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24화
황제군이 밀론에 도착했을 때 모든 상황은 이미 끝나 있었다.
그들을 몰고 온 테오는 자경단의 안내를 받아 병원으로 갔다. 말이 병원이지 조악한 의료실에 지나지 않았다.
병실은 아수라장이었다. 침대에 누운 루안은 응급 처치를 받고 있었고, 황후는 피투성이였다.
“폐하.”
테오가 그를 불렀다. 카를이 그를 쏘아보더니 대뜸 멱살을 휘어잡았다.
“폐, 폐하?”
카를이 테오를 그대로 병실 구석까지 몰아붙였다. 그리고 아우라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말했다.
“넌 대체 뭘 하는 거야. 북서쪽에서 폭죽이 터지면 바로 오라고 하지 않았나?”
테오는 바로 왔다. 항상 북서쪽을 주시하고 있었고, 폭죽이 터진 순간 병사를 모아서 달려왔다.
하지만 그런 사실은 의미가 없었다. 특히 충격에 잠긴 황후의 표정 앞에서는.
“……송구합니다.”
테오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카를이 이를 악물더니 그의 멱살을 놔주었다.
카를도 잘 알고 있었다. 황궁과 이곳은 거리가 꽤 멀다는 것을. 폭죽이 터졌을 때 마차가 밀론 근처에 있던 게 천만다행이란 것을.
자신이 화가 난 진짜 이유가 이곳에 아우라가 있다는 사실 때문이라는 것도.
그녀는 양손을 맞잡은 채 목석처럼 서 있었다.
눈물이 말라붙은 뺨, 여전히 젖은 눈, 초점을 잃은 듯한 시선. 저런 얼굴에 대고 왜 따라왔느냐고 따질 순 없었다. 다만 그는 불안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혹은 어디까지 짐작하고 있을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지켜야 할 이도 아우라지만, 그녀를 죽이려는 이도 아우라였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녀도 정신을 차리는 대로 움직일 게 틀림없었다.
“테오.”
“예, 폐하.”
카를이 목소리를 낮춰 테오에게 말했다.
“루안의 집을 알아내서 그 안을 샅샅이 뒤져. 핀을 찾아야 한다.”
“……! 예, 폐하.”
테오가 황후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나갔다.
카를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루안의 외투와 가방을 보았다. 이미 병사들이 확인을 마친 상태였다. 안에는 빈민 구제와 관련한 서류뿐이었다.
루안의 낯빛은 창백했다. 가늘게 내뱉는 숨결 말고는 살아 있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이대로 저자가 죽어 버리기라도 하면…….’
그만큼 골치 아픈 일도 없을 것이다.
“……아우라.”
카를이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황궁으로 돌아가도록 해.”
“……루안을 데려가야겠어. 여긴, 여긴 너무 열악해. 황궁의에게 치료를 받게 해야 해.”
그럴 순 없었다. 루안을 아우라와 가까이 두는 건 너무 위험했다. 게다가 지금처럼 핀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쨌거나 일단은 아우라를 먼저 황궁으로 보내는 게 급선무였다. 그래야 루안과 그 주위를 더 제대로 뒤질 수 있으니.
“알았어. 그렇게 할 테니 돌아가도록 해.”
“지금 내가 데리고 갈 거야. 우리 마차도 밀론으로 왔으니까 루안을 옮길 사람을 부를게.”
아우라가 그렇게 말하며 병실을 나섰다. 카를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섰다. 그는 이를 꽉 물더니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는 그새 복도 저 끝까지 가 있었다. 카를이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아우라, 너……!”
카를이 감정을 꾹 눌렀다. 마음 같아서는 강제로라도 마차에 태워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네 말을 어떻게 들을 수 있겠어.”
아우라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네가 오지 말라는 곳에 왔더니…… 루안이 죽어 가고 있네? 게다가 라이언이 여길 다녀갔다지? 그리고 넌 모든 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굴고 있고.”
“…….”
“널 따라오면 날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지? 좋아. 용서하지 마. 날 탓하고 미워해. 하지만 너도 하나는 말해 줘야겠어.”
“…….”
“너. 내게 대체 뭘 숨기고 있어, 카를?”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도 벌써 짐작하고 있을 것이기에. 이 모든 일이 핀과 관련 있다는 것을.
카를이 머뭇거리자 그녀는 그를 밀어냈다.
“대답은 나중에 해. 나는 내 친구를 살려야겠으니까.”
***
“허억…… 허억…… 쿨럭!”
라이언이 속에서 왈칵 올라오는 피를 토했다. 그는 허름한 폐가에 누워 있었다.
“허억…… 제길……. 더럽게 아프군.”
“대공, 괜찮으십니까?”
신디온이 라이언에게 물었다. 신디온의 주위에는 수많은 마법사가 있었다. 라이언이 제니아인 지구에 다녀오는 동안 신디온이 실시아에서 데리고 온 이들이었다.
“자네 마법…… 괜, 찮은…… 거야?”
라이언이 그 와중에 신디온에게 짜증을 냈다. 신디온이 혀를 끌끌 찼다.
“마력도 없는 인간의 몸을 억지로 이동시켰으니 당연히 안 괜찮지요.”
“……그걸, 말이라고.”
“그래서 목숨이 위급하실 때만 절 부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할 말이 없었다. 정말 목숨이 위급했으니까.
신디온은 내내 먼 곳에 있는 라이언에게 귀 기울이고 있었다. 마력을 상당히 쓰는 일이었으나 그러지 않았다면 라이언은 죽었을 것이다.
신디온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라이언의 몸은 마치 분해되는 듯했다. 그 감각에 의식을 잃었다가 정신을 차리니 바로 이곳이었다. 실시아 마법사들을 숨겨 놓은 폐가.
라이언이 겨우 몸을 일으켰다.
‘카를이 그렇게 빨리 나타날 줄이야. 갑자기 튀어나온 그 병사들은 또 뭐고.’
“하아…….”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신디온과 마법사들이 그의 눈치를 보았다.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계획이 틀어졌다는 것을.
“이제…… 어떻게 할까요?”
라이언은 말이 없었다. 당장에 핀을 얻는 건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를 먼저 해결하는 게 상책. 즉, 핀을 깰 제물이라도 제대로 얻어 내야 했다.
‘아우라 황후…… 혹은 리엘.’
전자는 핀만 있으면 바로 봉인을 깰 수 있다. 후자는 약간의 마법이 가미되어야 한다.
“신디온.”
“네.”
“사람을 나이 들게 하는 마법, 이곳에서 가능한가?”
“아니요. 그건 수트라나 실시아로 가야 합니다. 약재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 재료가 온도 변화에 취약하여 수도에 가져올 수 없었습니다.”
‘그 꼬맹이를 수트라로 데려가야 한다 이 말이지…….’
귀찮은 일이었다. 핀도 따로 얻어야 할 테고.
반면 황후를 붙잡는다면…… 잘하면 핀도 함께 얻을 수 있었다. 황후가 핀에 대해 보이는 집념도 대단하니까.
라이언은 손수건으로 입가의 피를 닦아 냈다. 그리고 잠시 후 결연하게 입을 열었다.
“신디온.”
“네.”
“황궁으로 잠입해. 지금 바로.”
***
황궁으로 돌아오는 동안 아우라와 카를은 마차 안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들을 뒤따르는 마차에는 루안이 실려 있었다.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루안은 황궁의에게 보내졌다. 황궁의가 바로 상태를 살폈다.
“어떤가?”
아우라가 물음에 황궁의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나마 응급조치가 잘되어서 다행입니다.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아우라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때 카를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이만하면 됐어. 방으로 돌아가.”
아우라가 버티고 서 있자 카를이 다시금 말했다.
“명령이야. 돌아가.”
그녀는 또 한참을 카를의 얼굴만 보았다. 그녀의 말없는 시선에 카를의 미간이 서서히 좁아졌다.
“가.”
카를이 다시 한번 잘라 말했다. 그녀는 카를에게 뭔가를 말하려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짓곤 뒤돌아 떠나 버렸다.
잠시 후, 아우라가 방에 도착했다. 피투성이가 된 그녀를 보고 미나와 시녀들이 기겁했다.
“폐, 폐하! 피, 피가……!”
“괜찮아. 내 피가 아니야.”
아우라가 덤덤하게 말했다.
“씻어야겠어. 준비해 줘.”
“아, 네…… 폐하.”
시녀들이 분주하게 목욕을 준비했다. 아우라는 시녀들의 시중을 거부한 채 혼자 욕실에 들어갔다.
그녀는 드레스를 벗고 제 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온몸에 카를이 남긴 흔적이 가득했다.
‘가.’
차갑게 그 말을 내뱉던 카를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작 며칠 다정한 나날을 보냈다고 그 표정과 말투가 낯설었다.
아우라는 제 드레스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차갑고 둥근 것이 잡혔다. 핀이었다.
첨벙.
아우라가 핀을 쥔 채로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물속에서 핀을 유심히 바라봤다. 신비로운 빛이 핀 안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밀론에서 쓰러진 루안을 보자마자 그를 향해 달려갔다. 그의 창백한 안색과 차가운 몸이 믿을 수 없어서 눈물이 나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몸을 뒤져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
루안을 흔드는 척하면서 그의 가방에 손을 넣었다. 운 좋게도 바로 핀이 잡혔다.
나머지 일들은 반쯤은 진심이었고, 반쯤은 연기였다. 진심으로 루안이 황궁에서 치료를 받았으면 했다. 그리고 거짓으로 카를을 원망하는 척했다. 그래야 자신이 핀을 가지고 있다는 걸 숨길 수 있으니.
‘루안이 깨어나기 전에 일을 진행해야 해.’
루안은 깨어나자마자 카를에게 말할 것이다. 자신이 몸에 핀을 지니고 있었다고. 그럼 당연히 카를은 그녀부터 의심할 거다.
‘일이 복잡해지기 전에…… 하자.’
아우라가 피식 웃었다. 겨우 일주일의 유예 기간조차 결국 채우지 못하다니.
그러나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다. 폭죽이 쏘아 올려지기 직전까지는 분명 행복했으니. 그 기억들이 곧 닥쳐올 죽음을 위로해 줄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핀을 얻지 않았나. 루안도 살아날 수 있을 것 같고.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건 있었다. 카를과의 마지막.
카를은 그녀에게 대화가 아니라 명령을 내렸다. 그의 앞에서 아우라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좀 더 상냥한 인사를 남길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간 그가 어떤 기미라도 읽어 낼 것 같아 무서웠다.
아우라는 고개를 저었다. 괜한 감상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오늘, 오늘 하는 거야. 이 목욕이 끝나면.’
더 미룰 이유는 없었다. 망설임은 용기를 깎아 먹을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