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31화
아우라는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카를을 대신해서 국정을 보는 건 쉽지 않았다. 까다로운 일거리들도, 그녀를 찾는 사람도 많았다.
그래도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보좌관과 대신들의 방문을 피하지 않았고, 예정된 알현들도 하나씩 해결했다.
“수트라 쪽에서는 연락 온 게 없나요?”
아우라가 깃펜을 놀리며 보좌관에게 물었다. 서류를 전달하러 왔던 보좌관은 고개를 살짝 숙이곤 말했다.
“네, 아직 없습니다.”
“그렇군요. 알았습니다. 나가 보세요.”
아우라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보좌관은 그런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오늘만 해도 벌써 세 번째 물어보시네.’
황궁의 분위기는 기묘했다. 황제가 하루아침에 두 참모를 모두 데리고 수트라로 갔다. 반역자를 잡는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분명 과한 출정임은 확실했다.
게다가 황후는 평소와 다르게 황제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렸다. 담백했던 그들의 관계에 변화가 생겼음을 눈치 빠른 자들은 알 수 있었다.
탁.
아우라가 서류를 덮었다. 다음 서류에 펼치려던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하아…….”
‘카를, 괜찮겠지?’
걱정은 쓸모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생각이 났다.
‘분명 지금쯤이면 수트라에 도착했을 텐데. 소식을 보낼 수 없을 정도로 전투가 치열한 걸까.’
똑똑.
노크 소리에 이어 미나가 들어왔다. 아우라는 허리를 폈다. 혹시 소식이 온 건가 싶었다.
“무슨 일이야?”
“폐하, 밀론에서 오신 손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밀론에서 오신 손님. 그 어정쩡한 이름의 주인공은 한 사람뿐이었다.
‘루안이 깨어났구나.’
아우라가 깃펜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당장 의료실로 가야겠어.”
아우라는 빠르게 집무실을 나섰다. 이윽고 그녀는 의료실 앞에 도착했다.
“미나 너는 여기 있어.”
“네, 폐하.”
미나가 고개를 꾸벅 숙이곤 의료실의 문을 열어 주었다. 열린 문 사이로 침대에 파묻힌 듯 앉은 루안이 보였다. 창밖을 내다보는 그의 연갈색 머리카락을 밝은 햇빛이 적시고 있었다.
아우라는 조심스레 의료실 안으로 들어섰다. 인기척에 루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우라 역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루안의 곁을 지키고 있던 황궁의가 아우라에게 다가왔다.
“폐하, 오셨습니까?”
“손님의 상태는 어떤가?”
“등의 자상은 아물고 있습니다. 다행히 장기는 다치지 않았으나 갈비뼈 몇 개가 나가서 당분간 좀 불편하실 겁니다.”
“후유증은?”
“잘만 쉬신다면 없으실 겁니다.”
“고생했네. 나가 보게.”
“네, 폐하.”
황궁의가 의료실을 나갔다.
달칵.
문이 닫혔다. 이제 의료실엔 아우라와 루안만이 남았다.
아우라가 천천히 루안에게 다가갔다. 루안의 깨끗한 눈이 그녀를 다정하게 올려다보았다. 그 눈을 보자 아우라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우라는 밀론에서 그를 우연히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부러 아우라를 차갑게 대하던 그 얼굴.
언젠가는 다시 만날 줄 알고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그를 보냈다. 루안이 깨어나지 못했으면 그 일을 두고두고 후회할 뻔했다.
그녀는 몸을 숙여 루안을 안아 주었다. 다친 그에게 무리가 되지 않을 정도로 살짝. 그러나 진심이 닿을 정도로 길게.
“……걱정 많이 했어. 네가 죽을까 봐.”
아우라의 말에 루안이 피식 웃었다.
“나도. 깨어나자마자 걱정 많이 했어. 네가 죽었을까 봐.”
그 심성에 어련했을까 싶었다. 아우라는 루안에게 말했다.
“마음 놔.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
그녀의 말에 루안은 그저 웃었다. 그는 말을 아끼는 것 같았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루안.”
“…….”
“핀은 카를이 가져갔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루안의 눈에 가늘게 눈물이 고였다.
“후우…….”
그는 그제야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뭔가를 말하려다가 말고 마른세수를 했다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한참을 밖만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루안은 핀 생각만 했다. 설마 라이언에게 빼앗긴 건 아닐까. 아니면 아우라가 가져가 일이 잘못된 게 아닐까.
아우라가 의료실에 나타났을 때 그는 비로소 한시름 놓았다. 적어도 그녀가 살아 있으니까. 하지만 차마 그녀에게 물을 수도 없었다. 만약 카를이 그녀 몰래 핀을 가져갔다면 루안도 계속 비밀을 지켜야 했다.
답답함과 불안감이 그제야 씻겨 내려갔다. 황제가 핀을 가져갔음을 아우라가 담담히 밝혔으니…… 상황은 긍정적이었다.
아우라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새 더 마른 듯한 수려한 손이 안타까웠다.
“루안, 라이언에게서 핀을 지켜 줘서 고마워.”
“…….”
“내게서도 지켜 줘서 고맙고.”
그 말에 루안이 아우라를 보았다.
“아우라, 어떻게 된 거야? 말해 줄 수 있어?”
“네가 가지고 있던 핀을…… 처음엔 내가 가져갔어. 그래서 내가 죽으려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
“…….”
“카를을 두고 갈 수가 없었어.”
그 말에 루안은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 아우라의 마음까지도.
예상은 했지만 마음이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아픔보단 아우라가 죽을 마음을 거뒀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루안이 아우라의 머리를 툭 쓰다듬었다.
“잘했어.”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청록빛 눈동자가 예뻤다. 미안한 듯 살짝 내려간 눈꼬리도.
왜였을까. 그 얼굴을 보자 루안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아우라, 이제 내가 어떻게 할까.”
“……루안.”
“내가 널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부디 도울 수 있는 게 있었으면 했다. 할 수 있는 역할이 하나라도 남았으면 했다.
그러나 아우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넌 이제 쉬도록 해. 넌 충분히 나를 도왔어. 이제 나머지 일은 우리가 해 볼게.”
우리.
그 말에 루안이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젠 익숙해져야 한다.
루안은 알 수 있었다. 아우라가 지금 자신에게 진심으로 미안해한다는 것을. 제게 더는 짐을 지울 수 없어 한다는 것도.
하지만 루안도 여기서 물러날 순 없었다.
“아우라. 나는 마이어가의 아들이야.”
“…….”
“마력을 되찾아야 하는 장본인이고.”
“…….”
“그러니까…… 나는 지금 핀 문제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알아야겠어.”
제니아의 왕실을 지켜 온 마이어가. 그리고 마법사.
그것만으로도 루안이 이 상황을 알 자격은 충분했다. 아우라는 핏기 없는 그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좋아. 대신 너와 이야기를 함께 들어야 할 사람이 있어.”
잠시 후, 미나가 의료실 안으로 불려 들어왔다. 아우라가 미나에게 말했다.
“미나. 당장 테인 공작가에 사람을 보내 엘리제 테인 공작에게 입궁 명령을 전해다오.”
“아, 네. 알겠습니다.”
미나가 바쁜 걸음으로 의료실을 나갔다.
엘리제를 기다리는 동안 두 사람은 조금은 어색하게 서로를 보았다. 둘 사이가 예전처럼 돌아가기 위해선 좀 더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
수트라 성 앞에서 전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라이언의 군사들은 죽여도 죽여도 어디선가 계속 나타났다.
하나둘 황제군의 시신이 보일 무렵이었다. 카를은 어느새 꽤 가까이 다가온 수트라 성을 올려다보았다.
‘이대로 가면 리엘이 위험할 텐데.’
생각보다 시간을 너무 많이 소모했다. 이제 작전을 바꿔야 했다. 전면전에서 잠입으로.
“테오!”
“네! 폐하!”
근처에서 카를을 엄호하며 싸우던 테오가 다가왔다.
“여길 조쉬와 네게 맡긴다. 나는 바로 성으로 진입해야겠어.”
“네? 혼자 말이십니까?”
카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안 그래도 머릿수가 모자라는 전투다. 병사를 빼 갈 마음은 없어. 잘 들어, 테오. 난 성으로 들어가서 리엘부터 구출할 거다. 넌 입구를 지키고 있다가 리엘이 나오면 바로 수도로 돌아가.”
“폐하…….”
“리엘을 끼고 전투를 할 순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네가 리엘을 데리고 돌아가. 그리고 이곳 전투는 조쉬에게 일임한다. 지금 즉시 조쉬에게 전하도록.”
카를은 대답조차 듣지 않고 성을 향해 말을 몰았다.
“폐하! 폐하!”
테오가 다급하게 불러 봤지만 소용없었다. 카를은 순식간에 병사들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혼자서 어떻게…….’
따라갈까 싶었다. 어차피 리엘을 구할 거라면 둘이 작전을 수행하면 되니까.
“…….”
하지만 테오는 그러지 않기로 결심했다.
‘데블라에서 수백 번의 전술을 짜셨고,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던 분이야. 믿어야 해.’
테오는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조쉬를 찾기 시작했다.
한편, 카를은 빠르게 수트라 성과 가까워졌다. 길을 내는 건 적을 죽이기보다 훨씬 쉬웠다. 그렇게 미끄러지듯 성 앞에 도착한 카를이 말에서 내렸다.
“누, 누구냐! 물러나라!”
성문을 지키던 병사는 갑자기 나타난 적에 놀라 창을 들이밀었다. 생김새를 보아하니 수트라 사람인 것 같았다. 카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 나라의 황제도 몰라보다니. 알 만하군.”
나라를 위해 싸우지 않는 군사에게 베풀 자비 따윈 없었다. 카를은 검을 높게 들어 그를 단번에 베었다.
끼이익…….
그가 문을 열고 수트라 성으로 들어갔다. 성은 놀라울 정도로 조용했다. 아마 모든 병력을 전투에 내보냈기 때문이리라.
‘이 성을 수호할 의지가 없는 걸지도 모르지. 결국 목적은 황궁일 테니.’
즉, 밖에서 벌어지는 전투의 목적은 황제군의 수를 줄이는 것이었다. 모습을 보이지 않는 실시아 마법사들은 이미 수도로 가 있을 테고.
마법사 생각을 하니 카를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서둘러야겠군.’
그는 성의 어둠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