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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44)화 (144/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외전 5화

카를은 멍청한 표정으로 굳어버렸다.

“……뭐?”

되묻는 말에 아우라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임신했다고. 왜? 당황스러워?”

“……어?”

카를은 여전히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아우라가 대뜸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퍽 쳤다.

“그래. 당황스럽겠지! 네 머릿속엔 새 여자들이랑 하하 호호 즐길 생각밖에 없을 테니까. 나쁜 자식. 그래도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우리가,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아우라는 계속 카를을 퍽퍽 쳤다. 카를은 그 주먹질이 느껴지지도 않는 듯 석상처럼 서 있기만 했다.

“변명도 안 해? 미안하지도 않아?! 그래. 넌 그런 놈이니까 밤마다 여자들을 불러들였겠지! 나도 너 같은 거 더는 필요 없어. 잘 들어. 아이는 내가 키울 거야. 하지만 황궁은 절대 안 나가! 내 아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때까지 황후 자리에 있을 거야. 후궁을 백 명 천 명 맞이하건 말건 상관 안 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넌 이제 내 남편도 아니야. 대신 내 아이에겐 제대로 아버지 노릇을 하도록 해. 그것마저 똑바로 안 하면 평생 널 원망할 거야!”

속사포처럼 원망을 뱉어 내던 아우라가 또 주먹을 치켜들었다. 카를이 아우라의 양 손목을 확 잡았다. 그리고 바보 같은 얼굴로 또 물었다.

“……정말이야?”

“그래! 너무 낭패라서 귀까지 멀었니? 네 애라고! 네 애! 네 자식이 생겼다고! 네가 여자들이랑 좋은 시간 보내는 동안 내 배 속에서 네 자식이 자라고 있었다고! 이거 놔!”

아우라가 카를의 손을 뿌리치려 몸부림쳤다. 그러나 그게 가능할 리가 없었고, 허우적거리던 아우라의 몸이 신전 문에 부딪쳤다.

쿵.

그 바람에 신전 문이 활짝 열렸다. 그대로 쓰러지려는 아우라를 카를이 얼른 붙잡아 안았다.

“이거, 놔……!”

그때였다.

펑! ……펑! 펑!

신전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아우라가 고개를 돌렸다.

“……어?”

신전 안에서는 화려한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반짝이는 빛의 잔상을 남기는 그 폭죽은 분명 마법의 힘이었다.

그 환한 빛 속에 깔린 붉은 융단, 커다랗고 섬세한 석고상들, 황금색 커튼은 분명…… 어린 날 아우라가 보았던 부모님의 결혼식 그림 풍경과 똑같았다.

문이 열리자 저 멀리서 악단이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분명 결혼식 음악이었다.

신전 한구석에 모여 있는 부인들과 기사들이 보였다. 그들은 기대감과 설렘에 가득 찬 눈으로 어서 두 사람이 신전에 들어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눈물이 쏙 들어간 아우라가 멍하니 말했다.

“카를, 이게 대체…….”

그러나 카를은 여전히 놀란 듯 아우라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아우라는 한 박자 늦게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

“카, 카를. 너 혹시…….”

그동안 결혼식 준비를 한 거야?

라고, 물으려 했다. 그러나 그럴 틈도 없이 카를이 아우라를 안아 들었다.

“카를?!”

카를은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우라는 어리둥절한 채로 멀어지는 신전을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휘황찬란한 신전 위로 폭죽이 펑펑 터지고 있었다. 밤하늘이 폭죽의 불빛에 예쁘게 물들었다.

그 예쁜 곳을 뒤로하고 카를은 본궁으로 달려 들어갔다. 계단을 서너 개씩 성큼성큼 건너뛰며 도착한 곳은 예전 아우라의 방이었다.

“!”

아우라는 한 번 더 놀랐다. 여기저기 은은하게 불을 밝힌 촛불 하며 와인과 침대의 꽃잎들 하며. 이건 누가 봐도 첫날밤 부부를 위한 것이었다.

카를이 아우라를 침대에 급히 앉혔다. 그리고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맞췄다. 그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 정말.”

카를의 입술이 다급하게 아우라의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번에는 아우라가 멍청한 얼굴이 되어 카를을 보고만 있었다.

카를이 물었다.

“정말 임신했어?”

“……어, 어. 카를, 그게…… 아까 한 말은.”

큰일 났다 싶은 아우라였다. 카를이 이런 걸 준비한 줄도 모르고 엄청난 말을 퍼부었던 것 같은데.

그러나 카를은 아무것도 귀에 안 들리는 듯했다. 그는 아우라의 뺨을 감싸더니 또 입을 맞추었다. 아우라는 눈만 깜빡였다. 이거, 정말 괜찮은 걸까.

카를이 아우라를 와락 안았다. 쿵쿵쿵쿵.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듣자 아우라는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아까는 카를…… 기분 상했다면 미안해.”

“뭐가?”

카를이 아우라를 살짝 놓았다.

“아니, 내가 너무 심한 말을…….”

“아, 미안해.”

“어? 네가 왜……?”

“임신했다는 말 이후로는 하나도 못 들었어.”

“……뭐?”

아우라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그래서 그렇게 멍청한 얼굴로 서 있기만 했던 건가. 너무 놀라고, 너무 기뻐서.

“뭐야, 카를. 너 바보 같아.”

“나야 뭐 항상 그렇지. 너한테는.”

카를이 아우라를 훌쩍 들어 침대에 눕혔다. 목덜미를 파고드는 숨결에 아우라가 간지러워 또 웃었다. 아우라는 긴 팔로 카를의 목을 껴안았다. 그러자 카를이 다시 그녀의 입안을 파고들었다.

부드럽게 얽히는 혀가 두 사람을 모두 녹이는 듯했다. 아우라는 카를의 온기를 다시 찾은 듯해서 그를 더 꽉 끌어안았다.

자연스럽게 아우라의 드레스 단추를 풀던 손길이 순간 멈칫하더니 카를이 뒤로 슬쩍 물러났다.

“잠깐. 이래도 괜찮은 걸까?”

“뭐가?”

“네 몸…… 조심해야 하지 않아?”

“아.”

아우라가 키득 웃었다. 그녀는 카를의 얼굴을 확 감싸 안고 그의 귀에 속삭였다.

“황궁의가 괜찮대.”

“……!”

“내가 이미 물어봤어, 바보야.” 

그렇게 말하는 아우라의 얼굴이 발그레했다. 그래, 이렇게까지 했기에 그간 자신을 멀리한 카를이 참 원망스러웠다. 물론 지금 이 순간 원망 따윈 이미 사라지고 없지만.

한편, 아우라의 말에 카를의 눈에 불이 켜진 듯했다. 그녀 역시 지금껏 카를을 원했다는 말처럼 들려서. 요즘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던 걱정이 싹 달아난 것이다.

그의 손이 그녀의 드레스 단추를 빠르게 풀어 내렸다. 아우라는 순간 웃음이 나왔다.

‘예전에는 이걸 못 풀어서 단추를 다 뜯어 버렸었는데.’

그 시간은 다 어디로 갔을까. 서로를 증오하면서도 사랑했던, 두 번은 절대 못 할 짓이지만 그래도 결국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버린 시간.

아우라의 등을 감싸는 손길이 따뜻했다. 드레스가 스르르 몸을 떠나도 춥지 않을 정도로.

흥분에 찬 눈으로 제 셔츠의 단추를 풀던 카를이 멈칫했다. 그는 대뜸 몸을 숙여 아우라의 납작한 배에 입을 맞췄다.

“뭐 해?”

“인사. 남은 인생 동안 끼고 살 녀석인데 잘 보여야지.”

쪽, 쪽. 카를은 아우라의 배에 계속 입을 맞추었다. 아무리 인사해도 부족하지 않다는 듯이.

“여자애면? 시집보내야 할 텐데?”

“절대 못 보내. 데려가려는 놈이 나타나면 죽일 거야.”

카를은 진지했다. 아우라는 그 모습이 우스워서 키득거렸다.

요즘 일을 생각하면 아무리 봐도 둘 다 성숙한 부모는 못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이런 바보 같은 부모라도.

그의 표정을 더 자세히 보고 싶어서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카를이 재빨리 그녀를 툭 밀어 눕혔다.

팔에 그녀를 가둔 채 카를이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잘할게, 아우라. 정말로 최선을 다할 거야.”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어.”

아우라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췄다.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온기와 설렘이 두 사람의 몸에 번졌다.

***

새벽녘, 카를과 아우라는 침대에서 그간의 이야기를 나눴다. 아우라는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너무 막돼먹게 행동한 죄책감 때문에 날 찾지도 않으셨다?”

“……그런 셈이지.”

카를은 민망한 듯 와인을 벌컥 들이켰다.

참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강력한 황권을 쥔 군주였다. 아쉬운 소리를 할 일도, 그럴 이유도 없는. 그런데 왜 이렇게 제 앞에서만 꼴이 우스워지는 걸까.

“그럼 그걸 나한테 먼저 물었어야지 애먼 부인들한테 대체 왜…….”

“아니, 너는.”

“나는?”

“……너무 착해서 다 괜찮았다고 할 것 같아서.”

카를은 빈 잔에 와인을 또 채웠다. 이러라고 준비한 와인이 아닌데. 어째 타는 속만 적시고 있었다.

아우라는 피식 웃었다. 카를 못지않게 아우라도 보통이 아닌 황후로 정평이 나 있었다. 현명하다거나 멋지다는 말은 들어도 착하다는 말은 들어 본 적 없었다. 그런데 왜 카를은 자신을 그렇게 보는 걸까.

아우라가 무릎을 껴안고는 머리를 툭 기댔다. 그리고 카를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쓱쓱 다듬어 주었다.

“결혼식은 왜 갑자기 준비한 건데?”

“네가 아쉬워할 것 같아서. 그러니까…… 엘리제의 결혼식을 보고 그럴 수도 있다는…….”

카를이 말을 하다가 멈칫했다. 그는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니다. 사실은 나야.”

“뭐가?”

“내가 아쉬웠다고. 너와의 시작을 그렇게 한 게…… 두고두고 생각이 났어.”

“…….”

“부인들이 등 떠밀어서 준비한 척했지만 사실 핑계야. 내가 너무 그렇게 해 주고 싶었어.”

아우라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냥 미소만 지으며 그의 얼굴만 쓰다듬었다.

카를이 뭔가가 떠오른 듯 와인 잔을 협탁에 내려놓았다.

“결혼식엔 예물이 빠질 수 없지.”

그는 벗어 던진 재킷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열어 아우라에게 내밀었다.

“신전에서 줄 생각이었지만 말이야.”

상자에는 작은 다이아몬드가 빙 둘러쌓인 푸른 토파즈 반지가 있었다. 아우라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이건…….”

“네가 예전에 못 받겠다고 한 토파즈 목걸이로 만들었어. 다이아몬드는 네 부모님을 대신해서 새로 박아 넣었고.”

부활이라는 의미가 마음을 할퀴는 것 같아 거절한 목걸이였다. 카를을 용서할 수 없는 만큼 절대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거절하고 싶으면 그래도 돼. 나는 그냥…… 네가 예전 일을 잊고 행복했으면 해서. 바라는 건 그것뿐이야.”

아우라는 싱긋 웃었다. 가늘게 고인 눈물에 눈동자가 맑게 빛났다.

아우라가 말없이 왼손을 내밀었다. 카를은 그 의미를 한 박자 늦게 이해하고는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우라. 나는 정말.”

카를이 상자에서 반지를 꺼내 아우라의 약지에 끼워 주었다. 반지는 딱 맞았다.

카를은 그녀의 손을 양손으로 감싸듯 잡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정말로 너를 사랑해. 정말이야.”

몇 번을 강조해도 과하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말은.

아우라는 그런 카를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녀는 오래도록 이 순간을 떠올리고 미소를 짓게 될 것 같았다.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나이를 더 먹는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 나눈 마음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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