찾았다면 당연히 행방불명된 24대 교주의 시신과 옥패 역시도 같이 발견했을 확률이 높았다.
현실적으로 천 년도 전의 사람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있겠는가.
다만 어째서 그가 이렇게 노여워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천여운이 입을 열었다.
“본교가 언제부터 이렇게 개판이 된 거지? 정확하게 말해라.”
“네?”
그녀는 그 질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회장의 장자인 천유성이 회사가 와해된 이유를 모른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그 원인에 일부가 본인에게 있을 텐데 말이다.
이런 상황을 의아해하고 있는 그녀와 달리 아들인 백종서의 반응은 달랐다.
‘이,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강한 의문.
그것은 일말의 긍정에서 비롯되었다.
처음부터 부정하는 금오연과 달리 백종서의 머릿속에는 많은 것이 맴돌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인간이 천 년을 넘게 수명을 이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간혹 그런 경우는 있다.
높은 경지에 이른 무인이나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간들 중에서 수백 년을 살아왔다는 자들은 게이트가 열린 이후로 더러 알려졌다.
‘그리고 보니.....처음 만났을 때....’
천여운은 요즘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긴 머리카락에 옛 중원복을 입은 모습하며 꼭 사극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색하지 않았었다.
백종서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무슨 위압감이 이리...’
살기를 내뿜는 것도 진기로 억누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노기가 서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는데, 천여운에게서 굉장한 위압감이 풍겨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힘이 아닌 타인을 군림하는 절대자에게서 느껴질 법한 아우라였다.
백종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다시 내렸다.
도저히 천여운과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혼란스러워하던 백종서가 조용히 모친인 금오연에게 전음을 보냈다.
[어머니. 정말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그분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단전이 파훼되어 전음을 할 수 없는 그녀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얘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24대 교주님이 맞는 것 같다고요!]
“뭐?”
[저, 저도 믿기지 않습니다만......]
그의 직감이 확실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게 느껴질 만큼 흥분되었다.
-쿵!
백종서가 머리를 바닥에 찍으며 말했다.
“저, 정말 24대 교주님이 맞으십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눈앞의 이 절대자는 허언을 할 자가 아니었다.
같이 엎드리고 있는 금오연 역시도 침이 바짝 말라서 의구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천여운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그런 그들에게 천여운이 눈을 내리깐 채 말했다.
“백기 녀석의 후예가 아니랄까봐 매사에 의심이 많군.”
‘!?’
14대 종주인 백기 공을 마치 곁에 있던 아랫사람처럼 대하는 말투에 두 사람의 눈빛이 흔들렸다.
너무 자연스럽다 보니, 정말 24대 교주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때 금오연이 인상을 찡그리다, 백종서의 말에 덧붙여 한 가지를 물어보았다.
“무, 무례를 범하는 줄은 알겠지만, 한 가지만 여쭤 봐도 괜찮겠습니까?”
그녀의 물음에 천여운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긍정으로 여긴 그녀가 말을 이었다.
“14대 종주이신 백기 공께서는 저희 가문의 사기인 백가사기에 24대 교주님께 첫 만남에 은혜를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혹시 그것을 아시온 지요?”
이것은 오직 순각종의 사기를 마지막으로 본 금오연 그녀만 알고 있는 일화였다.
다른 종파는 물론이거니와 교주 일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어머니께서 확인하시려는 건가?’
백종서는 어린 나이에 도망자로 다녔기 때문에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꿀꺽!
의심을 하는 물음이었기에 천여운이 불쾌할까봐 두려웠는지 금오연이 잔뜩 긴장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천여운의 반응은,
-피식!
“그 녀석 답지 않게 시시콜콜한 걸 기록에 남겼군.”
그가 알고 있는 백기는 낯간지러운 것을 싫어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종파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기에 은혜를 받았다고 적었다기에 처음 백기와 인연을 가졌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천여운조차 그가 자신의 측근이 될 줄은 몰랐다.
“마도관 시절에 독마종의 천종섬 그놈이 하독한 미독을 해독시켜준 걸 말하는 것이더냐?”
“헙!”
금오연이 자신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에 천여운이 말한 그 내용은 백가사기에 적혀 있는 내용과 거의 동일했다.
백기 본인이 직접 기록한 내용이었으니 말이다.
‘어찌....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너무 놀라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온몸이 떨려서 입을 뗄 수가 없었다.
“헉....헉.....”
호흡이 급격히 벅차왔다.
방벽 바깥에서 구원을 받은 것만으로도 다시없을 기적을 겪었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기적이 아니었다.
눈앞에 진정한 기적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신.....마신....마신! 정말 그분이시라니!’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천여운을 바라보던 그녀가 바닥을 향해 머리를 세차게 박았다.
-쿵! 쿵! 쿵!
“어, 어머니!”
백종서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찌나 세게 박았는지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리는데도 그녀는 붉어진 눈시울로 두 팔을 위로 들어 올리더니 큰 목소리로 외쳤다.
“대 천마신교 만세! 만세! 만만세! 하찮은 순각종의 교인이 대천마신교의 전설이신 2대 천마이자 마신을 배알하나이다! 신의 불경과 무례함을 용서해주옵소서!”
‘!!!’
모친인 금오연이 인정했다.
백종서가 떨리는 눈으로 천여운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눈앞에 어릴 적 천마신교의 사당에서 보았던 유리관 속의 비어있던 옥패의 주인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천 년이 넘는 세월을 뛰어넘어서 말이다.
“아아아!”
백종서 역시 황급히 이마를 바닥에 박으며 소리쳤다.
-쿵!
“순각종의 당대 종주. 신 백종서! 대 천마신교의 2대 천마이자 마신을 배알하나이다!”
천마신교의 전설은 거짓이 아니었다.
신물 천마검의 진정한 주인이 나타났다.
* * *
여운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천마신교의 전설이라 불리는 존재를 보게 된 그들의 감정은 격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멈추게 한 것은 천여운이었다.
“적당히 해라.”
“엇?”
-우우웅!
그가 가볍게 손을 위로 휘젓자, 엎드려 있던 모자의 상반신이 일으켜졌다.
백종서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노기로 가득했던 천여운이 인상을 찡그린 채,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금오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천마이시여. 부디 하문하시옵소서.”
“......본교의 기록 속에 나는 어떻게 임종했지?”
“네?”
그들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은 과거로 찾아왔던 후손 천무성이 말했던 것과 달랐다.
분명 그가 말한 시간의 축에서는 완절마제라고 불렸다고 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칭한 호칭은 마신이었다.
후손 덕분에 뒤바뀐 자신의 시대에서의 별호이자 호칭이었다.
“어, 어찌 그러시는지?”
“묻는 말에나 답해라.”
“제가 어찌 함부로 그것을....”
“답하라.”
강경한 명령에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 송구스럽습니다. 본교의 사기이기에 저희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만. 천마께서는 장백산에서 본교로 복귀하는 도중 요녕성의 서쪽 부근에서 행방불명되신 걸로 사기에 기록되어있습니다.”
‘!?’
천여운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렴풋이 혹시나 하는 그런 짐작을 했었다.
그리고 금오연의 이 말을 듣고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여긴......내가 사라진 후의 세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