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33화
“후…… 죽을 뻔했네.”
라이언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둔덕의 수리를 위해 설치한 판자가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라이언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말이 둔덕이지, 카를이 떨어진 쪽은 높은 낭떠러지였다. 그는 아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흩날리는 눈과 겨울나무들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이 높이에서 떨어졌으면 몸이 온전하진 못하겠지.’
라이언이 얼른 길을 돌아 낭떠러지 아래로 내려갔다. 카를이 떨어진 흔적과 핏자국이 눈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어 다리를 질질 끄는 듯한 발자국도.
그 발자국은 마수를 가둬 놓은 덤불로 향하고 있었다. 신디온이 절대 들어가선 안 된다고 했던 곳.
‘하필이면…….’
라이언의 뒷목을 긁었다.
그런 그의 앞에 뭔가가 반짝였다. 카를의 발자국 사이에서 빛을 반짝이고 있는 동그란 수정구.
그는 핀을 집어 들었다. 수정구 안에 떠도는 영롱한 흰 빛들. 진짜 핀이 확실했다.
“오호라.”
이렇게 되면 더 고민스러웠다. 덤불로 들어가서 그를 붙잡아 끝을 볼 건지, 핀을 가지고 황궁으로 돌아갈지.
답은 비교적 간단하게 나왔다.
‘나까지 덤불로 들어가서 마물들과 뒹굴 이유는 없지.’
카를은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몸이었다. 게다가 핀을 떨어뜨렸는지도 모르는 정신없는 상태. 그의 뒤처리는 마물에게 맡겨도 좋을 듯했다.
라이언이 입술을 길게 늘이며 웃었다.
“……황궁으로 가야겠군.”
***
아우라는 눈밭을 걷고 있었다.
‘여긴…… 수트라인 것 같은데. 내가 왜 여기에…….’
하염없이 걷던 그녀의 앞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아우라가 활짝 웃었다.
“카를!”
아우라는 그를 향해 달려갔다. 그녀의 손끝이 그의 등에 닿으려던 때였다.
카를이 힘없이 쓰러졌다.
“어?”
그리고 그녀의 시야에 라이언이 나타났다. 이렇게 되어서 참으로 애석하다는 미소를 지은 채. 그의 검에는 검붉은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아우라가 천천히 아래를 보았다. 카를은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있었다. 그의 피가 눈밭을 서서히 붉게 적시고 있었다.
그 순간, 라이언이 훅 다가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챘다.
“!”
비웃음 가득한 라이언의 푸른 눈이 번쩍 빛났다.
“헉!”
아우라가 소파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곁을 지키던 미나가 놀라서 다가왔다.
“폐, 폐하. 괜찮으십니까?”
“응? 어어……. 괜찮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괜찮지 않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등엔 식은땀이 흘렀다.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다가 잠깐 피곤함을 달래려 쪽잠을 잤다. 이 노곤한 와중에 악몽을 꿀 줄은 꿈에도 모른 채.
“폐하, 따뜻한 차를 좀 드릴까요? 날이 많이 차가워졌습니다.”
“어어…… 그래, 미나. 부탁해.”
“네, 폐하.”
미나가 얼른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하아…….”
아우라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괜찮은 거겠지, 카를. 제발…….’
눈밭에 퍼지던 그의 피가 아직도 선명했다. 머리카락을 잡아채던 라이언의 거친 손길도.
그때 벌컥 하고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차를 가지러 갔던 미나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폐하!”
“무슨 일이야?”
아우라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악몽의 여파 때문이었을까. 불길한 생각부터 들었다.
“카를, 카를의 소식이야?”
“아뇨. 테오 님과 리엘 황녀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뭐? 가 봐야겠다.”
적어도 리엘을 구출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크게 놓였다. 아우라는 다급한 걸음으로 별궁으로 향했다.
별궁 입구엔 숨을 몰아쉬는 말이 한 필 있었다. 테오의 말인 듯했다.
‘리엘을 데리고 혼자서 돌아온 건가.’
아우라는 복도를 쭉 걸어 리엘의 방으로 갔다. 마침 테오가 리엘의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테오.”
“황후 폐하.”
테오의 얼굴이 발갛게 얼어 있었다. 아우라는 그의 옷 여기저기에 튀어 있는 피를 보았다. 혈투의 흔적에 아우라의 가슴이 쿵 가라앉았다. 그녀는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괜찮은 건가요? 테오와 리엘 모두.”
“저야 괜찮습니다만…… 리엘 전하가 많이 놀라셨을 겁니다.”
“어떻게 됐나요? 전투는…… 폐하는?”
카를의 안부를 묻자 테오가 난감해했다. 그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차근차근 대답했다.
“수트라 성 앞에서 전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던 중 폐하께서 리엘 전하를 구출하러 성으로 잠입하셨습니다. 리엘 전하께서 용감하시게도 혼자 탈출하셔서 제가 이렇게 모시고 왔고요.”
“리엘이 혼자요? 그럼 폐하께서는요?”
“저는 명령에 따라 전하를 모시고 바로 복귀했습니다. 리엘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폐하께선 도망친 라이언을 뒤쫓으셨다고 합니다. 이후의 일은 알지 못합니다. 송구합니다, 폐하.”
테오가 고개를 숙였다. 아우라는 그에게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지금 그녀가 붙잡을 사람은 테오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카를의 생사를 알지 못하는 건 테오도 마찬가지였다. 괜히 부하에게 불안한 모습을 보여 좋을 건 없었다.
‘그래도 리엘을 구출했으니 라이언에게 밀리진 않았을 거야.’
아우라는 그렇게 불안함을 달랬다.
‘돌아올게. 다 괜찮을 거야. 그러니까 다른 생각 하지 말고 기다려.’
또 지금으로선 그 약속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고생 많았습니다. 테오, 정비하고 쉬도록 하세요. 국무 일정은 제가 보고 있으니.”
“아닙니다. 바로 업무에 복귀하겠습니다. 황후 폐하야말로 제게 잠시 일을 맡기시고 쉬심이…….”
아우라가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 돌아오기 전까지 국정은 제가 봅니다. 그러기로 약속했거든요.”
그녀는 그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그래야 카를도 돌아온다는 약속을 지킬 것만 같았다.
테오는 그런 아우라의 마음을 짐작했는지 뜻을 거뒀다.
“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저도 정비를 마치고 집무실로 가서 업무를 보좌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이따 뵙지요.”
그는 고개를 한 번 꾸벅인 후 별궁을 떠났다. 아우라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피곤해 보이는데…… 전투 중인 동료들을 두고 쉴 수가 없는 걸까.’
그녀는 리엘의 방으로 들어갔다. 리엘은 막 시녀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은 참이었다.
“황후…… 폐하아아!”
리엘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지더니 급기야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아우라를 보니 참았던 서러움이 터진 듯했다. 아우라가 다가가 리엘을 안아 주었다.
“으아아앙! 으아앙!!”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우는 리엘의 모습에 아우라는 잊고 있던 죄책감이 몰려왔다. 자신이 우물쭈물한 사이에 리엘이 납치를 당한 건 분명했으니.
“많이 무서웠니? 미안해.”
아우라가 리엘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리엘은 대답도 못 하고 그저 입을 크게 벌리고 꺽꺽 울기만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대체.’
아우라는 라이언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도 제 손녀인데 이렇게까지 겁을 먹게 하다니.
“나, 나한테…… 약을…… 약을 먹이려고 했어. 날 가두고…… 끌고, 막 붙잡았어. 으아아앙…….”
리엘이 이것 보라는 듯 팔을 내보였다. 얼마나 세게 붙잡은 건지 팔에 푸른 멍이 들어 있었다.
“다른 곳은? 또 어딜 다쳤어?”
“무, 무릎도…….”
이번에는 치마를 들어 제 무릎을 보였다. 긁힌 무릎에 그새 딱지가 앉아 있었다.
“또?”
“히끅. 그게…… 그게 다야.”
아우라가 내심 안심하며 리엘을 안아 주었다.
‘약은 먹이지 못한 것 같고, 멍과 긁힌 게 다라면 일단은 안심이지. 정신적 충격은 시간을 들여 치료해야겠지만.’
“리엘. 리엘이 괜찮아질 때까진 당분간은 나랑 잘까? 어때?”
“흑…… 좋아.”
리엘이 아우라의 치마를 꽉 잡았다. 그 결정을 번복하지 말라는 듯.
아우라는 그제야 마음을 놨다. 요란한 울음에 비해 상태는 괜찮은 듯했다. 일단은.
카를이 리엘을 구조했다면 그 상황을 묻고 싶었다. 카를과 라이언과의 싸움은 어땠는지, 카를이 다치진 않았는지.
그러나 아우라는 꾹 참았다. 리엘에게 더는 그 상황을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우라는 리엘의 손을 잡고 본궁으로 향했다. 그렇게 돌아온 리엘을 따뜻한 물로 씻기고 자신의 침대에서 재웠다. 리엘은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있다가 아우라에게 말했다.
“할아버지가 내 목에 칼을 대면서 삼촌에게 날 죽이겠다고 협박했어.”
‘……! 인질극이 있었구나.’
아우라는 순간 걱정이 됐다. 할아버지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면 그 충격이 컸을 것이다. 그녀는 태연한 척 리엘의 머리를 넘겨 주며 되물었다.
“그랬구나. 그래서?”
리엘이 수줍게 웃었다.
“내가 할아버지 팔을 물고 막 도망쳤어.”
“뭐?”
“그래서 할아버지가 달아나고 삼촌이 따라간 거야.”
그 말을 하는 리엘은 의기양양했다. 상처받았다고 우는 대신 무용담을 뽐내다니. 이렇게 귀엽고, 이렇게 기특할 수가.
아우라는 리엘을 꽉 안아 주었다.
“대단하다, 리엘.”
“헤헤…….”
리엘의 잔뜩 부은 눈이 동그랗게 휘어졌다. 아우라는 그 눈가를 만져 주며 물었다.
“할아버지가 무섭진 않았어?”
“무서웠어. 무서웠는데…… 난 황녀니까. 무서워만 하고 있으면 안 돼.”
“…….”
“긍지 있는 황녀가 될 거야.”
그렇게 말하는 리엘은 그새 조금 더 자란 것 같았다. 긍지가 뭐냐고 물었던 그 꼬맹이가 라이언의 팔에 이빨 자국을 냈단다.
“이미 충분히 긍지 있어, 리엘.”
아우라가 리엘의 눈을 감겨 주었다. 그리고 리엘의 배를 토닥였다. 리엘은 피곤했는지 바로 잠이 들었다.
아우라는 침대를 벗어나 발코니로 나갔다. 저 멀리 보이는 황궁의 입구는 고요하기만 했다. 그리고 북쪽 탑은 여전히 우뚝 서 있었다.
북쪽 탑이 말하는 듯했다. 모든 불길한 일이 현실이 되고 말 거라고. 너의 꿈처럼.
아우라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올 거야, 분명히……. 약속했으니까.’
“……어?”
그때였다. 하늘에서 눈송이 하나가 하늘하늘 떨어졌다.
올해의 첫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