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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42)화 (142/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외전 3화

한 달 전.

카를의 집무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업무로 정신이 없었다.

테오는 황실로 올라온 전국 곳곳의 공문을 빠르게 훑었다. 그러다가 뭔가를 발견한 듯 멈칫했다.

“호오.”

“왜 그래?”

카를이 서류에 눈을 고정한 채 물었다.

“특이한 공문이 올라와서요. 재미있네요, 이거.”

“뭔데.”

“서부 힌타이타 지역에서 전에 없는 공판이 열린 듯합니다. 미혼 귀족 남자가 역시 미혼 귀족 여자에게 억지로 입을 맞췄답니다. 부인도 애인도 아닌 관계에서 말이죠.”

“그래서?”

“여자가 이로 남자의 혀끝을 깨물어 잘랐다고 합니다.”

“뭐?”

카를이 놀라 테오를 보았다. 테오는 여전히 재미있다는 듯 공문을 읽었다.

“문제는 여자 쪽에서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는 겁니다. 남자는 본인이 한 짓에 비해 너무 많은 피해를 보았으니 여자의 유죄를 주장하고요. 그쪽 자치구에서는 판결을 내리기 어려워 이렇게 공문을 올려 도움을 청한다고 하네요.”

“무죄. 애인도 부인도 아닌데 입 맞춘 놈이 잘못이지.”

“맞습니다. 그리고 애인이고 부인이어도 억지로 그러면 안 되죠.”

테오가 무심히 말했다. 다시 서류를 보려던 카를이 멈칫했다. 그의 머릿속에 수많은 장면이 지나갔다.

아우라에게 억지로 입을 맞춘 일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아서 홧김에, 때로는 그냥 그러고 싶어서. 아닌 상황을 뽑아 보는 게 더 빠를 지경이었다.

게다가 입맞춤뿐이랴. 더한 짓도 해 온 카를이었다.

“……그런가? 너는 그런 적 없고?”

테오가 공문에 황가 인장을 꾹 찍으며 대답했다.

“제가 쓰레기는 아니잖습니까. 맹세컨대 제 부인에게도, 이전 애인들에게도 그런 적 없습니다.”

“……조쉬도?”

“하하, 그 녀석은 손도 허락받고 잡을 놈인걸요.”

테오가 공문을 서류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제 주군의 표정은 살피지 못한 채 계속 말을 이었다.

“하여간 그런 놈들은 혀를 다 잘라 버려야 해요. 여자 쪽에서 뺨 한 대 치는 걸로 끝나면 다행인 줄 알아야 하고요.”

카를은 또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 수많은 짓을 해 놓고도 뺨 한 대 맞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여자 쪽에서 그냥 넘어간다면?”

“넘어가는 게 아니라 넘어가 주는 겁니다. 여자가 착한 경우죠. 하지만 여자들의 기억력은 언제나 남자들보다 뛰어납니다. 그런 게 다 켜켜이 쌓여서 나중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걸 여러 번 봤습니다.”

큰 충격을 받은 카를은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상이 없는 줄 알았던 아우라와 자신의 관계가 순간 불안하게 느껴졌다.

‘아니야. 테오 저놈의 말에 휘둘릴 수야.’

카를은 벌떡 일어나 샛문을 열고 개인 서재로 들어갔다.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법원 판례의 수기 복사본을 보관한 책장 앞이었다.

귀족간의 성 문제를 다룬 판례는 따로 모여 있었다. 평소엔 쳐다도 안 보던 그 판례들을 카를은 떨리는 마음으로 살펴보았다.

자료를 하나씩 들춰 볼수록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말도 안 돼…….”

카를이 마지막 서류를 탁 닫곤 잠시 망연히 서 있었다.

‘내가 한 짓들이 아슬아슬하게 범죄가 아니었다니.’

대체 아우라는 얼마나 착한 여자인가. 또 자신은 얼마나 막돼먹은 놈인가.

테오의 말이 맞다면 아우라는 그 일들을 다 참아 왔을 것이다. 언제든 그 불만은 터질 수 있었고.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이제야 겨우 평화를 되찾았는데. 그녀의 마음을 떠나게 할 순 없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해 볼까.’

카를이 침통한 마음으로 개인 서재에서 나왔다.

“쓰레기네.”

“그렇지? 쓰레기라니까.”

언제 왔는지 조쉬가 테오와 아까 그 공문을 보고 떠들고 있었다. 공문을 보는 조쉬의 눈에도 경멸이 가득했다.

카를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생각했다.

저놈들에게는 절대 상담이건 도움이건 요청해서는 안 되겠다고.

***

며칠 후, 카를은 은밀하게 몇몇 부인을 개인 응접실로 초대했다.

개인 응접실. 그곳은 황제의 사적인 공간 중 하나였다.

영문 모르고 불려 온 부인들에게 카를은 차를 권했다.

황제와 귀족 부인들 그리고 개인 응접실이라니. 이 오묘한 조합에 부인들의 얼굴엔 궁금증이 가득했다.

“내가 부인들을 부른 것은…….”

카를이 입을 뗐다. 부인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하나같이 화려한 드레스와 주렁주렁 매달린 무거운 장신구를 달고 있는 이 무리 속에 앉아 있노라니 카를은 이 모든 걸 딱 그만두고 싶었다.

그는 이런 여자들에게 영 면역이 없었다. 아우라만 해도 치장에 힘을 주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아우라를 위해 해야 했다. 평생 함께할 부부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그래서 남편과 사이좋기로 유명한 부인들만 골라 불러들인 게 아닌가.

카를은 좀처럼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황후에 대해서…… 도움을 좀 요청하고 싶은데.”

부인들의 얼굴이 활짝 폈다. 황제 부부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니. 이보다 더 큰 재미가 있을 리가.

“무엇이든 말씀해 보세요, 폐하.”

한 부인이 말했다. 무엇이든 들어야겠다는 얼굴로.

그래도 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놓을 순 없는 일이었다.

“내가 예전에 황후가 서운해할 만한 짓을 좀 했는데, 그걸 만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아하.”

“그렇군요.”

그들이 무릎을 탁 쳤다.

“훌륭하십니다. 예전 일을 돌이켜 잘못을 인정하시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부인들이 기특하다는 듯 카를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들을 보고 있노라니 카를은 미쳐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 해야 했다. 바보 같은 남자 놈들보다는 이편이 더 든든하리라. 분명히.

“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황후가 서운한 일들을 잊을 수 있는지 그걸 묻고 싶었소.”

“잘하셨습니다. 고귀한 신분의 여자들은 거절이나 거부의 의사를 간접적으로 표현하곤 하죠. 하지만 남자들은 대부분 알아듣지 못하고요. 이러한 소통의 문제로 서운함이 쌓입니다. 그리고 그 서운함은 쌓이고 쌓여 언젠간 터지기 마련이고요.”

한 부인의 말에 다른 부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알고 있소. 그래서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그 이야기를 듣고 싶소.”

“흠…… 하지만 그건 상황에 따라 달라서요. 혹시 같은 실수를 여러 번 반복하신 겁니까?”

참으로 날카로운 물음이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럼 일단 확실한 건.”

그녀가 힘주어 말했다. 카를이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마음이 풀릴 때까지 그런 상황을 최대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괜히 어설프게 달라진 모습을 과시하려다가 일을 더 그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 방법뿐인가?”

카를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부인이 딱 잘라 말했다.

“네. 이게 최선입니다.”

“……그렇군.”

“외람되지만 혹시 무엇을 서운하게 하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절대 말해 줄 수 없었다. 카를이 대답하지 않자 다른 부인이 끼어들었다.

“아니면 최초로 황후 폐하를 서운하게 만드셨던 경험을 말씀해 주셔도 좋습니다. 최초의 기억은 잊히지 않으니까요.”

“최초라면…… 결혼식이겠지.”

분위기가 싸해졌다.

결혼식부터 부인을 서운하게 하는 남편이라니. 정말 최악이었다. 카를이 황제가 아니었다면 모두 한마디씩 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카를이 변명하듯 덧붙였다.

“열일곱 살이었으니까. 어렸고, 아무것도 몰랐소.”

“아…… 맞습니다. 열일곱 살이면 그럴 수도 있죠.”

“열일곱 살이라면 뭐…… 황후 폐하께서도 어리셨으니 더 속이 상하셨겠지만요. 그래도 뭐…… 그럴 수도 있죠.”

떨떠름한 반응이었지만, 어쨌건 정상 참작은 된 듯했다.

“그래도 두 분 사이가 지금은 무척 좋으시니 다행이지요. 결혼식을 만회해야 한다면…… 황후 폐하께서 평소에 꿈꾸셨던 결혼식이라던가, 그런 말씀은 못 들어 보셨나요?”

“들었소. 들었지.”

카를은 1년 전 함께 제니아에 갔던 일을 기억해 냈다. 그때 아우라는 제니아의 신전에서 결혼식을 하는 게 오랜 꿈이었다고 했다.

“그래서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부인들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아무것도.”

다시금 분위기가 싸해졌다. 눈빛들을 보아하니 이번에는 참작의 여지 따윈 없는 듯했다. 카를은 반쯤 체념하듯 소파의 팔걸이를 툭 내려쳤다.

“그래서 내가 부인들을 부른 게 아니겠소.”

부인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녀들이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들이란 저렇게 눈빛만으로도 집단의 목표를 끌어낼 수 있는 걸까. 카를은 그저 신기했다.

“저희가 뭘 해야 할지 알겠습니다.”

“맞습니다. 폐하를 돕겠습니다. 아니, 꼭 도와야 하는 상황이군요.”

요란하기 짝이 없는 부인들이지만 도와준다고 하니 마음이 놓였다. 이런 걸로 마음이 놓이는 자신의 처지가 조금은 웃기기도 하고.

“그래, 날 어떻게 도울 작정이오?”

“음…… 작은 이벤트를 준비해야겠습니다.”

한 부인이 싱긋 웃었다. 그리고 카를에게 뭔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

부인들과의 밀회 이후, 거의 한 달이 지났다.

카를은 되도록 아우라와의 잠자리를 피했다. 당연히 입을 맞춰야 하는 분위기나 당연히 그를 끌어당기는 아우라의 체취와 온기 같은 걸 아무렇지 않은 척 외면하느라 카를은 죽을 지경이었다.

달칵.

오늘도 카를은 얌전히 아우라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나오는 참이었다.

“……하아.”

못 할 짓이었다. 데블라에서 살생을 한 벌을 이렇게 받나 싶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참아야 했다. 아우라의 마음속 서운함을 풀어 주는 게 최우선이었다. 아우라도 내심 카를을 짐승 같은 놈으로 보고 있을 테니 그 생각을 고쳐 줄 필요도 있었고.

문제는 다짐과 달리 자꾸만 아우라에게 달려들려 하는 몸이었다.

오늘도 그랬다. 입을 맞추는 건 그렇다 치자. 그런데 목덜미에 왜 또 입을 맞췄단 말인가. 뭘 더 어쩌려고.

책을 읽어 주러 들어갔으면 책이나 읽고 나올 것이지. 안 될 일이었다.

‘그래. 당분간 밤에 아우라를 보는 건 위험해. ‘그 날’까지만 거리를 지키자.’

카를은 다짐하며 복도를 저벅저벅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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