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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32)화 (132/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32화

신디온의 실험실은 구역질 나는 냄새로 가득했다. 화로에서 끓고 있는 약 때문이었다. 라이언은 얼굴을 찡그리곤 신디온에게 말했다.

“두 번은 맡고 싶지 않은 냄새군. 아직 멀었나?”

“들어가는 재료들이 유별나게 많아서 그럽니다. 뒤섞인 약재 냄새가 좋을 리는 없지요. 그래도 이제는…… 얼추 완성되었습니다.”

“어휴, 그럼 이제 불을 꺼. 더는 못 맡아 주겠군.”

“네, 전하.”

신디온이 주전자를 탁자로 옮기곤 화로에 물을 부었다. 불은 푸시식 하는 소리를 내며 꺼졌다. 그 매캐함이 약 냄새를 그나마 덮어 주었다.

라이언이 주전자 안을 슬쩍 보았다. 아직도 걸쭉한 기분 나쁜 초록색 액체에서 거품이 몽글몽글 올라오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신디온이 양손으로 실험실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황녀님께 바로 대접할까요?”

공손한 태도와 말투였다. 하지만 그 손끝에 펼쳐진 풍경은 전혀 공손하지 못했다.

“……흑…… 흐윽…….”

리엘은 성인의 허리까지 오는 우리에 갇혀 있었다. 무릎과 팔꿈치에 난 상처들이 그간의 일을 설명해 주는 듯했다.

리엘은 몇 번이나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수트라 성은 아이가 쉽게 도망칠 만한 곳이 아니었다. 다시 잡힐 때마다 리엘의 몸엔 상처가 늘었고, 종래엔 우리에 갇혔다.

라이언이 울고 있는 리엘을 쓱 보았다.

“히끅!”

리엘은 그 푸른 눈에 경기를 일으키듯 딸꾹질을 했다. 라이언이 무감하게 말했다.

“식혀서 드려. 그래야 삼키지.”

“네. 그럼 미리 떠 놓겠습니다. 그편이 빨리 식을 테니까요.”

신디온이 작은 그릇에 약을 퍼 담았다. 리엘은 그 걸쭉한 액체를 보고 얼굴이 새파래졌다.

‘나에게…… 나에게 뭘 먹이려는 거지?’

“리엘.”

라이언이 씩 웃더니 우리 앞에 앉았다.

“어제 마차에서 말했지? 수트라 성에 오면 맛있는 걸 준다고.”

“으…… 으으…….”

“혼나기 싫으면 단번에 먹어야 해. 알겠니?”

리엘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쏟아졌다. 모르긴 몰라도 저걸 먹으면 큰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사, 살려 줘……. 살려 줘, 황후 폐하…… 삼촌…….’

약을 저어 가며 후후 불던 신디온이 말했다.

“다 식었습니다, 전하.”

“아, 그래. 이제 먹이면 되겠군.”

라이언이 무성의하게 손짓했다. 신디온이 약을 계속 불면서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리엘이 본능적으로 우리 구석으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황녀님.”

신디온이 주머니에서 우리 열쇠를 꺼냈다. 철컥. 자물쇠를 따는 쇳소리에 리엘은 소름이 끼쳤다.

“시, 싫어……! 싫어!”

리엘은 우리 구석에서 발로 바닥을 미친 듯이 밀었다. 그러나 더 물러날 곳은 없었다. 턱 하고 신디온이 리엘의 손목을 억세게 잡았다. 그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나오시죠.”

“꺄악! 놔, 놔! 싫어!”

리엘이 덜덜 떨며 버텼다. 하지만 성인 남자의 힘을 버텨 낼 재간은 없었다. 리엘이 반쯤 우리 밖으로 끌려 나오는 순간이었다.

“어?”

신디온은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알싸한 통증이 가슴에서 퍼져 나갔다. 그는 물끄러미 제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에는 단도가 하나 박혀 있었다. 언제 와 꽂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신디온은 바보 같은 표정으로 라이언을 보았다.

“어? 이런.”

라이언이 놀란 듯 입을 가렸다. 그는 생각했다. 이렇게 소리 없이 정확하게 단도를 던질 사람이라면…….

“조카님이 여기까지 오신 모양이군.”

“전……하……?”

신디온은 그는 어떻게든 해 달라는 듯 절박하게 라이언에게 매달렸다. 그러나 라이언은 혀를 한 번 차곤 그를 휙 밀어 버렸다.

풀썩! 쨍그랑!

신디온은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가 들고 있던 약그릇도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그때 열린 문틈 사이로 카를이 달려들었다. 라이언이 재빨리 리엘을 붙잡고 그 목에 칼을 들이댔다.

“꺄악!”

리엘이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듣기 싫다는 듯 라이언이 리엘의 입을 막았다.

“으읍…… 읍!”

카를이 미간을 찌푸리며 멈춰 섰다. 골치 아픈 마법사는 해결이 된 듯했다. 이제 문제는 리엘의 구출이었다.

“안녕, 조카님. 내 손녀를 데리러 왔나?”

“인질극이라도 벌이시시겠다? 얼마나 비겁해질 작정이지?”

“뭐, 할 수 있는 만큼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는 조카님 하기에 달려 있겠지만.”

라이언이 리엘의 목에 칼날을 댔다. 그 느낌에 리엘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그만둬. 리엘이 죽으면 너도 이 자리에서 죽는다.”

카를이 확신을 담아 말했다. 라이언이 그를 비웃었다.

“난 이렇게 말하고 싶은데. 당장 나와 황궁으로 가. 그곳에서 핀을 내놓지 않으면 리엘을 죽일 거야.”

카를이 그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품에서 핀을 꺼냈다. 라이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보았다.

“핀을…… 네가 지니고 있었나?”

“자, 가져가.”

카를이 핀을 내밀었다. 라이언이 떨리는 손을 뻗었다. 손끝이 핀에 닿으려는 순간, 카를이 팔을 조금 당겼다. 라이언의 얼굴이 구겨졌다.

“무슨 짓이지? 리엘이 죽는 걸 보고 싶어?”

“리엘부터 놔줘. 그 전엔 안 돼.”

“아니. 핀을 내놓기 전엔 못 놔줘.”

두 사람은 말없이 한참을 그렇게 대치했다.

리엘은 칼을 쥔 라이언의 손에 힘이 살짝 빠졌음을 느꼈다. 그는 지금 핀에 온 정신을 빼앗긴 상태였다.

삼촌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구해지기만을 바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용기를 내야 해. 용기를……. 그래. 할 수 있어.’

리엘이 라이언의 팔을 억세게 물었다.

“윽! 이게!”

놀란 라이언이 움찔하는 사이 리엘이 그를 힘차게 밀어내고 카를을 향해 달렸다. 카를은 그 틈을 놓지 않고 라이언에게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라이언은 재빨리 그 검을 피했다.

“제길!”

라이언은 욕을 내뱉으며 창밖으로 달아났다. 카를은 바로 따라 나가고 싶었으나 리엘을 두고 그럴 순 없었다.

카를은 리엘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고 또박또박 말했다.

“리엘, 당장 입구로 달려가서 테오를 찾아.”

“으…….”

리엘은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했다.

“어서!”

“……네!”

리엘이 울음을 삼키곤 뒤돌아 달려 나갔다. 카를은 그제야 라이언을 잡기 위해 창문을 넘었다. 쌓여 있는 눈이 라이언이 달려간 길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곳은 성 뒤편의 둔덕이었다.

카를이 둔덕을 다 올라왔을 때, 라이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후우…….”

라이언은 카를을 상대하기로 마음을 먹은 듯했다. 그는 검을 잡은 채 자세를 취했다.

카를도 검을 다시금 꽉 잡았다. 그야말로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싸움이었다.

***

“하아…… 하아……!”

리엘은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밖으로 나갈 때까지 만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카를이 처리한 듯한 시신들만이 나뒹굴 뿐이었다.

성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리엘은 느낄 수 있었다. 카를이 도망칠 자신을 위해 이 틈을 벌려 놓고 나갔다는 것을.

그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져 리엘이 울컥했다. 또 눈물이 나려고 하는 걸 참고 문밖으로 나섰다.

“!”

눈앞은 치열하고도 잔인한 전쟁터였다.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광경에 리엘은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때였다. 말을 탄 누군가가 리엘의 팔을 잡아 그대로 쑥 들어 올렸다.

“으악!”

“황녀님! 접니다.”

테오가 리엘을 끌어안아 말에 앉혔다.

“테, 테오?”

“눈을 감고 절 안으십시오. 저와 함께 바로 황궁으로 가실 겁니다.”

“으…… 응!”

“조쉬! 엄호를!”

“알았어!”

근처에 있던 조쉬와 병사들이 테오의 주위를 둘러쌌다.

리엘은 눈을 꽉 감고 테오를 끌어안았다. 조랑말만 타 본지라 거칠게 흔들리는 군마가 당장에라도 자신을 떨어뜨릴 것 같았다.

전쟁터의 끔찍한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테오가 무사히 빠져나온 듯싶어 살짝 눈을 떴다. 정말로 전쟁터가 저 멀리 멀어져 있었다. 테오가 리엘에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응.”

“장하십니다. 울지도 않으시고.”

“내가 왜 울어.”

위험이 한 차례 지나갔기 때문일까. 리엘은 뒤늦게 제 자신이 뿌듯했다.

목에 칼이 들어온 상황에서 라이언의 팔을 꽉 물었던 그때의 그 용기. 그것만큼은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었다.

***

선제공격은 라이언 쪽이었다.

“이야아아!”

그는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챙!

두 개의 검이 맞붙었다. 칼날들이 불꽃을 튀기며 갈려 나갔다. 말 그대로 힘과 힘의 대결이었다. 두 숨결이 허공에서 뒤섞였다. 라이언이 이를 악문 상태로 물었다.

“왜…… 왜 핀을 가져온 거지?”

카를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뭘 불안해하는 거지? 라이언 카사.”

라이언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카를이 말했다.

“황후가 그 정의로운 성격에 목숨이라도 끊으면 어쩌나 해서 말이야. 그게 무서워서 내가 들고 왔을 뿐인데.”

“…….”

“삼촌께서 뭔가 켕기시는 거라도?”

“큿…….”

라이언이 검을 힘껏 돌렸다. 챵! 하는 소리와 함께 두 검의 칼날이 길게 긁히며 떨어졌다. 라이언이 뒷걸음질을 쳤다.

‘힘으로는 상대가 안 되겠군. 그럼…….’

카를은 그가 생각할 시간 같은 건 주지 않았다. 그는 빠르게 달려들어 라이언의 심장을 노렸다.

“윽!”

깡!

라이언은 가까스로 그 공격을 막았다. 이어지는 공격을 정신없이 막으며 그는 계속 뒷걸음질 쳤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와 싸우면서 소름이 돋는 건. 

말로만 듣던 카를의 검술은 한 마디로 냉정했다. 그 어떤 군더더기도, 필요 이상의 완력도 없었다. 그저 상대의 심장을 뚫기 위해 움직이는 기계 같았다.

깡!

“제법이네, 조카님. 황태자가 경계했을 만해.”

라이언의 관자놀이에 땀이 한 방울 흘렀다. 그는 물러나고 또 물러났다. 둔덕의 끝까지.

저벅. 카를이 그에게 따라붙었다. 깡! 두 검날이 다시금 맞붙었다. 라이언이 슬금슬금 밀리는 듯하더니 제 오른편의 방어를 순간 풀었다. 카를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오른편으로 몸을 움직였을 때였다.

“!”

그가 밟은 건 눈 덮인 판자였다. 그 순간, 라이언의 비열한 미소를 보았다.

카를은 그렇게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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