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29화
아우라는 카를의 품에 안겨 한참을 울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자신의 국민이 힘을 잃고 죄 없는 아이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결국 자신은 이 품을 선택했다. 그 모든 의무를 버리고.
“아우라.”
카를이 그녀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그의 목소리가 살짝 잠겨 있었다.
“잘 들어. 해결 방법을 찾았어. 핀의 봉인을 해제할 방법을.”
“……뭐?”
“그러니 날 믿고 기다려. 며칠…… 며칠이면 돼.”
“그 방법이라는 게……! 혹시 리엘을…….”
“리엘과는 상관없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카를이 바닥에 있던 핀을 쥐었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그의 팔을 잡았다. 카를은 그런 아우라를 달래듯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아우라.”
그의 말에 마법처럼 아우라의 손에 힘이 빠졌다. 그러나 그녀는 일말의 이성을 붙잡고 그에게 물었다.
“그 방법이라는 게 대체 뭔데?”
카를이 그녀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였다. 이윽고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카를을 보았다.
“……말도 안 돼. 거짓말.”
“지금은 그렇게 들리겠지. 나도 오늘 아침에야 확실한 증거를 얻었어. 네게도 설명하려 했는데…… 네가 침실에서 사라져서 기회를 놓쳤어.”
카를이 다시 핀을 가져가려 했다. 그러나 아우라는 여전히 그의 팔을 꽉 잡고 있었다. 핀에 대한 그녀의 집념이 쉽사리 사라질 리 없었다.
“아우라. 수트라로 이걸 가져가야 해. 그래야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어.”
아우라는 혼란스러웠다. 그가 한 말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만약 그녀를 살리고 싶어서 그가 거짓말을 하는 거라면? 이대로 핀을 내어 줘도 되는 걸까.
“아우라.”
카를이 말했다.
“한 번만 날 믿어 봐.”
그 말에 아우라는 입술을 꽉 물었다. 많은 고민과 갈등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다. 결국 선택지는 두 개였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
그녀는 결국 카를을 놓았다.
카를이 품에 핀을 챙겼다. 칼을 치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괜찮아? 다친 곳은?”
그의 물음에 아우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팔찌를 다시 아우라의 손목에 채워 주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젠장…….”
“…….”
“좀 더 곁에 있어 주고 싶지만 리엘 때문에라도 당장 수트라로 출발해야 해. 네 시녀장을 불러 줄게. 너무 많이 울었으니까 당분간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어. 알았지?”
아우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를이 일어나려 할 때였다. 아우라가 그의 소매를 잡았다.
“몸조심해.”
“……그래.”
카를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힘없이 앉아 있는 그녀를 한 번 보고는 뒤돌아 갔다.
그의 발소리가 점차 사라졌다. 긴장이 풀린 아우라가 가는 숨을 길게 내뱉었다.
“……하…….”
무슨 말이 오고 간 건지, 또 무슨 마음이 오고 간 건지.
날 선 원망을 툭툭 뱉는 그 걱정되어 죽겠다는 얼굴. 그 얼굴을 봤을 때 그녀는 깨달았다. 카를이 자신을 살고 싶게 한다는 것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마음을 더 외면할 힘도 없었다. 감정에 북받쳐 온갖 말을 다 한 것 같은데. 그 두서없는 말들을 카를은 제대로 알아들었을까.
뒤늦게 걱정이 밀려왔다. 군사를 몰고 수트라로 간다는 건 출정한다는 뜻이었다. 상대는 한때 그 땅의 주인이었던 대공. 위험하다면 위험한 여정이었다.
아우라는 두려워졌다. 마치 북쪽 탑에 다시 갇힌 것만 같았다. 카를이 영원히 돌아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또 혼자 남겨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게다가 이제 자신에겐 핀조차 없는데.
아득한 불안과 무력함. 그런 것들이 아우라를 약해지게 했다. 그녀는 몸을 한껏 웅크렸다.
‘무서워…….’
저벅, 저벅, 저벅…….
서재 입구에서부터 발소리가 들려왔다.
‘미나인가.’
발소리는 아우라의 앞에 멈추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어?”
그곳엔 카를이 서 있었다.
“왜…….”
왜 돌아왔어? 그렇게 물으려 할 때였다. 별안간 그가 확 다가와 아우라의 얼굴을 잡고 입을 맞췄다.
갈급하게 파고드는 숨결에 놀란 것도 잠시였다. 이윽고 두 입술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머금었다. 서로가 서로의 앞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듯이.
카를이 아우라를 끌어안았다.
“나도 사랑해.”
“!”
“사랑해, 아우라.”
아우라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카를이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곤 다시금 있는 힘껏 안았다.
“돌아올게. 다 괜찮을 거야. 그러니까 다른 생각 하지 말고 기다려.”
“……아.”
아우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 말은…….’
“절대 널 죽게 두지 않을 테니까.”
아우라는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돌아올게. 기다려. 괜찮을 거야. 절대 널 죽게 두지 않아.
그녀가 북쪽 탑에 있었을 때, 매일 이런 말들을 꿈꿨다. 언젠가 카를이 나타나 그렇게 말해 주기를 바라며.
아우라는 비로소 모든 게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마음 놓고 그를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환한 아침 햇살이 어느새 서재를 비추고 있었다.
***
덜컹, 덜컹…….
마차가 정신없이 덜컹댔다. 마차 의자에 웅크리고 누워 있던 리엘이 잠에서 깼다.
“음…….”
무서운 꿈을 꾼 것 같았다. 낯선 남자가 자신의 입을 콱 막고는 무서운 말로 위협하는 꿈.
‘아침으로 케이크를 먹어야지. 그리고 오랜만에 황후 폐하한테 놀러 갈 거야. 황후 폐하와 말하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뒤척일 때였다. 문득 잠자리가 낯설다는 느낌에 리엘이 눈을 떴다.
‘……어? 여기가 어디지?’
낯설고 낮은 천장. 창밖으로 보이는 움직이는 풍경. 흔들리는 침대? 아니, 의자. 리엘이 아는 한 이곳은 마차 안이었다.
리엘이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자신을 마주 보고 있는 이를 보곤 깜짝 놀랐다.
“할아버지!”
“일어났니?”
라이언이 입술을 길게 늘이며 웃었다.
“할아버지이-!”
리엘이 라이언에게 달려가 안겼다. 라이언이 긴 팔로 리엘을 안아 주었다.
“그새 또 많이 컸네, 우리 손녀.”
“헤헤…….”
“아직 멀었지만.”
묘한 말에 리엘은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잊고 있던 사실을 기억해 냈다.
몇 달 전쯤 황후 폐하와 이궁에서 함께 지냈을 때였다.
책을 보던 리엘이 지루한 얼굴로 기지개를 켰다. 여느 때처럼 침대에 앉아 있던 아우라가 고개를 쓱 돌렸다. 리엘은 아우라에게 무슨 말이건 하고 싶었다. 황후 폐하의 웃음을 언제 마지막으로 본 건지 기억도 안 날 지경이었으니까.
“내 친구들이 오면 황후 폐하도 재미있어할 텐데.”
“친구들?”
황후 폐하가 드디어 관심을 보였다. 리엘이 신나서 말했다.
“응. 별궁의 유모랑 운동 교사랑 또…… 아! 할아버지도 내 친구야.”
할아버지. 그 말에 아우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리엘, 할아버지라면…….”
“라이언 대공 말이야.”
“리엘.”
아우라가 리엘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목에는 손수건이 묶여 있었다.
“왜, 왜 그래?”
갑자기 진지해진 분위기에 리엘이 겁을 먹었다. 아우라는 리엘에게 말했다.
“어쩌면 할아버지가 남들 몰래 네 앞에 나타날지도 몰라. 함께 수트라에 가자거나 황궁을 나가자고 말할 수도 있어.”
“응! 그럴 수도 있어. 수트라에 데려다준다고 말했거든.”
아우라가 고개를 저었다.
“리엘. 절대, 절대 그를 따라가선 안 돼.”
“……응? 왜?”
“설명은 나중에 이궁에서 나가면 해 줄게. 지금은 그냥 내 말을 들어줄래?”
“할아버지와…… 놀지 말라고?”
“그래. 음…… 리엘이 약속해 주면 내가 더 빨리 나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말?”
“그럼. 정말.”
“알았어. 그럼 약속할게.”
리엘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아우라가 그 작은 손가락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황후 폐하와 약속했는데. 어쩌지?’
리엘이 조심스레 물었다.
“할아버지가 절 데려온 거예요?”
“뭐, 그런 셈이지.”
“황궁에서요?”
“응.”
리엘이 창문으로 지나가는 황량한 풍경을 보았다. 잠옷 사이로 찬 바람이 스미는 것 같기도 했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
“할아버지의 성에.”
“수트라에요?”
“기억하고 있구나. 기특하게.”
리엘이 침을 꿀꺽 삼켰다.
황후 폐하와의 약속. 한밤중에 자신을 위협했던 남자. 어떠한 예고도 없이 자신을 수트라로 데려가려는 할아버지.
비록 어리지만 리엘도 일이 뭔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라이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저 멀리 수트라 성이 희미하게 보였다.
“배고프지 않니?”
“……아……니요.”
긴장한 듯한 리엘의 반응에 라이언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수트라에 도착하면 할아버지랑 맛있는 걸 먹자.”
“맛있는 거요?”
“그래. 리엘이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했던 과자를 주지.”
그렇게 말하는 라이언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리엘이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아…… 저는 괜찮…….”
툭 하고 리엘의 등이 의자에 마차의 문에 닿았다.
“리엘.”
라이언의 얼굴엔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가 손을 뻗어 리엘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그거 아니? 사실 이 할아버지는…… 카사 집안의 금발을 아주 싫어한단다.”
“네? ……왜요?”
“저들끼리만 찬란하게 빛나는 색이거든.”
리엘의 눈이 커졌다. 라이언이 리엘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움켜쥐었다.
“아주 예쁘고, 증오스럽지.”
라이언이 리엘의 머리카락을 쥔 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꺄악!”
리엘이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리엘의 눈앞에 라이언의 푸른 눈이 빛났다.
“그러니 리엘. 얌전히 있어야지? 할아버지가 리엘까지 싫어하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