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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23)화 (123/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23화

아우라는 하늘에 남은 폭죽의 흔적을 물끄러미 보았다.

‘북서쪽이면…… 밀론이잖아. 저기서 왜 폭죽이 터진 거지?’

그건 축제용 폭죽이 아니었다. 밀론에서 축제를 열 리도 없고. 아우라가 아는 한 그건 군용 폭죽. 즉, 위기를 알리는 신호였다.

카를이 창밖의 기사를 불렀다.

“마차를 잠깐 멈춰라.”

“네! 마부, 마차를 잠깐 멈추게.”

이윽고 마차가 급하게 멈췄다. 카를이 아우라에게 말했다.

“먼저 황궁에 가 있어. 난 어딜 잠깐 들렀다 갈 테니.”

카를이 그대로 마차에서 내리려 했다. 아우라가 그의 손을 잡았다.

“밀론으로 가는 거지? 같이 가.”

밀론에서 카를이 움직일 정도의 일이 벌어졌다면…… 답은 하나였다.

루안이 위험했다. 정확히는, 핀이.

“안 돼, 아우라.”

카를이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떼어 냈다. 그리고 그대로 꾹 눌러 잡았다.

“금방 돌아올게. 황궁으로 가 있어.”

아우라도 물러나지 않고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싫어. 나도 가. 밀론에 무슨 일이 생긴 거잖아.”

“아우라.”

카를이 단호하게 말했다.

“돌아와서 설명할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이거 놔.”

아우라가 입술을 꽉 물었다. 방금까지 그와 보낸 달콤한 시간. 그 시간이 어디론가 확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카를도 마찬가지였다. 아우라를 상처 주는 한이 있더라도 이렇게 해야 했다. 그러니까, 자신이 다시 미움을 받더라도.

카를이 기어이 그녀의 손을 떼어 냈다. 마차에서 내린 그가 기사와 마부에게 뭔가를 말했다. 마부는 얼른 마차의 말 한 마리를 내어 주었다. 카를이 말에 훌쩍 올라타 마차의 창 앞으로 왔다.

“아우라.”

“…….”

“따라오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북서쪽을 향해 말을 몰았다. 말의 뒤꽁무니가 흙먼지 속에서 흐려져 갔다. 아우라는 주먹을 꽉 쥐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폐하, 출발할까요?”

문밖에서 기사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온화했던 황후의 눈빛이 왜 변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잠깐 바람을 좀 쐬고 가지. 문을 열어다오.”

“아…….”

“바람을 좀 쐬고 싶대도.”

아우라가 채근하자 그가 결국 마차 문을 열었다. 아우라는 기사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북서쪽 하늘에는 아직도 폭죽의 잔해가 희미하게 떠다녔다.

‘멀지 않아. 말만 타면 금방 갈 수 있어.’

기사는 불안한 눈길로 아우라의 곁에 붙어 있었다. 뻔했다. 카를이 떠나기 전에 말했겠지. 책임지고 황후를 황궁에 데려다 놓으라고.

“이봐.”

“네, 황후 폐하.”

“너무 걱정하지 마. 자네가 벌을 받지 않도록 힘써 주지.”

“……네?”

그때 아우라가 재빨리 기사의 말에 올라탔다. 갑자기 올라탄 낯선 이의 무게에 말이 놀라 앞발을 들었다.

-히이이이잉!

“폐, 폐하!?”

“……읏.”

아우라가 힘껏 고삐를 붙들어 잡았다. 그 기세에 말이 금방 앞발을 내려놓았다.

“북서쪽으로 가자. 이랴!”

아우라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삐를 채찍 삼아 휘둘렀다.

“폐하! 폐하! 안 됩니다!”

기사가 외쳐 댔다. 아우라는 있는 힘껏 말을 몰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심상치 않은 기척에 아우라가 뒤를 슬쩍 보았다. 마차가 그녀를 따라오고 있었다. 마부석에 앉은 기사가 사색이 된 채였다.

“이랴!”

아우라는 말을 더 세게 몰았다. 뭐가 됐건 루안을 봐야 했다.

‘카를이 루안에게서 핀을 가져가기라도 하면 핀의 행방은 다시 오리무중이 돼.’

그녀는 문득 카를의 말이 떠올렸다.

‘따라오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아우라가 입술을 꽉 물었다.

‘어차피 넌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거야.’

그녀는 이미 그에게 많은 거짓말을 했다. 죽지 않겠다고 했고, 내년에 그와 함께 제니아에 오겠다고 했다. 언젠가 그의 요리를 먹어 주겠다는 소리도 했다. 여기에 잘못을 하나 더한다 한들 바뀌는 건 없었다.

밀론으로 가는 평야의 풍경이 스쳐 갔다. 어제 오늘 카를과 나눈 기억들도 함께 스쳐 가는 듯했다.

제니아의 신전에서 카를의 품에 안겨 흘린 눈물. 그녀의 몸을 씻겨 주고, 머리를 말려 주고, 꼭 안아 재워 줬던 그의 손길. 침대에서 그와 함께 봤던 풍경, 바짝 졸아든 수프의 맛. 그리고 마차에서 나눴던 입맞춤까지.

그런 기억들이 모두 하늘로 날아가고 있었다.

***

“허억…… 허억…….”

루안이 벽에 몸을 기대고 숨을 삼켰다.

멀지 않은 곳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루안은 지체할 것 없이 골목을 파고들었다.

라이언과의 쫓고 쫓기는 술래잡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루안은 용케 아직 잡히지 않았다. 마침 어두운 밤으로 접어드는 시간과 루안이 이 골목의 지리에 밝은 덕이었다.

문제는 루안의 몸 상태였다.

“……윽.”

울컥하고 등에서 피가 쏟아졌다. 의식이 흐릿했다. 식은땀이 이마를 흠뻑 적신 지도 오래였다. 하필 등을 다쳐 지혈할 수도 없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루안에 비해 지척에서 들려오는 라이언의 발소리엔 거침이 없었다. 부상울 당한 루안이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걸 잘 안다는 듯.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간다면…… 그건 안 돼.’

라이언이 사람들의 이목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루안을 죽이고 핀을 빼앗을 것이다. 그리고 지켜보던 모든 이들 역시 가만두지 않을 거였다.

“하아…….”

루안은 눈앞이 아찔하게 흐려지는 걸 느꼈다.

“……아우라…….”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이름이 나왔다. 핀을 지키는 건 아우라를 지키는 일이었다. 절대 여기에서 포기하면 안 됐다.

운명은 그런 그를 끝내 모른 척하려는 것 같았지만.

“오호.”

라이언이 골목 입구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찾았다.”

그는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저벅저벅 루안에게 다가왔다.

“하아…… 하아…….”

루안이 숨을 몰아쉬며 뒷걸음질을 쳤다.

쨍강.

검을 제대로 휘두를 힘도 없어서 바닥에 버렸다. 대신 지니고 다니던 단도를 꺼내 쥐었다. 그는 날을 라이언에게 향하게 한 채로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등이 벽에 닿으면 마지막 힘을 다해 라이언의 심장을 노릴 생각이었다. 그 전에 라이언의 검이 자신을 찌르겠지만 부디 검날이 표적에 닿기 전까진 숨이 붙어 있길 바랄 뿐이었다.

자신이 죽고, 라이언도 죽고. 그 후에 카를이 도착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것이 지금의 루안으로서는 최선이었다.

그때였다. 별안간 한 떼의 남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라이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네놈들은!”

당황한 라이언이 그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예사 실력이 아닌지라 라이언의 움직임도 조급해졌다. 루안은 점점 흐려지는 시야를 겨우 붙잡아 그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저들은……!’

기억이 났다. 아우라가 자경대원으로 쓰라고 보냈던 용병들.

‘저들은 내가 돌려보냈는데…… 어째서?’

어째서 저들이 지금까지 제니아 지구에 있는 것인가. 왜 당연하다는 듯 루안을 돕고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깨달았을 때, 루안은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알고 있구나, 아우라…….’

점차 흐려지던 그의 의식이 뚝 끊어졌다.

***

카를은 밀론으로 가서 폭죽이 터진 곳을 찾았다. 사람들은 제 앞에 나타난 이가 누군지도 모르고 골목을 가리켰다.

골목으로 들어선 카를이 한참을 뛰었을 때였다. 저 안쪽에서 심상치 않은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가 골목 모퉁이를 돌았다.

촥!

라이언이 한 사내의 가슴을 일자로 베어 냈다. 그의 주위에는 시신들이 가득했다.

라이언의 몸은 피에 반쯤 젖어 있었다. 그는 광기가 스민 눈으로 이 골목에 나타난 새로운 불청객을 보았다.

“……이게 누구신가.”

그가 힘없이 칼끝을 바닥으로 내렸다. 흘러내린 피가 작은 피 웅덩이를 만들었다.

“진짜 우리 조카님이 오셨네. 후우…….”

카를이 말없이 검을 빼 들었다. 라이언은 꽤 지친 듯 숨을 몰아쉬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자 그의 은발이 붉게 물들었다.

“하아…… 짜증 나네.”

라이언이 슬쩍 뒤를 돌아 루안을 보았다. 루안은 이미 정신을 잃고 쓰러진 채였다.

‘황궁에서 온 게 아니로군. 그랬다면 이렇게 빨리 왔을 리가……. 뭐, 별수 없나.’

“오랜만이군, 라이언.”

카를이 주저하지 않고 다가왔다. 그러나 라이언이 피식 웃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하하…… 내가 조카님과 검을 겨룰 만큼 멍청하진 않지.”

카를의 실력 정도는 라이언도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처럼 힘이 빠진 상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승산은 없었다.

하지만 카를도 그에게 도망갈 시간 따윈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슉!

기합도 없이 카를의 검이 라이언의 가슴을 사선으로 베었다. 라이언이 다급하게 물러났다.

“억…….”

그의 가슴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치명상은 피했지만 밀려오는 고통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카를은 자비도 분노도 없는 무감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왔다. 다만 검을 다시 그러쥘 뿐이었다.

라이언이 떠밀리는 숨을 고르며 씩 웃었다. 그리고 대뜸 온 힘을 다해 외쳤다.

“신디온!”

그 순간, 라이언은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카를이 주위를 둘러봤으나 그의 흔적은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곳에 없었던 것처럼.

‘……실시아 마법사의 짓인가.’

그리고 그 순간 등 뒤에서 또 다른 발소리가 들려왔다. 카를이 반사적으로 검을 뒤로 뻗었다.

“……읏.”

발소리의 주인공이 순간 걸음을 멈췄다. 카를은 그 얼굴을 확인하더니 바로 검을 거뒀다.

“아우라……?”

“루안!”

쓰러진 루안을 본 아우라가 외쳤다. 그에게 가려는 아우라를 카를이 잡았다.

“안 돼, 아우라.”

“놔!”

아우라는 힘껏 카를을 뿌리치고 루안에게 달려갔다. 그녀는 쓰러진 루안을 감싸 안았다.

“루안! 정신 차려! ……아.”

아우라는 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온통 미끈거리는 그것은 분명 피였다. 빠르게 차오른 눈물이 뺨에 흘러내렸다.

“안 돼…… 안 돼, 루안.”

“아우라.”

카를이 재빨리 다가가 아우라를 잡아 일으켰다.

그때였다.

“……하아…….”

미약한 숨이 루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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