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27화
창밖으로 어둠이 걷히고 있었다. 아직 해가 뜨진 않았지만 흐릿한 빛이 침대를 적시기 시작했다.
카를은 결국 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다. 아우라가 완전히 잠든 후에도 그는 좀처럼 침대를 떠나지 못했다.
해결해야 할 것들과 확인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중에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건 아우라였다. 지금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틈을 주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그래도 내내 침대에만 있을 수는 없는 일.
카를은 마지막으로 잠들어 있는 아우라를 확인했다. 새근새근 가는 숨을 뱉어 내는 그녀는 분명 잠든 것 같았다.
카를이 천천히 침대를 벗어났다. 그는 조용히 침실의 샛문을 통해 집무실로 갔다. 예상대로 집무실엔 테오가 기다리고 있었다.
“폐하.”
“쉿.”
그가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로 입술을 가렸다. 그러자 테오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드릴 게 있습니다.”
“알아. 실시아 가계도, 입수했다고 했지?”
“네, 맞습니다.”
테오가 한 부의 서류를 내밀었다.
카를과 아우라가 제니아에 갔던 날, 실시아로 간 원정대가 돌아왔다. 그들은 지하 경매장에서 입수한 실시아 왕가의 가계도를 완벽하게 구해 왔다.
테오는 그것을 카를이 황궁으로 복귀하면 바로 바치려 했다. 그러나 어제는 일이 계속 꼬였다. 저녁에는 밀론에서 핀을 찾아야 했고, 밤에는 카를이 갑자기 아우라와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어쨌거나 잊지 않고 계셨구나. 다행이야.’
카를이 서류를 꺼내 그 내용을 살폈다.
“……됐어.”
“예?”
“이제…… 일을 해결할 수 있겠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쉿.”
카를이 다시금 조용히 하란 신호를 보냈다. 카를이 뭔가를 설명하려 할 때였다. 별안간 한 시종이 달려왔다.
“폐하! 폐하! 큰일 났습니다!”
그의 얼굴을 본 테오가 불길한 느낌을 감지했다.
‘저자는 별궁의 시종이 아닌가.’
테오가 주의를 시켰다.
“목소리를 높이지 마라. 무슨 일이지?”
“간밤에 리엘 전하가 사라지셨습니다!”
시종이 다급한 마음에 큰 소리로 외쳤다. 그때 카를이 손으로 그의 입을 확 막았다.
“목소리를 높이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
시종은 깜짝 놀라 몸을 굳혔다. 카를이 죽일 듯이 그를 쏘아보았다.
“별궁 주위는 다 살폈나? 지하실은? 빼놓은 곳은 없어?”
시종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카를이 손을 떼곤 샛문 문틈 사이로 아우라를 보았다. 아우라는 아까와 같이 잠들어 있었다.
그는 문을 닫고 테오와 시종에게 돌아갔다. 시종이 조심스레 말했다.
“확실합니다. 별궁엔 안 계십니다. 본궁이나 다른 궁으로 가신 흔적도 없고요.”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범인은 한 명뿐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리엘을 필요로 할 사람, 라이언.
“폐하…… 납치 같습니다.”
테오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카를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라이언의 짓이야.”
침묵이 흘렀다. 그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폭풍 전야의 고요를 맛보듯이.
“잘됐군. 안 그래도 수트라에 가려 했는데.”
“군사를 모을까요?”
“그래. 내 전군을 모두 모아.”
“네. 황궁의 북문 앞에서 대기하겠습니다.”
테오가 급히 집무실을 달려 나갔다. 카를이 생각을 정리했다.
‘아우라에게 잘 설명해야 해. 날 믿을 수 있도록.’
믿음. 그런 것들이 우리 사이에 통용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긴 했다. 하지만 요 며칠 아우라가 보인 미소와 상냥한 말투 그리고 그 약속들까지.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한 가닥 희망을 걸어 보게 되었다.
‘날 믿지 못하더라도 어떻게든 설득해 보자. 그래야 핀을 받아서 수트라로 출발할 수 있어.’
그는 그렇게 다짐하면서 샛문을 열었다.
“……아우라?”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다급하게 나간 듯 구겨진 이불, 활짝 열린 침실 문. 그런 것들이 말해 주고 있었다. 그녀가 모든 걸 듣고 말았다고.
***
아우라는 정신없이 뛰고 있었다.
아침이 시작되기 직전, 첫새벽의 황궁은 아직 고요했다. 새벽 당직을 맡은 시종과 시녀들만이 그녀를 보고 흠칫 놀랄 뿐이었다.
“화, 황후 폐하?”
“폐하, 괜찮으십……!”
그들이 물었지만 아우라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리엘이…… 리엘이…….’
리엘이 라이언에게 납치됐다. 라이언이 기어이 그런 짓을 했다.
사실 아우라는 잠들어 있지 않았다. 카를을 안심시키고 싶어 그런 척을 했을 뿐. 그가 정말 잠이 들면 다시 황후의 방으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그렇게 그와 함께 누워 있는 시간이…… 싫지 않았다. 그가 어서 잠이 들었으면 하다가도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하는 모순적인 마음이 들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카를이 조심스럽게 집무실로 나갔고, 잠시 후 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밤에 리엘 전하가 사라지셨습니다!’
눈이 번쩍 뜨였다. 놀라 몸이 굳은 와중에 카를이 그녀를 살피곤 샛문을 닫았다. 아우라는 그제야 일어나 샛문에 귀를 댔다.
침착하게 상황을 확인하는 카를의 목소리. 황궁에 리엘이 없음을 확신하는 시종의 목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테오의 목소리.
‘폐하…… 납치 같습니다.’
‘그렇겠지. 라이언의 짓이야.’
그 말을 듣고 아우라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별궁의 경비는 본궁 못지않게 삼엄했다. 누군가 그 경비를 뚫고 황녀를 납치했다면 아우라에게도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다만 자신은 카를과 있었기에 그 화살을 피했을 뿐.
그리고 그 화살은 아무것도 모르는 작은 아이에게 향했다.
아우라는 미칠 것 같았다. 미칠 것처럼 후회가 됐다.
일주일의 유예 기간을 가지겠다고? 사치스러운 소리였다. 하루만 더 카를과 있겠다고? 자기기만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위험이 가까워지는 걸 알았으면서, 라이언이 나뿐만 아니라 리엘까지 노릴 수 있다는 걸 알았으면서!’
그걸 알면서도 일을 미루고 또 미룬 자신이 용서가 안 됐다.
‘일주일? 하루? 그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란 걸 알고 있었잖아.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리엘이 대신 끌려간 거야.’
답은 하나였다. 리엘에게 큰일이 생기기 전에 어서 끝을 봐야 했다. 왕녀의 긍지까지 갈 것도 없었다. 무고한 아이를 자신 대신 죽게 할 순 없었다.
아우라는 황후의 방 앞에 도착했다. 그 앞은 기사와 시녀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미나가 그녀를 보고 반갑게 외쳤다.
“황후 폐하!”
반면 기사들을 몰고 온 조쉬는 낭패란 얼굴이었다. 미나가 아우라를 보고 놀라 다가왔다.
“폐하, 땀을……! 괜찮으십니까?”
“아무도 들어오지 마.”
아우라는 혼자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장 콘솔 서랍을 열었다.
서랍에는 핀과 칼 그리고 유언장이 있었다. 아우라는 유언장을 꺼내 놓고 핀과 칼을 각각 양손에 쥐었다.
“하아…… 하아…….”
그녀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아차, 문 잠그는 걸……!’
“폐하!”
방에 들어온 이는 조쉬였다. 기사가 이런 식으로 황후의 방으로 들어올 수는 없었다. 그러나 조쉬 역시 앞뒤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아우라가 주머니에 핀을 넣고 칼은 소매에 숨겼다.
그녀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조쉬가 그녀를 잔뜩 경계하며 다가왔다.
“폐하.”
“후우…….”
아우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는 일을 치를 수 없을 것 같았다.
“비키세요, 다들.”
그녀의 단호한 목소리에 조쉬가 움찔했다.
“다들 뭘 하고 있나요? 내 말이 들리지 않습니까?”
기사들은 그녀의 기세에 길을 비켜섰다. 아우라가 그들 사이를 유유히 스쳐 지나갔다.
조쉬가 주먹을 꽉 쥐곤 복도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벌써 저 멀리 걷고 있는 아우라의 앞을 막았다.
“황후 폐하.”
“……조쉬?”
“이번에는 이렇게 못 보냅니다, 폐하.”
“…….”
“저와 함께 황제 폐하께 가 주십시오.”
이 순간 조쉬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아우라는 문득 예전 일을 떠올렸다. 그녀가 카를과 처음으로 밤을 보냈던 날이었다. 몰래 황궁을 나서려던 그녀를 하필 조쉬가 막았었다.
아우라가 대뜸 메스를 제 목에 갖다 댔다.
“저, 전하?”
“소리 낮춰. 한마디라도 더 하면 찌를 테니.”
그녀의 목에서 피가 한 줄기 흘렀다. 조쉬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내가 너 때문에 죽으면 카를이 참 좋아하겠어.”
조쉬는 울 듯한 얼굴로 입을 닫았다. 그는 복종의 의미로 손을 들어 올렸다.
“말 한 마리를 구해 와. 당장.”
“말을 어디서 갑자기-”
“입 다물어.”
그 시절의 조쉬를 떠올리던 아우라가 가만히 웃었다. 확실히 그는 그때보다 강한 기사가 된 것 같았다.
“좋네요. 카를에게 이런 부하가 있어서.”
“…….”
“하지만 비키세요, 조쉬.”
아우라가 소매에서 슬쩍 칼을 꺼냈다. 조쉬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비켜 드릴 수 없습니다.”
“조쉬. 내게 핀이 있어요.”
그의 눈이 번뜩 뜨였다.
“여기서 제가 절 찌르면 전 그대로 말라 죽고 말 겁니다. 기사들이 저를 따라와도 똑같은 결과가 있을 거고요.”
“폐하!”
“그 꼴을 당장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비키세요.”
조쉬는 숨이 턱 막혔다.
황후가 보통내기가 아님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자신이 맞설 상대가 아니라는 것 역시.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대체 어떻게 하면 저렇게 태연한 얼굴로 자기 목숨을 걸 수 있단 말인가.
조쉬가 결국 비켜서 길을 열어 주었다.
“고마워요.”
아우라가 그 한 마디를 남기고 복도를 꺾어 어디론가 가 버렸다. 조쉬는 뒤따르는 기사들에게 외쳤다.
“당장 황제 폐하를 찾아!”
한편, 아우라는 기사들의 계단에 들어섰다.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어디로 가야 내 죽음이 은밀하게 처리될까.’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황후의 시신을 보여 줄 순 없는 일이었다. 그건 카사 황실에 대한 그녀의 마지막 예의였다.
‘카를이 바로 오지 않을 곳, 사람들이 쉽사리 뒤질 수가 없는 곳. 하지만 카를이 그 누구보다 먼저 날 찾아낼 수 있는 곳.’
“……그래. 한 군데 있지.”
아우라는 망설임 없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