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38화
다음 날, 아우라는 카를의 침실로 갔다. 슬며시 문을 열고 들어가자 황궁의가 카를을 치료하고 있었다.
카를은 상체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따로 셔츠를 입을 필요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우라는 그의 모습에 경악했다.
“카를!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괜찮아 보였다. 황궁 재정비를 하겠다며 멀쩡하게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이런 중환자가 되다니.
아우라가 오자 카를은 제 이마를 짚었다. 그녀가 이 모습을 보는 건 그의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그는 제 참모들에게 물었다.
“누가 일렀어?”
“…….”
“누가 일렀냐고.”
“……큼, 제가요.”
조쉬가 손을 쏙 들었다. 카를이 그를 탓했다.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하지만 그 몸으로 바로 국정을 본다고 하시니…….”
“바로 국정을 본다고?”
아우라가 기가 막힌다는 듯 되물었다. 그 기세에 힘을 받은 조쉬가 딱 잘라 말했다.
“누군가는 말려야 할 것 같아서요.”
테오가 잘했다는 듯 조쉬의 어깨를 툭툭 쳤다. 카를은 두고 보자는 듯 조쉬를 바라봤다. 조쉬가 크흠, 헛기침을 하며 카를의 시선을 피했다.
아우라가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섰다.
“조쉬는 잘못한 거 없어. 네가 무리하고 있잖아.”
“무리라니. 이 정도는 그냥 많이 안 움직이면-”
“황궁의.”
아우라가 황궁의를 불렀다.
“폐하의 몸 상태는 어떻지?”
“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셨을 때 갈비뼈 세 대가 나가셨고, 팔에는 금이 가셨습니다. 어깨의 인대도 크게 상하셨고요. 양쪽 발목에도 다 실금이 가셨는데…… 대체 저 몸으로 어떻게 싸우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수트라에서 황궁으로 올 수조차 없는 몸 상태였다. 아우라는 한숨을 푹 쉬었다.
“황궁의. 폐하의 몸이 다 나으려면 얼마나 걸리지?”
“못해도 한 달은-”
“한 달은 말도 안 되지.”
카를이 말했다.
“폐하는 조용히 하십시오.”
아우라가 무서운 기세로 그 말을 막았다.
“앞으로 한 달간 국정이고 뭐고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 이 방에서 숨만 쉬고 계세요.”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황후. 그러면 일은 누가 일을 하겠소?”
“저와 테오가 합니다. 그렇죠, 테오?”
“물론입니다. 폐하께서 출정 가셨을 때도 그렇게 했으니까요.”
테오가 얼른 대답했다. 그러자 카를이 눈을 부릅뜨고 테오를 보았다. 테오 역시 시선을 쓱 피했다. 카를이 어이가 없다는 듯 빈정거렸다.
“다 같이 아주 작당을 했군.”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이제 폐하께서 쉬실 수 있게 다들 나가죠.”
아우라가 참모들과 황궁의를 데리고 나가려 했다. 모두가 나가고 아우라가 문을 닫으려던 때였다.
“아우라.”
카를이 그녀를 불렀다.
“이야기 좀 해.”
아우라는 썩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돌아왔다.
“왜? 쉬기 싫다고 하려고?”
“나 정말 한 달이나 그렇게 시체처럼은 못 있어. 답답해서 죽을 거야.”
그는 아우라의 손을 가져다 잡았다. 손등까지 칭칭 감긴 붕대를 보고 있노라니 아우라는 속이 상했다.
“좀 봐줘.”
카를은 빙긋 웃으며 손깍지를 꼈다. 순간 아우라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이 상황이 그저 황당했다. 카를과 자신이 어떤 짓까지 했는데. 지금 손깍지를 꼈다고 얼굴에 열이 오른다고?
아우라가 황급히 손을 뺐다. 그리고 엄격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안 돼. 그러다 후유증이라도 남으면 어쩌려고.”
“그런 거 남았을 몸이면 지금 살아 있지도 못했어.”
“아무튼 안 돼. 이 방에 있거나, 하루에 한 번 산책하거나. 한 달은 그렇게만 지내. 알았지?”
지시적인 그녀의 말투에 카를이 울컥했다. 아우라가 뒤돌아 가려던 때였다. 카를이 아픈 팔로 그녀의 허리를 용케 감아 끌어당겼다.
“뭐, 뭐야!”
카를이 아우라를 그대로 껴안아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그대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 체취가 그리웠다는 듯이.
“그럼 너는?”
“……어?”
“이 방에 틀어박혀 있으면, 넌 언제 볼 수 있는 건데?”
목덜미를 통해 그의 낮은 목소리가 전신에 퍼지는 듯했다. 심장이 쿵쿵대며 뛰고 입안이 말랐다. 아우라도 자신이 대체 왜 갑자기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우라는 애써 침착했다. 아니, 침착하려 노력했다. 카를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응? 언제 와 줄 거냐고 물었잖아. 매일 와 줄 거야?”
장난기 어린 시선이 그녀의 붉어진 얼굴과 목덜미를 훑었다. 그리고 입이라도 맞추려는 듯 그대로 다가왔다.
“잠깐……!”
아우라가 엉겁결에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당황한 그는 눈만 끔뻑거렸다.
“이, 이러면 안 올 거야. 아니, 한 달 동안 절대 안 올 거야.”
“……뭐?”
“나 보면 너 가만히 못 있잖아. 그러니까 너 다 나을 때까지 나 보는 거 금지야.”
“그런 게 어디 있-”
“다 낫기 전에 내 눈앞에 나타나기만 해 봐.”
“아우라.”
아우라가 벌떡 일어났다. 카를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황당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척척 문을 향해 가던 아우라가 휙 돌아섰다.
“나 장난치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책임지고 나아.”
그녀는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하.”
카를이 헛웃음을 지었다.
***
한 달이 지났다. 카를은 정말로 침실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의 느낌으론 몸은 예전에 다 나았다. 그러나 황궁의는 붕대를 풀어 주지 않았다. 약간의 협박과 회유를 해도 완전히 다 낫기 전엔 절대 안 된다나.
카를은 창가에 서서 생각했다.
‘아우라가 분명 황궁의를 압박했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아우라에게 불만인 건 또 있었다.
그녀는 그간 정말로 한 번도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몇 번 와 달라고 요청을 했음에도 그랬다. 국무 때문에 바쁘다, 리엘 때문에 바쁘다, 귀족을 상대하느라 바쁘다……. 참 바쁜 것도 많았다. 예전에는 뭐가 마음에 안 들 때마다 불쑥불쑥 들이닥치더니. 바쁜 건 참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점이 카를이 딱 이 시간에 창에 붙어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온다.’
테오와 아우라가 정원을 가로지르며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은 국무 회의가 끝나면 꼭 이 시간에 저 길을 통해 본궁으로 돌아왔다. 회의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리고 꼭 한 번은 테오가 헛소리를 하는 듯했다. 지금도 그랬다. 아우라가 저 아래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카를은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왜 웃어? 나도 알려 줘. 테오 헛소리에 웃는 걸 보니 웃음도 많이 는 것 같은데. 웬만하면 여기 와서도 좀 웃어 줘. 아니면 얼굴이라도 제대로 보여 주던가. 매일 여기서 쳐다보고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앞만 볼 수 있어?
그녀가 본궁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오늘도 한 번을 안 올려다보는군.’
카를이 창을 가볍게 퉁 치고 물러났다. 창밖 풍경조차 꼴 보기 싫다는 듯 커튼을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조쉬는 그런 제 주군이 내심 불쌍했다. 하지만 저 사이에 끼어들고 싶진 않았다. 요즘 그는 공작저를 드나드느라 바빴다. 엘리제에게 쓸 에너지를, 참으로 죄송한 일이지만 카를에게 쓸 순 없었다.
카를이 슬리퍼를 툭툭 끌며 침실을 걸어 다녔다.
“아, 진짜.”
카를이 짜증스레 한마디 뱉었다.
“조쉬.”
“넵.”
“당장 황궁의를 데려와.”
“폐하, 진료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당장.”
“……예.”
조쉬는 군말하지 않고 침실을 나섰다. 잠시 후 황궁의가 헐레벌떡 방으로 들어왔다. 카를은 그를 보자마자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부터 풀었다.
“폐, 폐하?”
“진료해. 할 수 있는 검사 다 해. 내가 움직이는 데에 무리가 있는지 없는지 나랑 같이 확인해.”
카를의 기세에 황궁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완벽하게 낫기 전까진 무슨 일이 있어도 붕대를 풀어 주지 말라는 황후의 명령이 있었다. 그 명령이 하도 지엄해서 지금까지 황제의 붕대를 풀어 주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의 황제는 황후 못지않게 살벌했다.
황궁의는 카를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회복력이 워낙에 뛰어난 몸이었다. 뼈가 부러지고 금이 간 부분은 일찍이 나았다. 문제는 어깨의 인대였다. 인대는 완벽하게 회복하려면 몇 년이 걸릴지 몰랐다.
“그…… 어깨 인대 말고는 다 나으셨습니다.”
“그럼 난 앞으로 몇 년이나 이 방에 틀어박혀 있어야 하나?”
“아, 아뇨. 그러실 수야…….”
“인대는 시간이 답이지. 딱히 약은 없고. 살다 보면 알아서 붙어. 그렇지?”
“예. 그렇긴…… 합니다만…….”
“어서 풀어.”
“예?”
“붕대. 이제 필요 없으니 당장 풀어.”
카를이 눈을 부릅떴다. 더는 이 지지부진한 치료를 봐줄 수 없다는 듯이.
황궁의는 결국 그의 붕대를 풀어 주기 시작했다.
***
아우라는 제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따뜻한 차를 마시니 몸에 온기가 돌았다. 한겨울인지라 날씨가 무척 추웠다.
테오가 제가 살핀 서류를 가져왔다. 아우라가 제목을 슬쩍 보고는 서류를 받았다.
“고마워요, 테오.”
“네. 그런데 폐하, 요즘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닐까요? 아무리 그래도 한 달을 혼자 업무를 보셨으니…….”
“괜찮아요.”
아우라가 싱긋 웃어 보였다.
“조쉬가 말하길 황제 폐하의 몸이 많이 괜찮아지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 같이 업무를 보시는 게…….”
“아직 한 달이 안 되지 않았습니까.”
“오늘이 딱 한 달째 되는 날인데요.”
“……그……렇게 됐나요?”
테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우라는 큼, 헛기침하곤 업무에 집중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단 말이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늘 특히 더 날 노려보고 있었나?’
매일같이 국무 회의에 다녀올 때마다 아우라는 난감했다. 카를이 창에 딱 붙어서 어찌나 쳐다보고 있던지. 모른 척 괜히 더 웃고는 있지만 가시밭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폐하.”
“네, 테오.”
“혹시 황제 폐하가 불편하십니까?”
아우라의 깃펜에서 잉크가 뚝 떨어졌다.
“아…… 사실은 그게-”
그녀가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집무실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