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34화
다음 날 밤, 아우라는 테오와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테오가 오니 확실히 일을 처리하는 데 속도가 붙었다. 며칠 동안 미뤄 둔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테오, 대충 정리가 되면 돌아가 쉬도록 해요. 환궁하고 전혀 쉬질 못하지 않았습니까.”
“네, 폐하. 그렇게 하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테오는 나갈 기색이 없었다. 그의 성격상 아우라를 먼저 보내고 나서야 쉴 수 있을 것이다.
똑똑똑.
그때 다급한 노크 소리에 이어 미나가 달려 들어왔다.
“폐하! 큰일 났습니다!”
아우라가 고개를 들었다. 테오 역시 큰일이라는 말에 사색이 되었다.
‘설마…….’
그녀는 차마 되묻지도 못하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아닐 거야. 아닐 거야.
“라이언 대공이 군사를 이끌고 황궁 앞으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라이언이 황궁에 군사를 데리고 왔다. 그 뜻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첫째, 수트라 전투에서 황제군이 졌다는 것. 둘째, 라이언이 카를을 죽였을 확률이 크다는 것.
테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표정엔 어떤 결의가 담겨 있었다.
“폐하, 황궁의 모든 병력을 모으겠습니다.”
그는 라이언과 끝까지 싸울 작정이었다. 카를과 조쉬를 해쳤을 라이언을 그냥 둘 수 없었다.
“잠깐.”
아우라가 입을 열었다.
“일단 상황을 지켜보죠, 테오.”
“하지만 폐하.”
“미나, 그가 데려온 군사들의 행색이 어떻지? 정예군인가?”
“그건…… 아뇨. 듣기엔 그런 것 같진 않았습니다. 정예군이라기엔 그 수가 적었고, 모두 로브를 둘러쓰고 모습을 숨기고 있다고 합니다.”
“실시아의 마법사 같지요?”
아우라가 테오에게 물었다. 테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테오, 그들과 싸워 이길 자신이 있나요?”
테오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현재 병력으로 마법사를 상대하긴 어렵습니다. 황제군이나 마법사가 있다면 모를까요.”
아우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마비된 듯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황제가 없는 지금, 황궁의 수비는 아우라의 책임이었다.
“내가 라이언을 상대하겠습니다. 테오는 내 방에 있는 리엘을 데리고 황궁을 몰래 빠져나가세요.”
“황후 폐하! 안 됩니다!”
“명령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안 계시는 이상 제가 통솔권을 가지게 되는 걸 모르나요?”
아우라가 딱 잘라 말하며 집무실을 나갔다. 테오가 황급히 아우라를 따라잡았다.
“황후 폐하, 황후 폐하. 대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라이언을 상대하시다니요.”
“라이언과 싸우지 않을 겁니다.”
“네?”
“궁으로 불러들여 시간을 끌 거예요.”
“……그게 무슨…….”
아우라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수트라의 정예군이 오지 않았다는 건 전투는 전투대로 두고 라이언이 마법사만 이끌고 수도로 왔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전투에 참여한 황제군이 전멸했다고 보기엔 이르죠.”
“…….”
“황제 폐하의 생사를 확신하기도 이르고요.”
테오는 할 말을 잃었다. 그의 생각은 그렇게 희망적이지 않았다. 지금 상황은 분명 황제군의 패배를 증명하고 있었다. 카를이 살아 있었다면 라이언을 여기까지 오게 둘 리도 없었다.
하지만 아우라는 분명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상황이 패배로 끝나지 않으리란 것을.
“테오.”
아우라가 테오를 보았다.
“나를 믿어 주세요.”
“…….”
“설사 그대의 예상이 모두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라이언이 이 황궁을 차지하게 두진 않을 테니까요.”
“폐하…….”
“이제부터 나는 라이언을 맞이할 겁니다. 황궁의 병력은 평소의 수비 상태를 유지하게 하시고…… 바로 리엘을 데리고 도망치세요. 명령입니다.”
아우라는 그렇게 명령을 남기고 복도를 걸어갔다. 테오가 이마를 짚고 그 뒷모습만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대체 이걸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지?”
그때 문득 테오는 기시감을 느꼈다.
수트라에서 카를이 혼자 성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그는 딱 이런 기분으로 카를을 보냈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주군을 믿으니까.
생각 끝에 그는 별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다그닥…….
라이언의 말이 황궁 문 앞에 도착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궁 안은 조용했다. 라이언은 마법사들에게 명령했다.
“화살이 쏟아질지도 모르니 조심해라. 만약 누구 하나라도 화살을 날리면 궁수들을 모두 죽이도록.”
“네, 전하.”
그들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잘 훈련된 기사라면 모를까, 일반 병사로선 마법사들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그럼 문을 부숴라.”
라이언이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끼이익.
황궁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문틈 사이로 아우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
라이언이 그녀를 보고 감탄 아닌 감탄을 했다. 겁먹지도, 분노하지도 않는 태연한 표정이 참으로 의외였다.
“황후 폐하.”
“대공.”
아우라가 느긋한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라이언은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어쩐 일로 마중을 나오셨습니까?”
“대공이 오셨다기에 반가운 마음에.”
라이언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목숨을 구걸하시는 겁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동정을 베푸실 겁니까?”
“하핫, 동정이라.”
그가 황궁 안을 보았다. 그 안엔 어떤 함정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지 않고서야 황후가 이렇게 위험한 짓을 할 리가.
하지만 그녀가 진심이라면? 제 목숨이 너무나도 아까워 이런 비굴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렇다면 이 여자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즐겨도 좋을 것 같았다.
“동정을 베풀어 준다면 절 어디로 데려가실 작정이십니까?”
“……따라오시죠.”
아우라가 먼저 뒤돌아 갔다. 라이언은 물 흐르듯 걷는 아우라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았다. 언제든 자신을 죽일 수 있는 남자에게 등을 보이다니. 그 배짱이 다시 한번 마음에 들었다.
“들어간다.”
라이언이 말을 몰아 궁 안으로 들어섰다. 마법사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궁 안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범했다. 하지만 라이언은 이곳을 평범하게 둘 마음 따윈 없었다.
“지금부터 눈에 보이는 자들을 모두 잡아들여라. 시종이건 시녀건 상관없이. 병사들은 무장을 해제하고 지하 감옥에 가두도록.”
“네, 전하.”
“서쪽 별궁에 리엘이라는 여자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꼭 잡아야 한다. 알았나?”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법사들이 흩어졌다. 그들은 곳곳에서 병사들의 무기를 빼앗고 무릎 꿇렸다. 아우라는 그 모습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라이언은 이 상황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대로 황궁을 장악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물론 그 전에 핀 문제를 해결해야겠지만.
저 멀리 본궁 앞에서 아우라가 살짝 뒤를 돌았다. 어서 오지 않고 뭘 하냐는 듯한, 라이언을 당기는 미소를 지으며. 그리고 여유롭게 본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아……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기대가 되는 여자였다. 정말이지.
라이언은 말에서 내려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가 그를 안내한 곳은 식당이었다. 식당에는 술과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속도 좋지. 제 남편 죽인 남자와 식사를 할 생각을 하다니.”
라이언이 뭐라고 말하건 아우라는 의자에 앉아 그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음식이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입니다.”
“배가 고프진 않아서.”
라이언이 그녀와 마주 앉았다.
‘뭐가 들었을지도 모를 음식에 입을 댈 정도로 내가 바보로 보이나? 아니면…… 제대로 엎드리겠다는 건가.’
남편을 죽였다고 말했음에도 그녀는 별다른 동요도 없어 보였다. 황제 부부 사이가 미묘하다는 것을 그 역시 들어서 알곤 있었지만.
“당신과 카를이 죽고 못 살거나, 죽어도 상관없을 만큼 증오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은 했는데.”
“…….”
“어느 쪽이지? 헷갈리는군.”
“일단은 후자에 가깝다고 해 두죠.”
아우라가 제 잔에 와인을 따랐다. 그리고 라이언의 잔에도 따라 주었다.
아우라가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라이언은 마시지 않았다. 와인이 아닌 잔에 독이 묻었을 수도 있기에.
대신 그는 아우라의 잔을 가져다가 목을 축였다. 아우라가 피식 웃더니 라이언의 잔을 가져가려 했다.
“이걸 마저 드시면 되겠습니다만, 황후 폐하.”
라이언이 제가 마시던 잔을 내밀었다. 아우라는 묵묵히 그 잔을 받아 마저 비웠다.
그는 턱을 괸 채 그런 아우라를 빤히 보았다. 와인을 삼키는 목선이 가늘었다. 마음만 먹으면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전에 봄 무도회에서였나요? 대공께서 제게 말씀하셨지요. 핀이 궁금하다면 대공을 찾으라고, 또…… 대공께서 핀을 갖고 계신다고.”
“그러자 당신이 내게 이렇게 말했지. 목이 마른다고 바닷물을 마실 수야 있겠냐고.”
“그리고 그 바닷물을 마시러 수트라로 갔지요.”
아우라는 재미있는 추억을 더듬는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저는…… 아무래도 바닷물이 입에 맞는 모양입니다, 대공.”
“자꾸 마시다 보면 결국 말라 죽고 말 텐데.”
“고통받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죠.”
“…….”
“타고나기를 그렇게 태어났나 봐요.”
“……하하.”
라이언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당돌한 청록색 눈동자와 와인에 젖은 입술 같은 것. 그리고 라이언을 슬쩍슬쩍 건드리는 듯한 말들. 그런 것들은 분명 그를 지나치게 즐겁게 했다.
“뭘 묻고 싶은 거지? 아니, 뭘 원하는 거지?”
“오늘도 핀을 가지고 계신가 해서요.”
“아하. 결국 핀인가.”
그는 품에서 핀을 꺼내 식탁에 올려 두었다.
핀을 본 아우라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핀이 여기 있다는 건…… 카를의 확실한 패배를 의미했다. 그리고 어쩌면 죽음까지도.
라이언은 그 찰나의 동요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테이블의 나이프를 들고 그녀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