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30화
수트라 지역에 도착한 라이언은 가장 먼저 군사를 확보했다. 실시아 땅에 대기하고 있던 그의 군사들이 빠르게 모였다.
그들이 수트라 성을 탈환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수트라 성에 주둔하는 황실군은 황제군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라이언의 군사들은 강했다.
“후우…… 드디어 내 집에 돌아왔군.”
라이언은 알현실 의자에 털썩 앉았다. 사용인과 신하들은 이미 황실군에 의해 쫓겨나거나 죽고 없었다. 이 큰 왕궁에는 라이언과 신디온을 비롯한 군대뿐이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그의 목적지는 처음부터 황궁이었으니.
“전하.”
신디온이 알현실로 들어왔다. 간밤의 여정이 고됐는지 그의 안색이 썩 좋지 않았다.
“아, 신디온. 고생했어. 리엘 그 왈가닥을 몰래 데려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라이언 역시 피곤하다는 듯 손을 설레설레 저었다. 신디온이 고개를 숙여 치하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자아- 아직 늘어질 때는 아니고, 빨리 일을 처리해야지. 먼저 우리 군사들과 이야기를 좀 나눠야겠군.”
라이언은 으쌰 하고 기합을 넣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가 알현실 밖으로 나가자 신디온이 따라붙었다.
“군사들은 성 뒤편에 모여 있습니다.”
“그래. 신디온, 리엘은 어때?”
“제 연구실에 계십니다.”
“정말 ‘계셔’?”
라이언이 짓궂게 물었다. 신디온이 민망한 듯 시선을 피했다.
“자꾸만 도망을 가려고 하셔서…… 일단은 가둬 놓았습니다.”
그 말에 라이언이 피식 웃었다.
“잘했어. 궁의 마법사라는 게 그래. 마법만 잘해서는 영 쓰임을 받지 못하지. 적재적소에 적절한 판단을 해야 해. 때로는…….”
“…….”
“주인이 아닌 황족을 거칠게 다룰 줄도 알아야지.”
“……명심하겠습니다.”
“약은?”
“도착하자마자 끓이기 시작했습니다. 완성하려면 시간이 좀 걸립니다.”
“좋아. 서두르도록 해.”
라이언은 신디온과 함께 왕궁의 뒤편으로 갔다. 온실을 지나 둔덕을 오르자 대기하고 있는 군사들이 보였다. 아우라가 이전에 보았을 때보다 수가 더 늘어나 있었다.
“저희가 수트라를 비운 사이 마물이 많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하나하나 죽이는 건 부담이 됐는지 마법사들이 급한 대로 저쪽 덤불 안에 몰아넣은 상황입니다. 결계를 쳐 놨으니 함부로 덤불 밖으론 나오지 못할 겁니다.”
신디온이 낭떠러지 아래의 덤불을 가리켰다.
“그러니 절대 덤불로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마물 수백 마리가 들끓고 있으니까요.”
“알았어.”
라이언이 대강 대답했다. 그는 군사들을 멀거니 내려다보며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전하?”
신디온이 그를 불렀다.
“신디온, 나는…… 나는 항상 이 순간을 꿈꿨지. 내가 내 힘으로 황궁에 도전장을 내미는 순간을. 그 빌어먹을 금발 족속들에게…….”
라이언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실시아 핏줄의 힘을 보여 주는 날을 말이야.”
순간 신디온은 소름이 끼쳤다. 그가 평생을 안고 살았던 증오가 지금에야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뭐, 내 조카님이 그 금발들을 모조리 다 쓸어 줄 줄은 몰랐지만.”
“…….”
“그렇다고 해서 황좌를 그 천한 놈에게 줘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
신디온은 질문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순간, 오랫동안 안고 있던 질문을 꺼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전하, 그렇다면 핀은…… 대체 무슨 연유로 해제하시려는 겁니까?”
그가 느끼기에 핀과 황좌는 관계가 없었다. 이 군대를 이끌고 황궁을 칠 거라면 일찍이 그렇게 했어도 됐는데. 왜 핀 때문에 그토록 먼 길을 돌아갔을까.
라이언이 대답했다.
“핀의 봉인을 해제하지 못한다고 해서 황좌를 못 얻을 것도 없지. 하지만…….”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눈빛이 허공에 머물렀다.
“핀에는 내 목숨이 달렸어.”
“그, 그게 무슨 뜻입니까?”
라이언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신디온.”
“예.”
“군사들에게 명령해. 당장 황궁을 향해 진군하라고.”
“예! 전하.”
“황궁으로 가는 길에 황실군이나 황제군을 만나게 될 거다. 목숨을 아끼지 말고 싸우라고 해.”
신디온은 당황했다.
“전하, 황실군은 그렇다 쳐도 황제군의 전력은 너무 강합니다. 수도에 실시아 마법사들이 대기하고 있으니 그들과 연합하기 전까지는 전투를 피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아니. 말했잖아. 목숨을 아끼지 말라고. 저 병사들은 죽어도 돼. 저들의 역할은 황제군의 전력을 약화하고 발을 묶어 두는 거다. 우리의 주무기는 어디까지나 마법사야.”
“…….”
“리엘이 약을 먹으면 우리도 황궁으로 간다. 물론 마법사들을 데리고.”
신디온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저 많은 군사를 그저 방패막이로 쓰고 버린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나도 언젠가 방패막이가 되어 죽는 게 아닐까.’
라이언이 신디온의 표정을 보고 픽 웃더니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런 표정 하지 마. 나도 마법사 귀한 줄은 안다고.”
“아……. 저는 그냥…… 피곤했나 봅니다. 어서 가서 약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래, 가 봐.”
라이언은 성을 향해 슬쩍 턱짓을 했다. 신디온이 바쁜 걸음으로 둔덕을 내려갔다.
찬 바람이 강하게 불어오고 있었다. 라이언은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작년에 황후 대관식에 갔던 게 겨울이었던가.’
그로부터 거의 1년이 지났다. 시간은 참 빨랐다.
‘다시 겨울이로구나.’
그리고 겨울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기도 했다.
***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평야를 가득 채웠다. 선봉에 선 카를의 머리칼이 제멋대로 날렸다.
그의 뒤로는 테오와 조쉬가 따라오고 있었다. 황위에 오른 후 두 참모 모두 전투에 투입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실 카를은 이번엔 테오를 두고 올 생각이었다. 물론 라이언의 군사 수를 추정할 순 없는 상황인지라 병력 하나하나가 소중했다. 하지만 황궁에 참모 하나 남겨 두지 않을 순 없었다.
그런 그를 설득한 건 아우라였다. 헤어지기 직전, 서재에서 그녀는 그에게 말했다.
“황제군 병력을 모두 데리고 갈 거지?”
“응. 황실군은 황궁을 수비할 거야. 그리고 테오도 남을 테니 걱정하지 마.”
“테오를? 왜? 테오는 중요한 병력이잖아.”
지금이야 테오가 보좌관이라지만, 그 역시 데블라 정벌의 영웅이었다.
“내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이곳의 일을 대신 봐줄 사람이 필요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말에 아우라의 얼굴이 굳었다. 카를은 괜한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덤덤한 눈빛으로 말했다.
“테오를 데려가. 황궁 일은 내가 맡을게.”
“……네가?”
“응. 그러니 날 믿고 다녀와.”
카를은 망설였다. 그녀의 행정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방금까지 죽을 각오를 했던 사람에게 일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런 카를의 마음을 안다는 듯이 아우라가 그의 팔을 꽉 잡았다.
“어서. 나도 널 믿고 있을 테니까.”
그때 잡은 아우라의 손길이 아직도 팔에 남은 것 같았다. 자신을 믿는다고 말했던 그 목소리도.
카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믿으라고 했으니 믿는 수밖에.’
다그닥! 다그닥!
카를이 말의 속력을 높였다. 불어오는 칼바람 하며 뒤따라오는 두 명의 참모 하며 마치 데블라로 다시 돌아간 듯했다. 황제가 아닌 전사였던 그때로.
그리고 전투는 생각보다 빨리 시작되려 했다.
저 멀리 개미 떼 같은 군대가 보였다. 카를은 속력을 멈추지 않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이 매단 깃발은 분명히 눈꽃 모양을 하고 있었다.
카를은 말 고삐를 거칠게 잡았다.
“전군 정지!”
우렁찬 외침에 병사들이 급히 멈춰 섰다. 카를이 뒤를 돌았다. 병사들은 추위에 질린 듯 얼굴들이 벌겠다.
“잘 들어라! 저 앞으로 수트라와 실시아의 군사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그 어떤 협상이나 선전 포고도 없이 그대로 말을 달려서 친다.”
병사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데블라에서 맛봤던 승리의 쾌감. 그런 것들을 다시 느끼고픈 설렘에 가까웠다.
“너희의 전투는 살육이 아닌 제국의 안전을 위한 제물이다! 그 긍지를 잊지 말고 목숨을 바쳐라! 전투의 끝은 저들이 전멸할 때다! 물론 우리 군의 전멸은 있을 수 없다. 알았나!”
“네!”
“그럼…… 간다!”
카를이 말을 달렸다. 그를 따라 병사들이 전속력으로 따라붙었다. 적군 선봉들의 이목구비가 어렴풋이 보일 때였다. 카를이 뒤를 슬쩍 돌아 테오에게 손짓했다. 테오가 온 힘을 다해 뿔피리를 불었다.
우우우웅!
이윽고 테오가 외쳤다.
“궁수!”
후방 병사들이 일제히 말을 멈추고 하늘을 향해 비스듬히 활을 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화살들이 적군에게 쏟아졌다.
“억!”
“어억…….”
그들이 낙엽처럼 말에서 쓰러졌다. 카를이 이번엔 조쉬에게 손짓했다. 조쉬가 검을 높이 들며 외쳤다.
“창병! 좌우로!”
선두를 달리던 창병들이 양옆으로 벌어졌다. 그렇게 나뉜 창병들이 서서히 적군을 향해 좁혀졌다.
남은 건 카를과 뒤따르는 검사들이었다. 카를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적군을 살폈다. 온몸을 두른 모피, 정돈되지 않은 매무새와 수염들. 제국의 손길이 닿은 수트라의 군사라고는 절대 볼 수 없었다.
‘실시아의 용병 놈들이군.’
그들의 전투는 야만족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큰 덩치와 힘으로 상대를 무작정 몰아붙이는.
‘힘 싸움을 하면 우리 군이 불리해. 단번에, 빠르게 끝내야 해.’
카를은 검을 검집에 찔러 넣더니 등에 매달고 있던 창을 꺼냈다. 적군의 선봉이 더욱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야아아악!”
적군의 선봉이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부웅- 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력했지만 움직임이 무거웠다. 카를은 여유롭게 그의 창을 피했다.
헛손질을 한 그가 채 허리를 펴기도 전이었다.
푹.
카를의 창이 뒤에서 그의 왼쪽 가슴을 관통했다.
“어억…….”
그 간단한 승리는 황제군에게 소리 없는 귀감이 되었다. 전면전을 피하고 기술로 승부할 것. 카를은 그 명령을 몸소 보여 준 셈이었다.
한편 카를은 고개를 들어 적군을 살폈다.
‘……까마득하군.’
적군은 정말 개미 떼처럼 저 멀리 수트라 성까지 이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