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26화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카를의 침실을 비추고 있었다. 카를은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쿵, 쿵, 쿵, 쿵.
등을 통해 그의 간헐적인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이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그녀는 그냥 눈을 감고 잠들고 싶었다. 실제로도 자꾸만 쏟아지는 잠을 참아 내는 중이었다.
아우라는 뒤척이며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가지런한 속눈썹과 우뚝 솟은 콧대, 일자로 다문 입술. 정말 하염없이 보게 되는 얼굴이었다.
아까 카를은 아우라의 방에 왔을 때 그녀가 핀을 가지고 있다는 걸 확신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끝까지 그녀에게 따져 묻지 않았던 건…….
‘한편으론 나를 이해하기 때문이겠지.’
문밖에서 그녀를 부르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했다.
‘제발, 아우라.’
그 절박한 부름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리라는 걸 알면서도.
아우라의 손끝이 그의 뺨을 살짝 쓰다듬었다. 혹여나 깰까 봐 손끝에 스치는 정도로.
이젠 정말 가야 할 시간이었다.
아우라는 조심스레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
그러나 그녀는 카를의 품을 벗어날 수 없었다. 평온한 표정과는 다르게 그녀를 안은 팔 힘은 단단했다.
‘……설마. 자고 있지 않았어?’
그럴 리가 없었다. 새근새근한 그 숨소리를 한참이나 듣고 있었는데.
자면서도 몸에 힘을 빼지 못하는 건 데블라의 후유증일지도 몰랐다. 아우라가 다시 몸을 빼려던 순간이었다.
“!”
카를이 그녀를 확 안았다. 아우라가 눈이 동그래져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검은 눈동자에 달빛이 살짝 빛났다가 사라졌다.
“어딜 가려고.”
“…….”
“말했잖아. 난 너 없으면 안 된다고.”
카를이 천천히 다가와 입을 맞췄다. 밀고 들어오듯 그녀의 입술을 파고드는 숨결과 혀. 그 나긋한 움직임에 아우라가 눈을 반쯤 감았다. 이렇게 달콤한 걸 느끼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카를의 혀가 그녀의 혀를 뭉근하게 문질렀다. 아우라가 그만하라는 듯 그의 가슴을 밀었지만 소용없었다. 그 은근하게 자극적인 움직임은 아우라를 나른하게 만들었다.
아우라의 움직임이 점차 둔해졌다. 그는 마치 그녀를 달래고 재우듯 입술을 부드럽게 머금었다.
쪽. 마지막으로 그가 짧게 입을 맞췄을 때였다. 아우라가 가는 숨을 길게 내뱉었다.
“아아…… 정말.”
그녀가 탄식하듯 말했다. 그의 가슴을 밀던 손이 이제는 그의 옷깃을 꽉 잡고 매달렸다. 그녀는 마치 잠투정처럼 중얼거렸다.
“네가 나를…….”
뭔가를 말하려던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카를을 바라보기만 했다. 카를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곤 다시 끌어안았다.
긴 입맞춤의 여파였을까. 아우라의 숨소리가 점차 가라앉았다.
잠시 후, 카를이 아우라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곤히 자고 있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는 미칠 지경이었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놓았다간 그녀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사막의 모래처럼 형체도 없이.
그래도 한 가지는 해냈다. 아우라를 황후의 방에서 끄집어내는 것.
이젠 그 방을 뒤져 핀을 찾아야 했다. 지금쯤 부하들이 그 일을 수행하고 있을 거였다.
‘조쉬……. 잘 해내야 할 텐데.’
***
황후의 방 앞 복도가 소란스러웠다. 조쉬가 여기사들을 데리고 들이닥친 것이다. 미나가 놀라서 조쉬의 앞을 막아섰다.
“기사단장님, 갑자기 이게 무슨 일입니까? 황후 폐하도 계시지 않는데 어째서……!”
“비키십시오. 황제 폐하의 명령입니다.”
조쉬가 문을 열자 기사들이 우르르 방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방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기사단장님. 여기사들이라고 해도 황후 폐하의 방에 무장한 기사를 들이다니요!”
“황제 폐하의 명령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기사단장님, 이러실 순 없습니다.”
“시녀장님!”
조쉬가 버럭 외쳤다. 미나가 움찔했다. 조쉬는 나지막이 말했다.
“여기서 더 막으시면 반역입니다.”
조쉬가 이렇게 말하면 미나도 별수 없었다. 그녀는 결국 시녀들을 이끌고 구석으로 물러났다.
조쉬는 심각한 얼굴로 방을 둘러보았다. 귀족의 방만도 못하게 물건이 없어서 이상할 지경이었다. 아우라가 이미 신변을 정리해 뒀기 때문이었다.
기사들이 옷장이며 서랍장을 열었다. 그들 중 한 기사가 콘솔 서랍을 열려 했다. 서랍이 덜컥거렸다.
“단장님, 콘솔이 잠겼습니다.”
조쉬가 미나에게 물었다.
“콘솔의 열쇠를 갖고 계십니까?”
미나는 난감한 듯 눈만 동그랗게 뜨고 조쉬를 보았다.
“열쇠를 주시지 않으면 부수겠습니다.”
조쉬가 딱 잘라 말했다. 그냥 하는 말은 아닌지 직접 콘솔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미나가 후다닥 따라붙었다.
“여, 열어 드리겠습니다. 귀중품을 두는 곳인지라 열쇠는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열겠습니다. 열쇠를 주십시오.”
조쉬가 손을 내밀었다. 미나가 마지못해 콘솔 열쇠를 주었다. 그는 열쇠로 콘솔의 서랍을 열었다.
드륵.
서랍이 그 내부를 보였다. 그러나 그 안엔 작은 칼만 하나 굴러다닐 뿐이었다. 조쉬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여긴 없는 모양이군.’
“다들 찾지 못했나? 수정구를 찾아야 한다!”
조쉬가 기사들에게 외쳤다. 그러나 기사들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응접실을 봐야겠습니다.”
조쉬가 미나에게 말했다. 그래도 미나가 이 방을 책임지는 시녀장이니 최소한의 구색은 맞추려는 듯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미나가 체념 조로 말했다. 조쉬가 기사들을 데리고 우르르 응접실로 갔다. 미나가 시녀들에게 말했다.
“응접실로 가서 기사분들을 도와라. 빠르게 수색하고 나가실 수 있도록.”
시녀들이 차례로 응접실로 향했다. 혼자 남은 미나는 주위를 살피더니 응접실로 향하는 샛문을 슬쩍 보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수정구 하나와 두 번 접힌 종이를 꺼냈다.
‘비밀이나 사람이나…… 뭔가를 지키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니까.’
그 말을 들었을 때 미나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걸 느끼고 있었다. 반지를 주는 아우라의 손이 유난히 떨리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미리 콘솔을 열어 그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거기엔 수정구와 종이 하나가 있었다.
미나는 콘솔 서랍에 그것들을 넣고 조심히 서랍을 닫았다. 그리고 슬쩍 응접실로 가서 시녀들 무리와 섞였다.
조쉬와 기사들은 응접실에서도 이렇다 할 걸 찾지 못한 듯했다. 조쉬가 난감한 듯 입술을 씹었다.
‘반드시 찾아내라고 하셨어.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 한다.’
그의 시선이 시녀들에게 닿았다. 정확히는 그녀들의 풍성한 치마에.
“시녀장님.”
“네, 기사단장님.”
미나가 침착하게 앞으로 나섰다. 조쉬는 마른세수를 하곤 그녀에게 말했다.
“용서하십시오. 시녀장님을 비롯해서 시녀분들의 몸수색을 하겠습니다.”
뒤에 서 있던 시녀들이 놀라 웅성거렸다. 그녀들도 어쨌건 귀족들인데 몸수색이라니.
미나의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그러시죠.”
여기사들이 미나를 침실의 가림막 안으로 안내했다. 그 안으로 들어가며 미나는 기도했다. 어서 이 모든 소란이 끝나길. 제발 이들이 수정구를 발견하기 전에 아우라가 돌아와 주기를.
***
그 시각.
신디온은 황후의 방 발코니에서 안의 일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기사들이 들이닥쳐 한바탕 난리를 치더니 이제는 시녀들의 몸수색을 하고 있었다.
라이언은 그에게 명령했다.
‘가장 좋은 건 황후와 핀을 동시에 얻는 거다. 황후의 방에 잠입해서 어떻게든 그녀를 끌고 와.’
하지만 그 계획은 이미 어그러진 듯했다. 황후는 방에 없고, 기사들도 저 난리를 치면서도 핀을 찾지 못하고 있으니.
물론 라이언은 이런 상황에 대비해 두 번째 명령을 내려 두었다.
‘그게 여의치 않다면 별궁의 리엘을 데려와라.’
‘별수 없지. 여긴 포기하고 별궁으로 가자.’
신디온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잠시 후, 신디온이 리엘의 방 테라스에 나타났다. 그는 커튼 뒤로 몸을 숨기고 정원을 내다보았다. 본궁과 마찬가지로 별궁 역시 경비가 삼엄했다.
신디온이 발소리를 죽이고 방으로 들어섰다. 황녀의 방치고는 지저분하고 정신이 없었다. 신디온은 언젠가 라이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내 손녀는 꽤 왈가닥이지. 하하, 정말 귀엽다니까.’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 아이가 있어 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 차가운 눈빛을 생각하면 신디온은 아직도 소름이 끼쳤다. 그도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안 가리는 자였지만 라이언만큼은 아니었다.
생물을 나이 먹게 하는 마법이 실시아에서 암암리에 성행하긴 했다. 하지만 마법의 부작용으로 가축들은 높은 확률로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런 마법을 사람에게 쓸 생각을 하다니. 게다가 손녀에게.’
애먼 황녀만 불쌍할 따름이었다. 물론 자신은 그 불쌍한 희생의 덕을 볼 작정이지만.
신디온이 리엘의 침대로 다가갔다. 리엘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도자기 인형같이 매끄러운 뺨에 속눈썹은 황금빛이었다. 작게 다문 입술 또한 앙증맞았다. 신디온은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다.
‘……미안하다.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어. 상황이 허락하면 위령제라도 지내 주지.’
신디온이 리엘을 조심히 안아 들었다.
“……으음.”
리엘이 뒤척거렸다. 보기보다 잠이 얕게 든 모양이었다. 리엘이 좀처럼 움직임을 멈추지 않자 신디온이 당황했다.
‘아아…… 이쪽도 망한 건가.’
그때 리엘이 눈을 떴다. 그녀는 자신을 안아 든 낯선 남자를 보고 중얼거렸다.
“……? 누……구?”
리엘의 얼굴에서 잠기운이 싹 사라졌다. 당장에라도 소리를 지를 듯 리엘이 숨을 들이마셨을 때였다. 신디온이 리엘의 입을 억세게 막았다.
“으, 읍! 으읍!”
“자…… 착하지? 아저씨랑 같이 가자.”
“으으읍!”
리엘이 발을 파닥거렸다. 그 발이 신디온의 얼굴을 퍽 찼다. 그의 눈빛이 순간 돌변했다.
“가만히 있어.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으면.”
살기가 가득한 말과 표정에 리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겁을 먹은 리엘의 몸이 굳었다.
“……착하네. 가자.”
그가 주문을 읊조렸다. 마력이 없는 이를 다루기 위해 꽤 긴 주문을 쌓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리엘의 몸이 남아나지 않을 테니.
잠시 후, 리엘의 방이 텅 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