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28화
카를은 바쁘게 황후의 방을 향했다. 그러던 중 카를을 찾고 있던 조쉬와 만났다.
조쉬의 보고를 들은 카를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아우라가 핀을 가지고 사라졌다고?”
조쉬는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카를이 폭발하듯 외쳤다.
“테오건 너건 참모란 놈들이! 대체 다들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조쉬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애써 침착하게 보고를 이어 갔다.
“칼을 쥐고 계셔서 말릴 수 없었습니다. 뒤쫓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으셔서 사라지신 후에야 기사를 풀었습니다. 본궁 출입구를 엄격히 막은 상황이니…… 아직 본궁에 계실 겁니다.”
그리고 그는 한 장의 종이를 카를에게 내밀었다.
“이걸…… 황후 폐하의 방에서 발견했습니다.”
카를은 종이를 받아 읽었다. 그것은 아우라가 남긴 유언장이었다. 그것을 훑듯이 읽은 카를이 별안간 실소를 지었다.
“하.”
그는 아우라의 유언장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바닥에 조각난 종이가 눈처럼 쌓였다.
“웃기지 말라고 해.”
누구를 향하는지도 모를 말이었다. 불안과 냉소 그리고 배신감. 그런 것들이 카를의 눈에 뒤죽박죽 담겨 있었다. 제가 알던 카를이 아닌 것 같아서 조쉬는 적잖이 놀랐다.
“……폐하?”
“기사들을 통솔해서 황후를 찾아. 나 역시 찾아볼 테니.”
카를은 그렇게 통솔권까지 넘기고는 복도를 되돌아 걸었다. 가만히 서서 보고를 받고 있다간 답답함에 심장이 터질지도 몰랐다.
저벅, 저벅, 저벅…….
그의 발소리가 복도에서 어지럽게 울렸다. 카를은 이를 꽉 물었다.
‘용서하지 않을 거야. 이번에는 정말 용서하지 않을 거야.’
죽지 않겠다는 약속. 함께 제니아에 가자는 약속. 자신이 해 준 음식을 다시 먹어 주겠다던 약속.
그 모든 약속은 결국 다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이번에도 자신을 또 속였다. 잡을 수도 없는 곳으로 도망치기 위해서.
‘떠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게 해 놓고선, 그렇게 믿게 해 놓고선…… 어떻게…….’
그 말뿐인 약속에 몇 번이나 바보 같은 희망을 걸었다. 진심도 아닌 웃음에 몇 번이나 마음을 놓고 말았다.
그는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아니, 지금도 그녀에게 묻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내가 뭘 더 어떻게 해야 하는데?’
아우라가 남긴 유언장은 또 얼마나 잔인했는지.
「카사의 황제는 제니아의 국토를 돌려주고 독립을 보장한다는 나와의 약속을 지킬 것.」
그것이 아우라가 카를에게 남긴 유일한 말이었다. 단 한 번이라도 그를 남편으로 생각했다면 이럴 순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무감하게 마지막 인사를 남길 순 없었다.
‘그놈의 제니아, 제니아, 제니아. 그 넘치는 연민의 한 조각조차 왜 내게는 줄 수가 없는 건데? 넌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나는, 아우라…… 정말, 너 없으면 안 돼.’
그 말을 했을 때 카를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었다. 자존심이건, 신념이건, 그 어떤 소중한 것이건 그녀에겐 다 바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네가 죽으면 나도 죽을 거라고. 그런 유치한 오기까지 입 밖으로 내뱉진 못했지만.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얼마나 그를 따뜻하게 안아 줬는지. 그래서 그도 그녀가 그 말의 의미를 알았다고 생각했다.
‘몰랐겠지. 알았다면 이럴 리가 없어.’
배신감이 해일처럼 몰아쳤다.
‘아니면 끝까지 모른 척하겠다는 건가.’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번에 다시 붙잡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를을 이번에야말로 평생 증오한다고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 나도 너를 더는 용서하지 않아.’
카를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몸에 힘이 쫙 빠져나갔다. 그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아니…… 아니야.’
그가 고개를 저으며 이마를 짚었다. 눈앞이 캄캄하고 암담했다.
이런 분노와 오기를 부리자는 게 아니었다. 사실 몇 번이고 용서할 수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녀가 계속 그를 속이더라도, 도망친다고 하더라도. 다 괜찮았다. 용서할 수 있었다.
살아만 있어 준다면.
카를이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어두컴컴한 잔상이 눈앞에 일렁였다. 그는 시선을 들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정신 차려.”
무작정 찾아다니는 건 도움이 안 됐다. 아우라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녀는 왕녀이자…… 황후였다. 아무 곳에서 죽어 모두에게 그 참담한 시신을 보일 사람이 아니었다.
‘은밀한 곳에서 일을 치르려 할 거야. 그리고 쉽게 병사들이 들이닥치지 못할 곳.’
“……하지만 결국 내가 발견할 수 있을 곳.”
카를이 중얼거렸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르는 곳이 있었다.
그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발길이 닿은 곳은 본궁의 중앙 계단이었다. 계단에는 이제 막 떠오르는 햇빛이 칸칸에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그 햇빛을 밟으며 위로 올라갔다.
그가 도착한 곳은 제 방의 앞이었다. 기사들이 무의식적으로라도 뒤지지 못하는 곳.
카를은 가장 먼저 침실 문을 열어젖혔다.
“폐하?”
하지만 시녀만이 침대 시트를 정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샛문을 열고 들어가 집무실로 갔다. 집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개인 서재가 남아 있었다. 카를이 서재의 문고리를 잡았다.
절걱.
문은 잠겨 있었다. 자신이 문을 잠갔는지 아닌지 제대로 기억이 안 났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었다. 그가 그녀의 앞에서 몇 번이나 이곳의 열쇠를 서랍에서 꺼냈다는 것.
카를이 서랍을 열었다. 이곳에 항상 뒀던 열쇠가 없었다.
“……제길.”
아우라가 있는 곳을 찾았다는 안도감. 그곳의 문이 잠겼다는 답답함. 그런 것들이 뒤섞여 치밀어 올랐다.
그는 망설임 없이 검을 빼 들었다. 기합도 없이 있는 힘껏 문고리를 내려쳤다.
쾅!
문고리가 떨어졌다. 카를이 있는 힘껏 문을 찼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아우라!”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냉랭한 아침 공기만이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카를이 서둘러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아우라가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던 입구 쪽을 지나 책장을 하나씩 스쳐 갔다. 없고, 없고, 또 없었다. 그의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그리고 서재의 가장 안쪽에 도달했을 때였다.
쨍강.
그의 검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서재 구석에서 아우라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앞에는 핀과 작은 칼을 둔 채.
“……하아…….”
카를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이 아득할 정도로 말로 설명 못 할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는 터덜터덜 그녀의 앞으로 갔다.
들썩이는 작은 어깨. 희미한 울음소리. 자신이 선물해 준 팔찌를 꽉 쥐고 있는 손. 팔찌를 벗겨 낸 바람에 드러난 손목의 흉터.
카를은 울컥했다. 이토록 안도한 주제에 화가 났다. 아니, 아우라가 살아 있어서 그녀를 원망할 여유가 생겼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그가 툭 내던지듯 물었다.
“왜 여기서 울고 있냐고.”
아우라가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으려 했다.
“……흑…… 읏, 흑…….”
그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대체 왜 우는 것일까. 모든 준비를 다 해 놓고, 그 모든 마음을 배신해 놓고 왜 고작 울고만 있는 걸까.
카를이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그녀의 양 손목을 잡고 얼굴에서 억지로 떼어 냈다. 얼굴이고 손바닥이고 눈물로 엉망진창이었다.
아우라가 새빨갛게 물든 눈으로 카를을 보았다. 카를은 들끓는 감정을 애써 무미건조한 시선 뒤로 숨겼다.
“내게 그렇게 많은 거짓말을 해 놓고, 그 모든 약속을 결국 다 어길 생각이었으면서…… 정말, 정말 수도 없이 날 속여 놓고.”
카를의 말끝이 떨려 왔다. 목까지 치밀어 오르는 뭔가가 자꾸만 눈가를 뜨겁게 했다.
그는 비웃듯 따졌다.
“단 한 번이라도 나에게 진심으로 웃어 준 적도 없으면서.”
“…….”
“네 그 잘난 왕녀의 긍지만을 위해서 지금까지 달려왔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울어.”
“……흐읏.”
“왜? 무서워? 막상 용기가 안 나?”
날 선 말이 아무렇게나 튀어나왔다. 결국 용서할 걸 알기에 단번에 용서가 안 됐다. 아아, 정말 널 어쩌면 좋을까. 카를은 속으로 몇 번이나 자신에게 물어야 했다.
“카를…….”
그녀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카를은 대답 대신 그녀의 손목을 더 꽉 잡았다.
“네가 나를…….”
아우라가 고개를 숙였다. 투둑 하고 바닥으로 눈물이 떨어졌다.
그녀는 어젯밤 침대에서도 카를에게 같은 말을 했다. 잠투정 사이로 진심을 내뱉듯이.
‘네가 나를…….’
아우라의 울음이 순간 멎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시간도 잠시 멈춘 듯했다. 그녀의 젖은 눈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가 나를…… 살고 싶게 해, 카를.”
지금 뭐라고? 카를은 되묻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못 견디겠다는 듯 다시 고개를 숙였다.
“네가, 네가 자꾸…… 나를, 너무나도…….”
아우라의 두서없는 말들이 울음에 뭉그러졌다.
카를이 그녀의 손목을 놓고 젖은 뺨을 감쌌다. 그렇게 맞춘 눈에서 여지없이 눈물이 흘러 그의 손을 타고 내려왔다.
“어떡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카를.”
카를이야말로 그랬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바라만 보았다.
“못 하겠어, 카를. 널 사랑해. 널 두고 도저히……!”
그녀는 카를에게 매달리듯 그의 옷깃을 양손으로 쥐었다.
“리엘이 나 때문에 죽을지도 모르는데…… 나만 죽으면 모든 게, 정말 모든 문제가 풀릴 테고, 그게 내가 가야 할 길인데…… 못 하겠어. 분명히 할 수 있었는데, 북쪽 탑에서는 했는데, 이제는 못 하겠어. 자꾸만 네가…….”
“……아우라.”
“네가 나를…… 살고 싶게…….”
아우라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카를이 그녀의 등을 끌어당겨 안았다. 그 역시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카를은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왜 몇 번이고 그녀에게 속아 주었는지. 또 용서해 주었는지.
네가 나를 살게 한다는 말.
그 말을 듣기 위해서 그랬던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