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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36)화 (136/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36화

라이언의 손이 아우라의 팔을 타고 점점 올라왔다. 어깨를 지나 쇄골에 이르기까지.

툭, 툭. 쇄골을 두드리는 그 손끝의 움직임이 신경질적이었다.

“뭘…… 하시는 건가요?”

“순진한 척하지 마. 웃기지도 않으니까.”

“…….”

“지금까지 같잖은 유혹이나 하며 시간을 질질 끌었잖아.”

아우라가 희미하게 웃었다.

“같잖았나요?”

“……처음에는.”

“나중에는?”

“그 대가를 치르게 해 주고 싶어졌어.”

대가. 그 말에 아우라가 천천히 침을 삼켰다. 

“말로야 납작 엎드리기 쉽지. 하지만 네가 정말 그럴 수 있을까?”

“…….”

“내 밑에서 우는 꼴을 보기 전까진 못 믿겠어.”

저급한 말들을 툭툭 던지며 그는 드레스 목깃 안으로 손을 넣었다. 아우라가 그 손을 잡았다.

“황좌를 앞두고 여자 생각이 나신다니. 여러 의미로 대단하시군요.”

“여유가 좀 있거든.”

그가 아우라의 귓불을 장난스레 건드렸다. 그리고 그녀의 목을 한 손에 감싸 쥐었다.

“여기서 널 죽이는 건 일도 아니니까.”

“……그렇겠군요. 잘 알아들었어요.”

아우라가 장신구를 담았던 상자를 닫았다. 상자를 넣으려는 듯 콘솔 서랍을 열었다가 그 안에 있는 석궁을 재빨리 꺼내 겨눴다.

‘젠장!’

라이언은 순간 당황했지만 재빨리 소매에서 단검을 빼냈다.

석궁의 끝이 라이언의 심장을, 단검의 끝이 아우라의 목을 겨눴다. 두 사람을 서로를 쏘아보았다.

“멍청한 선택을 하는군, 아우라.”

“내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분명 말했을 텐데. 널 죽이는 건 일도 아니라고.”

“어디 해 봐. 무섭지 않아.”

겁먹지 않는 태도에 라이언이 미간을 찌푸렸다. 손목에 남은 흉터가 그녀의 담담함을 뒷받침하는 듯했다.

석궁은 분명 장전되어 있었다. 그녀가 손가락만 움직이면 화살이 날아와 라이언의 심장에 꽂힐 거였다.

하지만 라이언도 물러나진 않았다. 칼날이 그녀의 목을 깊이 누르고 있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베일 것이다.

그 팽팽한 대치 속에서 아우라는 며칠 전 일을 떠올렸다.

카를이 수트라로 떠나기 전, 아우라는 서재에서 한참을 울었다. 그녀는 너무 막막했다. 카를을 두고 죽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리엘이 죽게 둘 수도 없었다.

카를은 제 품에 안겨 우는 아우라에게 말했다.

“아우라, 잘 들어. 해결 방법을 찾았어. 핀의 봉인을 해제할 방법을.”

“……뭐?”

“그러니 날 믿고 기다려. 며칠…… 며칠이면 돼.”

“그 방법이라는 게……! 혹시 리엘을…….”

“리엘과는 상관없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카를이 아우라의 머리를 쓸어 넘겨 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아우라.

아우라가 물었다.

“그 방법이라는 게 대체 뭔데?”

카를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라이언을 제물로 바치면 돼.”

아우라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카를을 멀뚱히 보기만 했다. 라이언을 제물로 바치다니. 대체 왜?

카를이 말했다.

“라이언은 사실…….”

아우라가 라이언에게 말했다.

“너, 트루 블러드지?”

라이언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네가 그걸 어떻게…….”

“네 어머니 릴리안 카사. 실시아를 잠시 장악했던 공국의 왕녀였잖아. 공국이 멸망한 후 전전대 황제가 실시아에 갔다가 네 어머니를 만났지? 멸국의 왕녀를 후궁으로 맞았다간 말이 많을 테니 수트라의 평민인 척 신분을 속여 황궁에 데려왔고. 뭐, 널 낳기도 전에 네 어머니에게 질려 수트라에 처박아 놨지만.”

“이……!”

라이언은 검날로 그녀의 목을 더 꾹 눌렀다. 아우라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네가 그저 천한 후궁의 소생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릴리안은 너를 그냥 두지 않았을 거야. 너는 트루 블러드다, 너는 고귀한 황자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겠지. 그래서 너도 고귀한 것에 그토록 집착하는 걸 테고. 하지만 현실에선 척박한 수트라에 매여 있어야 하니 황실에 대한 원망이 얼마나 컸을까.”

“이년이…….”

“엎친 데 덮친 격이었지? 율리우스가 트루 블러드의 희생을 핀의 봉인을 해제하는 조건으로 내걸었을 때. 안 그래도 실시아 공국의 사라진 가계도들이 한 조각씩 세상에 나타나는 상황에서 얼마나 불안했을까? 라이언 카사.”

아우라가 라이언을 꿰뚫듯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라이언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든, 어떻게든 핀의 봉인을 해제해야 했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는 네가 그렇게 자부해 마지않는 트루 블러드라는 혈통이 널 죽일 테니까.”

“죽일…… 죽여 버릴 테다…….”

라이언이 손을 미세하게 떨었다. 그러나 아우라의 손끝이 방아쇠에 닿은 이상 섣불리 움직이진 못했다.

“대체 어떻게……!”

“아, 어떻게 알았냐고?”

아우라가 미소를 지었다.

“내 남편이 알려 줬어.”

라이언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왜 카를이 핀을 가지고 수트라로 왔는지.

그는 간담이 서늘했다. 그때 자신이 카를에게 상처를 입었다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 테니까.

“잡아뗄 생각은 마, 라이언 카사. 네 어머니의 핏줄에 관한 증거는 이미 충분히 입수했으니까.”

“……그래서?”

라이언이 차갑게 그녀를 비웃었다.

“그렇다 한들 그 사실이 네가 날 죽이는 데에 한 톨이라도 도움이 되나?”

그의 말이 맞았다. 이 대치 상황은 아우라에게 전적으로 불리했다. 아우라가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하니 죽은 네 남편이 널 구하러 와 줄 거라고 기대하는 건 아니겠지?”

그 빈정거림에 아우라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그녀는 힘겹게 마음을 다잡았다. 약점을 보이는 순간 바로 당하고 말 거였다.

‘여기서 내가 죽는다고 해도 핀의 봉인이 풀리면 제니아의 마법사들이 황궁으로 올 거야. 또…….’

아우라는 카를을 끝까지 믿기로 했다.

“……카를은 죽지 않았어.”

그녀가 방아쇠를 당기려던 순간이었다. 라이언이 순식간에 그녀의 손목을 부여잡고 석궁을 쳐 냈다.

“아!”

석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라이언이 아우라를 침대로 밀어 넘어뜨렸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타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광기 어린 그의 눈빛은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검이 그녀의 목을 겨누며 떨어졌다.

“읏!”

아우라가 온 힘을 다해 그의 팔목을 부여잡았다. 하지만 이런 자세로 라이언의 힘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검날이 스멀스멀 내려왔다.

“으윽…….”

“그래. 난 고귀해, 아우라. 바로 너처럼 말이야. 이토록 고귀한데 평생을 저급한 취급을 받으며 수트라에 처박혀 살았지.”

아우라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검날이 기어이 목에 닿았다.

“트루 블러드로 태어나 그따위 취급을 받았는데 이 고귀함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고? 절대 그렇게 못 두지. 억울해서라도.”

“아…… 안 돼…….”

라이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잘됐군. 이제 너도 네 천한 남편 곁으로 보내 주마.”

그때였다. 아우라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더 드리워졌다.

촤악!

검이 사람을 가르는 소리가 침실에 울려 퍼졌다.

“어?”

라이언이 멍한 얼굴로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의 입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 아우라의 가슴을 적셨다.

툭.

라이언의 검이 힘없이 떨어졌다. 검날이 그녀의 목을 스치며 가는 상처를 냈다. 아우라는 마비된 듯 굳어 버렸다. 누군가가 라이언의 뒷덜미를 잡아 침대 구석에 처박았다.

“!”

아우라는 눈을 크게 뜨고 침대 앞에 선 남자를 보았다.

“……카를.”

카를의 검에서 라이언의 피가 줄줄 흘렀다. 그는 검을 놓고 아우라를 안아 일으켰다. 얼마나 다급하게 온 건지 그의 몸이 온통 땀이었다.

“아우라, 괜찮아?”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녀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라이언이 황궁에 왔을 때부터 그녀는 속으로 수백 번 되뇌어야 했다. 카를은 죽지 않았다고. 카를이 죽었을 리 없다고.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아우라가 타박하듯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툭 쳤다. 그러나 그 주먹마저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카를이 그 손을 잡았다.

“많이 기다렸어? 미안.”

“…….”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마물도 많이 만났고. 바로 온다고 오긴 했는데…….”

“낭떠러지? 마물?”

그녀가 놀라서 카를을 살폈다. 이제야 피투성이가 된 그의 몰골이 보였다. 역한 피 냄새는 분명 마물의 것이었다.

“괘, 괜찮은 거야?”

카를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괜찮아. 너는? 많이 무서웠어?”

아우라는 눈물을 꾹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우라가 수긍할 줄은 몰랐는지 카를이 난감해했다.

“미안. 미안해. 내가 좀 늦었지.”

이번에는 고개를 저었다. 충분히 빨리 왔다고, 죽지 않아서 고맙다고. 꽉 메인 목 아래에서 말했다.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죽으려 했을 때마다 카를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이 끔찍한 기분을 그가 몇 번이나 견뎌 냈다는 것 역시.

“으, 으악!”

구석에 쓰러져 있던 라이언이 대뜸 비명을 질렀다. 언제 굴러 나왔는지 핀이 그의 피를 탐욕스럽게 빨아들이고 있었다.

“사, 살려 줘! 살려줘!”

살려 주고 싶어도 막아 줄 방도 같은 건 없었다. 저주라는 게 원래 그러하듯.

카를이 갈라 놓은 그의 등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날개처럼 퍼지는 피가 속속들이 핀에 빨려 들어갔다. 끔찍하고도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라이언의 숨이 끊기고 그의 몸은 서서히 쪼그라들어 갔다. 가죽처럼 말라붙은 그의 몸은 사람의 것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그때였다. 피를 다 삼킨 핀에서 신비로운 녹색빛이 감돌았다. 그 빛은 점점 밝아지더니 나중에는 눈이 부실 정도로 번쩍였다. 그러나 아우라는 눈을 크게 뜨고 그 빛을 바라보았다.

“저건…… 제니아인들의…… 마력이야.”

그녀가 중얼거렸다. 이윽고.

쨍!

핀이 깨졌다. 녹색빛이 엄청난 기세로 터져 나왔다. 그 파동에 아우라가 휘청이자 카를이 그녀를 감싸듯 안아 주었다.

아우라는 그의 어깨 너머로 분명히 보았다. 그 빛의 물결이 창문을 통해 밖으로 뻗어 나가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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