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마신 2부 (마신강림)-25화 (25/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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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조짐 (2)

5살.

많은 것을 기억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다.

얼굴은 흐릿하고 기억하던 것도 삼십 대가 되고 나면 대부분 지워지곤 한다.

하지만 인간은 때때로 절대로 잊혀 지지 않은 기억들이 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천마신교에는 신화적인 일화들부터 몇 가지 전설이 있다.

어린 백종서는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이런 신화들을 동화 속 이야기 삼아 들으면서 잠이 들곤 하기도 했다.

나이가 든 지금도 어렴풋이 이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라진 천마검과 그 주인이 나타날 때, 천마신교의 영광이 하늘 위로 우뚝 솟으리.]

정확하게는 아닐지언정 분명 그러했다.

어린 아이가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믿는 것처럼 어렸을 때는 언젠가 천마신교에 천마검을 가진 주인이 나타날 거라 믿었던 적도 있었다.

‘그저 전설일 뿐이지.’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 전설도 산타클로스가 되어버렸다.

블랙 스카이 컴퍼니가 와해되고 정처 없이 떠돌면서 기억 한구석에 묻어 두었던 전설을 눈앞에서 목격하게 되자, 감격에 복받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 두 눈으로 천마검을 보게 되다니!'

-부릉!

운전대를 잡고 있는 백종서의 두 눈꺼풀은 퉁퉁 부어 있었다.

엎드려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만큼 천마신교에 있어서 천마란 존재는 신(神)이나 다름없었다.

외곽에 있던 차량이 심양시 북부 시내로 들어오는 동안 백종서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천여운에게 알려주었다.

“그렇게 선대 종주이신 아버님께서 떠난 후로 저와 어머니는 몇 년 간이나 정처 없이 떠돌아 다녀야만 했습니다.”

돌아온다던 아버지는 끝내 소식이 끊겨버렸다.

그 후로 보름도 되지 않아 어린 그는 어머니의 손에 끌려서 북경을 떠났다.

“어렸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죠.”

“쫓기고 있었군.”

천여운의 말대로 그들은 여러 추적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거의 5년 동안은 정착하지 못하고 길게는 두세 달, 짧게는 하루 이틀 만에 거처를 옮겨야 만 했다.

“그러다 심양시로 흘러오게 되었죠.”

그나마 중원에서 가장 떨어진 대한 정부의 국경 지대에 가까운 곳.

이곳에도 공안과 무림 협회 지부가 있었지만 그나마 영향권이 중원에 비해서 나았다.

“그렇다고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작 다섯 살에 불과했던 그는 괜찮았다.

하지만 백종서의 모친의 얼굴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

덕분에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돌아다니는 신세는 심양시에서도 여전했다.

“그때 저희에게 손을 내민 것이 양부였습니다.”

“네 녀석의 그 권법을 가르친 사람이겠군.”

“맞습니다.”

백종서가 처음 보였던 권법은 천여운이 전혀 알지 못한 무공이었다.

식(式)에 상대방의 눈을 과감하게 가격하는 것부터 상당히 조잡한 권각술을 모은 듯 한 것이,

“사파인이군.”

그 말에 백종서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천마인 것을 떠나서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정말 머리가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 심양시의 네 개뿐인 사파의 조직 중 하나인 흑랑회(黑狼會)의 중간 보스였죠. 양부는 사파인 치고는 꽤 유쾌한 분이었습니다.”

여러 추적자들의 눈을 피한다는 것은 은밀함을 요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여러 뒷세계의 인물들과도 본의 아니게 접촉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백종서와 그의 모친은 양부인 위증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은신처를 알선해주던 양부는 어머니께 반해서 적극적으로 구애를 했죠. 대단한 사람입니다.”

누구도 믿지 못하는 모친을 무너뜨렸으니 말이다.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5년 동안이나 어린 자식을 데리고 도망 다니던 삶에 지쳐있던 그의 모친이었다.

“양부는 어머니께 부친을 잊지 않아도 되니, 자신이 삶의 일부가 되게 해달라고 했고 그렇게 저희 가족이 되었습니다.”

백종서의 표정만 보아도 그 자의 그릇을 짐작할 만 했다.

그의 양부는 뒷세계의 사람답게 백종서와 그 모친의 신분을 세탁하게 해주고, 극구 성형을 거부하는 그녀를 위해 인면 가죽 전문가를 소개해주었다.

‘그래서 잘 알고 있었군.’

백종서가 인면 가죽 전문가를 안다는 말은 사실인 듯 했다.

자신과 단둘이 있을 기회를 만들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고 여겼는데, 의외였다.

백종서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 후로 15년 정도는 저와 어머니의 삶에 평안이 찾아왔죠.”

하지만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백종서의 양부가 다른 사파 조직인 파이어 헤드와의 전쟁에 사망한 것이었다.

다행히 조직들 간에도 불문율이 있어서 그들이 휘말리지 않았지만 또 다시 가족을 잃은 것은 백종서나 모친에게도 충격이었다.

‘파이어 헤드라....’

천여운이 미묘한 눈빛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그날 이후로 저는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별별 일을 다 하게 되었죠.”

사람은 환경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도망자의 삶을 살다가 사파 조직의 중간 보스의 아들로 살다보니, 그는 자연스럽게 양지의 삶보다는 음지에 가까워졌다.

주로 그의 생계 수단은 도둑질이었다.

“사실 원래는 도둑질을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가 도둑질을 한 계기는 공안국의 간부의 집을 털면서였다.

“어머니께서는 제게 선대 종주인 아버님과 블랙 스카이 컴퍼니에 대한 이야기를 일체 하지 않았죠.”

스무살 때까지는 그것 때문에 모친과 마찰이 심했던 백종서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이 자신을 위해서임을 깨달은 그는 차마 모친에게 더 이상 천마신교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결국 저 스스로 본교의 회사가 어떻게 무너졌는지 알아볼 수밖에 없었죠.”

백종서는 블랙 스카이 컴퍼니가 와해된 계기에 공안도 관련이 되었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공안국의 간부들의 집을 뒤져서 정보를 수집하려 했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양부가 없으니, 생계를 유지하려면 돈이 필요해지더군요.”

백종서는 정보를 캐내려고 했던 공안국 간부의 집을 털었다.

이 시대에는 현금이 없고 전자 화폐로 거래되기 때문에 비싼 물건들을 암시장에 내놓았다.

처음은 어려워도 두 번, 세 번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어느 순간 백종서는 전문 도둑으로 악명을 날리는 지경까지 이르렀고, 그것이 길어지자 결국 덜미가 붙잡히고 말았다.

“......제가 너무 멍청이 같았습니다. 놈들이 저를 잡기 위해서 저희 어머니를 노릴 거라는 것조차 미리 예측하지 못했죠.”

-꽉!

운전대를 잡고 있는 백종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룸미러에 비치는 그의 눈시울이 또 다시 붉어지고 있었다.

‘이런 이유였나.’

이것이 그가 공안국의 간첩이 되어 식스 로드 토이에 잠입하기까지의 사정이었다.

모친이 인질로 붙잡혀 있는 그에게는 어떠한 선택권도 없었다.

‘결국 똑같군.’

천여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시대의 관(官)이라 할 수 있는 공안 역시도 필요에 따라서는 더러운 짓을 서슴지 않았다.

감정을 겨우 수습한 백종서가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

“당대 천마님이시여. 이런 말씀드리면 결례인 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의 저로서는 붙잡혀 있는 어머니를 구출할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이런 신세이지만 어머니께서도 본교의 교인이셨습니다.”

백종서로서는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경이었다.

공안국의 숨겨진 안가(安家)에 인질로 잡혀 있는 어머니를 구해달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부담이 되는 일인지 알지만 천마(天魔)라는 그 호칭에 기대고 싶었다.

'당대 천마라.....'

엄밀히 말하면 2대 천마였다.

물론 백종서로서는 천여운이 시간의 축을 뛰어넘은 존재임을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것을 애써 밝히진 않았다.

아직까지 모든 사실을 밝히기에는 그에 대한 신뢰도 부족했고, 시기상조였다.

“어머니께서는 저보다 더 본교의 사정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부디 천마님께서 도움을 주신다면 저보다 도움이...”

“됐다.”

“네?”

갑자기 말을 끊는 천여운의 태도에 백종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마저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어머니를 구출할 방법이 없다.

그런 그에게 천여운이 말했다.

“놈들과 네가 접선하는 방법이 뭐지?”

“아!”

괜한 기대를 한 것인가 실망하고 있던 백종서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저, 정말 도와주시는 겁니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이렇게 화통할 수가!’

또 다시 감정이 뭉클해졌다.

양부가 죽은 이래로 누군가를 의지하고 신뢰한다는 감정이 생긴다는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런 그에게 천여운이 혀를 차며 말했다.

“계집도 아니고 그만 짜라.”

“네엡!”

-끼이이!

힘차게 답한 백종서가 운전대를 왼쪽으로 꺾어 차를 유턴시켰다.

룸미러로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천여운에게 그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 전에 먼저 들를 곳이 있지 않습니까?”

*  *  *

“흠.”

천여운이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등허리까지 내려오던 트레이드 마크와 같았던 긴 머리카락이 짧아져 있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몸과 머리카락, 피부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

라는 공자의 말이 있다.

천여운이 원래 있던 시대의 중원인들이라면 기겁할 일이었다.

하지만 천여운은 무림인이었고 유교의 교리에 얽매이진 않았다.

‘익숙하지 않군.’

다만 자신의 모습이 어색했다.

이 시대의 지식을 뇌 속으로 전이 받았기 때문에 남성이 너무 긴 머리카락을 하고 다니는 게 타인의 시선을 빼앗는다는 것만 몰랐어도 자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 것만도 아니군.’

천여운은 자신을 쳐다보는 주위 시선이 거슬렸다.

머리카락을 자른 헤어 디자이너라는 여자부터 주위 여인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는 게, 전이 받은 지식이 그리 정확하지 않다고 여겼다.

‘야. 역시 남자는 머리가 생명인 가봐.’

‘완전 멋지지 않아?’

‘무슨 라커인 줄 알았는데, 저러니깐 어디 대기업 본부장님 같지 않아. 아아....저 하얀 피부에 냉소적인 얼굴 좀 봐. 완전 내 스타일이야.’

‘야 이뇬아. 너 남친 있잖아.’

하지만 이내 그들의 시선이 어떤 이유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속삭이듯이 떠들고 있었지만 전부 들렸다.

날카로운 눈매 때문에 다가가기 힘들어 보였지만 천여운은 상당히 훤칠하면서 미남에 속한 얼굴이었다.

“흠.”

마침 기다리고 있던 백종서가 옆으로 다가왔다.

“다 된 모양이군요. 계산은 미리 했습니다.”

그런 그가 의아한 눈빛으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는 천여운을 쳐다보았다.

아까 전만 하더라도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을 여간 탐탁하지 않게 여겼던 그였다.

‘......싫어하시지 않았나?’

그런 것치고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가 있었다.

*  *  *

회색 RV 차량이 시내의 도로를 달리고 있다.

새로운 머리 스타일로 바뀐 천여운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백화점의 양장점에서 맞춘 검은 슈츠에 구두, 그리고 걸치고 있는 긴 롱코트까지 이 시대의 패션으로 완전히 거듭났다.

겉모습이나 풍기는 포스만 본다면 카리스마가 넘치는 젊은 CEO처럼 보였다.

처음이 어려워서 그렇지 막상 완성된 자신의 모습을 보니 그럭저럭 만족한 천여운이다.

‘한동안 익숙해져야 겠군.’

여벌의 정장들도 사놨기 때문에 한동안 의상에는 문제가 없다.

원래 입고 있던 옷은 백화점 브랜드가 적혀 있는 봉투에 고이 모시고 있었다.

다시 원래의 시대로 돌아갈 때 입기 위해서.

-삐리리리! 삐리리리! 뚜!

전화가 연결되지 않습니다.

블루투스 스피커로 들리는 소리에 백종서가 인상을 썼다.

마지막으로 인면 가죽 전문가에게 들리려고 했는데,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일반적인 가게가 아니라 뒷세계의 인물이 영업하는 곳이기 때문에 미리 연락이 닿지 않으면 방문을 할 수가 없었다.

“이상하네. 지금 시간 때에는 연락이 되어야 하는데.”

“문제가 있나?”

“흠....아무래도 지금은 자리를 비운 것 같습니다.”

“그래?”

“아니면 일단 가볼까요?”

백종서의 물음에 천여운이 고개를 저었다.

얼굴을 가릴 수 있는 인피면구가 필요하긴 했지만 당장 급하진 않았다.

그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일도 있었다.

“그보다 운기조식이나 수련을 할 만한 장소가 있나?”

“네? 수련이요?”

“네 녀석도 무인이니 무공을 단련하는 공간 정도는 있었을 텐데.”

“아......”

천여운의 그 말에 백종서가 한 장소를 떠올렸다.

그곳은 바로 자신이 원래 살던 집이었다.

사파인이기는 하나 양부 역시도 무림인이었기 때문에 집에 연공실을 인테리어 했었다.

다만 그곳은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저희 집이 있기는 하지만 그곳에는 공안국에서 설치해놓은 CCTV 카메라와 도청 장치들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모친이 납치당했을 때 공안국에서 감시용으로 설치했을 것이다.

“식스 로드 토이의 비밀 미션 팀원으로 잠입하고 나서는 그들의 아지트에서 숙식을 하고 있어서 한동안 가보지 못했지만 아마도 아직 그대로일 것 같습니다.”

“흠. 그래? 그럼 더 잘됐군.”

“네?”

“네 거처로 가도록 하지.”

“으음....알겠습니다.”

천여운의 지시에 의구심이 생긴 백종서였지만 일단은 경로를 바꿨다.

내심 빨리 공안국과 접선해서 모친을 구할 방도를 모색해주길 바랐지만, 본교의 하늘이라 할 수 있는 당대 천마를 재촉할 수 없기에 입을 다물었다.

한 시간 후,

심양시 남부에 자리 한 백종서의 본가.

겉보기에는 일반 평범한 주택처럼 보였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면 15평이나 되는 연공실이 하나 있었다.

시멘트로 여러 번 발라놓은 바닥은 수련의 흔적들로 가득했다.

그런데 연공실의 한 쪽 편에는 한 가지 특이한 기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원형으로 된 유리통이었는데, 바닥에 방석 같은 것이 깔려 있는 것을 보면 한 사람이 들어가서 가부좌를 틀 수 있는 정도의 공간이었다.

‘이게 뭐지?’

[알 수 없습니다.]

천여운의 질문에 나노도 데이터에 없음을 밝혔다.

의아해하는데 백종서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조금 구형이긴 하지만 그럭저럭 운기조식을 할 때 쓸 만합니다. 양부가 거금을 들여서 구입했거든요.”

“운기조식을 할 때 쓸 만하다고?”

“네. 출력이 예전 모델이라 낮긴 해도 괜찮습니다. 으음......혹시 처음 보셨습니까?”

백종서의 눈에 이채가 띠였다.

당연히 천여운 정도의 실력자라면 이 기계 장치를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정말 모르는 눈치였다.

의아해하던 백종서가 기계로 다가가 원통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우우웅!

원통의 천장에 붙어 있는 LED 불이 켜지면서 기계가 작동했다.

그 순간 천여운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기계가 작동하는 순간 원통의 안으로 주변에 있던 대자연의 기운들이 응집하는 것이 아닌가.

[기계 장치의 내부로 순수한 에너지가 응집되고 있습니다.]

‘그래. 나도 알고 있어.’

기(氣)의 흐름에는 나노보다도 더욱 민감한 천여운이다.

신기해하는 천여운에게 백종서가 말했다.

“그냥 운기조식을 하면 기(氣)를 순환시키는 효과가 약하기 때문에 이 안에서 하면 몇 배의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장치의 용도는 바로 운기조식 보조였다.

그제야 그 동안 궁금했던 부분이 해소가 되었는지 천여운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시대로 오면서 운기를 하기에는 대자연의 기운이 옅어져서 무림인들이 내공을 쌓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그였다.

그런데 이런 장치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노. 네가 모른다는 건 확실히 시간의 축의 차이가 크긴 하구나.’

이 부분은 꽤나 놀라웠다.

나노가 있던 시대는 더욱 미래였다.

그런데 그런 미래에서조차도 이런 운기조식 보조 기기가 없었기에 무인들의 수준이 형편없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군. 이런 식으로 부족한 부분을 메꾸다니.’

어떤 의미로는 이 시대의 후학들의 지혜에 칭찬해주고 싶었다.

“이런 기계는 대부분의 무림인들이 사용하나?”

“으음. 그건 아닙니다. 중고로 나온 이런 구형 모델도 워낙 거금을 주고 구매해야 해서 정확한 통계는 모르겠지만 무림인들의 절반도 없을 겁니다. 이게 아니더라도 저가형으로 나온 보조 약품도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많이 비싸긴 하지만요.”

이 시대의 무림인들은 이런 운기조식 보조 기기들을 구하기 위해 상당한 투자를 해야만 하는 구조였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생계에도 어느 정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백종서가 운기조식 보조 기기를 바라보면서 내심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공안 녀석들이 CCTV 카메라를 설치한 게 딱 하나 도움 됐네.’

워낙 귀한 기기이다 보니, 도둑맞는 경우도 허다했다.

집을 한동안 비워놨는데도 무사한 것은 공안국의 감시 때문일 지도 몰랐다.

그것을 바라보던 백종서가 전음으로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곳에 오시자고....아...]

이곳에 온 영문을 전음으로 물어보려 했던 백종서가 말을 잇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도청 장치 중에서 전음의 주파수를 도청할 수 있는 기기 역시도 설치 되어 있을 지도 몰랐다.

이곳은 지뢰밭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였다.

-파팍!

“억!”

느닷없는 점혈에 백종서가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마혈(痲穴)과 아혈(啞穴)을 동시에 점하는 바람에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대(大)자로 쓰러진 그에게 천여운이 미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어....어째서?’

백종서의 눈빛이 흔들렸다.

*  *  *

인근에 500M 정도 떨어진 주택.

그곳은 다른 주택들과 다를 바 없어보였지만 그 안의 실상은 달랐다.

내부에는 열 명 정도의 공안 기동 타격대의 복장을 입은 자들이 철통처럼 보안을 서고 있었고, 세 명의 평범한 복장을 한 남자들이 모니터링을 하고 있었다.

그때 회색 점퍼를 입은 남자가 팔짱을 끼고서 뒤에 있는 40대 초반에 볼살이 처진 남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팀장님! 거실 쪽 모니터를 보십쇼!”

그 말에 볼살이 처진 팀장이 거실을 찍고 있는 CCTV 화면을 보았다.

그곳에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백종서의 모습이 보였다.

“어떻게 된 거야?”

“방금 저 자가 잠입 요원을 기습적으로 점혈했습니다.”

“그건 나도 알아. 아니. 왜 갑자기 저런 짓을 한 거야? 도청 장치 소리좀 키워봐.”

“알겠습니다.”

-타타탁!

모니터 앞에 있던 남자가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러자 거실 쪽에 있던 도청 장치의 스피커 소리가 커졌다.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원망하지 마라. 공안의 끄나풀.

‘!?’

스피커를 듣고 있던 세 사람의 인상이 굳어졌다.

잠입요원이 정체를 들킨 모양이었다.

제대로 비상 사태였다.

-뭐, 그래도 고맙다. 네놈이 공안의 끄나풀인걸 보고하면 그들도 나를 중히 쓰겠지.

이어지는 말에 팀장의 인상이 묘해졌다.

‘완전히 들킨 게 아니야?’

아무래도 잠입요원의 정체를 알고 있는 자는 저 자뿐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뭔가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때였다.

-팍!

모니터에 비춰지는 천여운이 쓰러져 있는 백종서의 단전 쪽으로 손바닥을 갖다 댔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어차피 죽을 몸이니까. 네 몸에 있는 ‘그것’은 내가 가져가겠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팀장이 발을 동동 굴리며 소리쳤다.

“이런 미친! 저놈 아무래도 흡성대법을 익힌 놈인가 보다. 빨리 대원들 투입시켜서 체포해!”

흡성대법(吸星貸法).

채기법(採氣法)의 일종으로 다른 사람의 기를 강제로 흡수하는 기술이다.

그것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내공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부작용이 크지만, 단기간에 큰 효과를 볼 수 있어서 사파인들 중에 간혹 이것을 익힌 자들이 있다.

하지만 워낙 끝이 좋지 않고 여타의 무림인들에게 반발이 심한 기술인지라 어지간해서는 사파인들조차 사용하지 않는다.

-철컥!

팀장의 명령에 기동 타격 대원들이 기관총을 들고, 주택 앞에 세워져 있던 검은 벤에 탑승했다. 팀장까지 태운 벤이 빠르게 출발했다.

“제기랄. 어떻게 심은 놈인데.”

서두르지 않으면 잠입 요원을 잃는다는 생각에 팀장은 초조해졌다.

정체를 식스 로드 토이에 들켰다면 죽어도 별 상관이 없었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당장 구출해야 했다.

-끼이익!

백종서의 자택 앞으로 도착한 벤에서 기동 타격대원들이 신속하게 나왔다.

-쾅!

자택의 현관을 부순 그들이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기동 타격 대원들 중의 네 사람이 허리춤에 있던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산공 마취 가스탄이었다.

“투척!”

-쨍그랑!

창문들을 깨고서 산공 마취 가스탄이 들어갔다.

-푸슈!

곧바로 방사되도록 장치가 되어 있어서 집안 전체가 순식간에 짙은 연기로 가득 찼다.

헬멧을 쓰고 있는 기동 타격 대원들과 한 명의 팀원이 서둘러 안으로 잠입했다.

-탁!

은색 케이스 가방에서 방독면을 꺼낸 팀장이 얼굴에 착용했다.

그리고 권총을 꺼내들고 뒤따라 안으로 잠입하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컥!

-끄악!

-억!

귀에 착용하고 있는 무선 이어폰에서 순차적으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팀장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방금 전에 던진 것은 산공 마취 가스탄이었다.

그것을 마시게 되면 아무리 수준 높은 무림인이더라도 무력화될 수밖에 없었다.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끄헉!

-컥!

이어지는 비명 소리에 팀장은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여졌다.

당장 들어가서 상황을 파악해야 하는데, 만약 자신마저 당한다면이라는 전제가 머릿속을 휘감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제, 젠장! 일단은 후퇴해야겠다. 산영! 빨리 벤에 시동...”

“팀장님!”

팀원인 산영이 놀라서 다급히 외쳤다.

-탁!

고개를 돌리고 있던 팀장의 두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로 슬며시 손을 얹고 있었는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팀장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 이런.....’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는 것은 바로 천여운이었다.

하얗게 질려서 아무 말을 못하고 있는 팀장에게 천여운이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월척이군.”

'뭣!?'

팀장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자신들이 제대로 낚였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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