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25화
밀론에서 돌아온 테오는 바로 황제의 집무실로 갔다. 그리고 결과를 보고했다.
“못 찾았다고?”
카를이 되물었다. 테오가 고개를 저었다.
“네. 에밀…… 아니, 루안의 숙소와 그가 지닌 물건을 다 확인해 봤습니다만 수정구는 없었습니다.”
“그 주위 사람들은?”
“자경단원들의 숙소 역시 모두 뒤졌습니다. 하지만 못 찾았습니다.”
“제길…….”
카를이 짜증을 삼키며 돌아섰다. 그는 책상을 양손으로 짚은 채 고개를 숙였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테오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어디에 숨겨 둔 것 아닐까요?”
“아니. 그럴 리 없어. 분명 몸에 지니거나 숙소에 뒀을 거다.”
루안은 그게 무슨 물건인지 알고 있었다. 절대 먼 곳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라이언이 가져간 것도 아니야. 그가 루안에게 손대기 전에 내가 나타났으니. 그렇다면 남은 건…….’
“!”
카를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황망하게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은 잔인하리만치 푸른 어둠뿐이었다.
밀론에서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피투성이가 된 루안에게 달려가던 아우라.
‘루안! 정신 차려! ……아.’
그때 아우라는 분명 루안에게 손을 댔다.
‘설마…… 그 짧은 순간에? 말도 안 돼. 밀론에 루안이 있다는 것도, 그가 핀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몰랐잖아. 그 사실을 다 알고 있었던 게 아닌 이상…….’
카를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천천히 오르내렸다. 그리고 문득 의료실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루안이 깨어나면 아우라가 핀에 대해 물을 게 뻔했다. 이상한 낌새야 충분히 느꼈을 테니. 그럼 정신이 혼미한 루안이 무슨 대답을 할지 몰랐다. 카를은 억지로라도 아우라를 돌려보내야 했다.
‘이만하면 됐어. 돌아가.’
아우라는 고집스럽게도 버티고 서 있었다.
카를은 순간 울컥했다. 너는 내가 보이지도 않는 건가. 이토록 널 살리려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내가.
결국 날 선 말이 튀어 나갔다.
‘명령이야. 돌아가.’
그때 아우라는 어떤 표정을 했더라.
‘가.’
카를이 그 말을 뱉었을 때였다. 그녀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체념했다. 어쩐지 슬픈 눈을 하면서.
카를은 그 침묵이 원망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묻지 않았다.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고.
‘아니야. 그건…….’
원망이 아니었다. 루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카를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거야.’
카를은 멍하니 그렇게 서 있었다. 그가 오해하고 흘려보냈던 퍼즐들이 짜 맞춰졌다.
그 퍼즐이 의미하는 어떤 가능성. 그 가능성을 깨달은 순간 그가 집무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폐하?”
테오가 그를 부르며 복도로 나갔다. 카를은 벌써 복도 저편을 달리고 있었다.
“말씀드릴 보고가…… 남았는데.”
***
“혼자 좀 쉬고 싶어, 미나.”
목욕을 마치고 돌아온 아우라가 말했다.
“예, 폐하.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미나가 그렇게 시녀들을 데리고 나가려던 때였다.
“미나.”
“네.”
아우라는 콘솔로 가서 보석함을 열었다. 그리고 가장 비싼 반지를 꺼내 미나에게 건네주었다.
“……폐하?”
“별건 아니야. 내가 피투성이로 온 거…… 시녀 아이들 입막음 좀 잘 시키란 의미로 주는 거야.”
“괘, 괜찮습니다. 그 아이들은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는걸요.”
“그래도 받아. 어서.”
“하지만…… 이건 너무 비싼 건데요.”
“비밀이나 사람이나…… 뭔가를 지키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니까.”
아우라가 미나의 손에 억지로 반지를 쥐여 주었다.
“폐, 폐하.”
“나가 봐.”
아우라는 시선을 돌리곤 손을 휘휘 저었다. 미나는 엉겁결에 반지를 받아 들고 방을 나갔다. 그러자 아우라는 방문을 잠가 버렸다.
달칵.
문이 잠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쿵- 쿵-
겁을 먹은 심장이 벌써 뛰어 댔다. 아우라는 애써 침착하게 서랍장의 서랍을 열었다. 그녀가 오래전부터 준비해 둔 것들이 그곳에 있었다. 작은 칼, 이혼 신청서, 그리고 유언장.
아우라는 그것들을 들고 창가의 테이블로 왔다. 가운 주머니에서 핀을 꺼내어 올려 두고 그 옆엔 칼을 뒀다.
그녀는 가장 먼저 이혼 신청서를 들었다.
이것에 서명하던 카를의 씁쓸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믿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아우라를 막을 수 있을 거라고. 그것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니까.
그녀는 촛불에 이혼 신청서를 태우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 되길 바라며. 이혼 신청서는 금방 재로 변했다.
“후우…….”
다음은 유언장이었다. 그녀는 마지막 점검 차 그 내용을 눈으로 읽었다.
「이 모든 건 나 아우라 카사의 선택이다. 만약 추후에 라이언 카사가 황실을 위협하는 그 어떤 행동이라도 한다면 제니아의 마법사들은 마력을 되찾는 즉시 카사 황제를 도울 것. 또한 그대들이 마력을 빼앗긴 건 라이언 카사의 책임임을 밝힌다.
제니아 마법사의 도움을 받는 여부를 떠나 카사의 황제는 제니아인들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나와의 약속을 지킬 것. 또한 제니아의 새로운 지도자는 지금껏 나를 도운 루안 마이어로 한다.」
아우라는 상상해 보았다. 제니아의 모든 마법사가 다시 힘을 얻게 되는 순간을. 그럼 카사는 카사대로, 제니아는 제니아대로 평화를 되찾을 것이다. 완벽하게.
단 한 명, 아우라가 죽기만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죽음의 가치는 충분해 보였다. 왕녀로서 이런 죽음을 맞이하는 건 어쩌면 영광일지도 몰랐다.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그녀는 언제부턴가 한 몸처럼 차고 다니는 팔찌를 풀어 내려놓았다. 더는 아물지 않는 흉터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아우라가 그 흉터를 손끝으로 쓸었다.
북쪽 탑에서 핀이 가짜라고 말하던 카를의 얼굴은 침착했다. 그러나 이 상처를 누르던 손길은 달랐다. 그 다급함과 절박함. 그것만큼은 아우라도 쉽게 잊히질 않았다.
그녀에겐 한 장의 백지가 남아 있었다. 카를에게 남길 편지였다.
‘카를에게는…… 뭐라고 써야 할까.’
사실 지금껏 몇 번이나 그에게 편지를 써 보려 했다. 하지만 어려웠다. 고마워. 잘 있어. 상투적인 인사라도 남기려 펜을 들면 여지없이 숨이 턱 막혀 왔다.
‘역시…… 후회돼.’
의료실에서 제대로 인사를 해야 했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돌아서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게 너무 아쉬워서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멍하니 종이만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절걱!
누군가가 잠긴 문고리를 돌렸다. 놀란 아우라가 반사적으로 칼을 쥐었다. 누군가 자신을 방해하러 온 거라면 당장 손목을 찌를 작정으로.
절걱! 절걱!
“아우라.”
카를의 목소리였다. 거짓말처럼 손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문 열어, 아우라.”
그의 목소리는 언뜻 화가 난 듯했다. 열지 않으면 문이라도 부술 기세였다. 아우라가 칼을 더 꽉 쥐었다.
‘어서, 어서 해야 해.’
“……발.”
“!”
“제발, 아우라.”
카를의 목소리가 절망에 젖어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아우라의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유언장을 두 번 접어 내용을 숨겼다. 그리고 모든 걸 콘솔 서랍에 넣고 열쇠로 잠갔다.
탁, 탁, 탁, 탁.
슬리퍼를 거칠게 끌며 문으로 갔다. 팔찌를 다시 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벌컥.
아우라는 문을 열어젖혔다.
“카를.”
그녀가 놀란 척 그를 불렀다. 카를의 손이 검집에 가 있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문을 부숴 버렸을 거다.
“……너.”
카를이 그 한 마디를 내뱉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목울대가 오르내렸다. 얼마나 급하게 뛰어온 건지 관자놀이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아우라는 소매로 그의 땀을 닦아 주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괜찮아?”
나긋나긋한 물음에도 카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아우라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카를?”
카를이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몸에 그의 온기가 퍼져 나갔다. 아우라는 눈을 감았다.
‘이거면…… 그래, 이거면 됐어.’
편지는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녀는 있는 힘껏 그를 안아 주었다. 말이 더 필요 없을 정도로 따뜻하게.
귓가에 카를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아우라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어?”
무슨 이유건 다 받아 줄 생각이었다. 할 수 있는 한 상냥하게 그의 말을 들어 주고 달래 준 후 보내 줄 생각이었다. 계획은 그 이후에 실행해도 충분했다.
카를은 그녀를 꽉 안은 채 한 마디를 내뱉었다.
“……핀.”
“!”
“네가 가지고 있지?”
카를은 그렇게 묻곤 천천히 그녀를 놔주었다. 핏발이 선 눈이 아우라를 직시했다.
아우라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단지 정해진 답을 말했다.
“아니.”
“…….”
“정말로…… 정말 아니야.”
아우라가 고개를 저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내가 죽는 줄 알고 이렇게 달려온 거야?”
“…….”
“가엾게.”
그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이 집요함이 가여워져서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아우라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처음이었다. 그녀는 그의 눈빛에서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을 믿는지 아닌지도.
카를이 되물었다.
“정말이야? 핀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래. 정말이야.”
“그럼 재워 줘.”
“……뭐?”
“오늘 밤에 재워 줘. 너 없으면 못 잘 것 같아.”
“오늘은…….”
안 된다고 해야 했다. 어떻게든 잘 달래서 돌려보내야 했다. 여기서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나는, 아우라.”
그가 아우라의 손을 꽉 잡았다.
“정말…… 너 없으면 안 돼.”
너 없으면 안 돼.
그 말이 아우라의 마음을 한 바퀴 헤집고는 저 안쪽에 들어가 박혔다. 계획과 각오, 신념과 긍지. 그 모든 것들이 그의 말에 모두 뭉그러졌다. 저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모든 노력을 또다시 원점으로 되돌려 놓으려 했다.
그런데도 아우라는 결국 이 말을 하고 말았다.
“……하루만.”
‘하루’를 내뱉는 자신의 나약함을 원망하면서도.
“딱 하루만이야.”
아우라는 결국 카를을 외면하지 못했다.
그녀는 카를을 따라 방을 나섰다. 중간 복도에 미나가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아우라는 미나 옆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그녀에게 콘솔 열쇠를 쥐여 주었다.
“?”
미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우라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카를을 따라 나가 버렸다.
하지만 아우라는 믿고 있었다. 똑똑한 미나라면 자신의 의도를 이해했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