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22화
루안은 자경단과 밀론의 골목 곳곳을 살피고 있었다. 밀론으로 온 후 제니아인들은 많은 변화를 맞는 중이었다. 수도에서 직업을 구한 자도 있었고, 장사를 시작한 이들도 있었다.
요즘 자경단 활동의 주목표는 빈민 구제였다. 주거 문제가 해결된 만큼 전체적인 생활 수준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루안이 동행한 자경단원에게 물었다.
“빈민들에게 구호품은 잘 나눠 주고 있나? 모자라진 않고?”
“넉넉하진 않습니다. 수트라에서 보냈던 물품들이 지금 딱 떨어져서 말입니다.”
“그럼 황궁에 요청하도록 해. 황후 폐하 말고 황제 폐하 쪽으로.”
“……황제 폐하요?”
“그래.”
“하지만 황후 폐하께 말씀드리는 게 더 편하지 않겠습니까?”
자경단원의 입장에선 자연스러운 생각이었다. 아우라는 언제나 제니아인들을 도와왔으니까. 그러나 루안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가 루안과 거리를 지키려면 제니아인들과도 멀어져야 했다.
“어차피 결정을 내리는 건 황제 폐하야. 날 믿고 그렇게 하도록 해.”
“아…… 예. 알겠습니다.”
자경단원이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내 수긍했다. 루안은 신중한 리더였다. 그가 그렇다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루안은 골목을 걸으며 생각했다. 골목 여기저기에 빈민들이 하릴없이 쭈그려 앉아 있었다.
제니아는 규모는 작았으나 부유하고 풍족한 나라였다. 갑부는 적어도 빈민은 없는 그런 나라. 때문에 루안은 이런 풍경이 아직도 익숙하지 않았다.
그도 한때는 수트라의 구호품들이 가뭄의 단비 같았다. 하지만 예전에 안센나에서 라이언을 만났을 때, 그 생각은 바뀌었다.
라이언은 소름 끼치는 자였다. 특히 루안의 배 속까지 꿰뚫어 보는 눈이 그랬다.
“자네, 제니아인이지?”
“……그건 왜 물으십니까.”
“생긴 게 제니아인이라. 내가 사람 생긴 거에 관심이 많아. 특히 조금 다르게 생긴 사람들.”
“아니요. 저는 카사인입니다.”
“성은?”
“머린입니다. 시골 귀족 출신이라 대공 전하께선 아마 모르실 겁니다.”
“음. 모르는 성이군. 어쨌거나 아니라니 의외네. 난 자네가 제니아인이라 황후께서 끼고 있는 줄 알았지.”
라이언이 피식 웃었다.
그때 라이언이 지었던 미소. 그것은…….
‘마치 봐주겠다는 의미 같았어. 내 거짓말을.’
루안은 그런 사람과 제니아인들이 엮이질 않길 바랐다. 게다가 그가 반역자가 된 지금은 더욱.
그는 자경단원에게 슬쩍 물었다.
“라이언 대공의 일 말이야. 어떻게 생각해?”
“하아…… 그 문제 좀 애매하죠. 신문에 난 것만 보면 반역자가 맞는데, 우리에겐 고마운 사람이니까요.”
“제니아인들의 여론은 어떻지?”
“어떻긴요. 황실이 무고한 대공에게 반역죄를 뒤집어씌웠다고들 말해요. 그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군.”
‘지금까지 보낸 구호품이 이런 식으로 효과를 보는군. 괜히 다들 선동되지 말라고 말을 해 둬야겠어.’
그때 자경단원이 루안에게 말했다.
“대장, 저게 무슨 소리죠?”
그의 말처럼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싸움이 일어난 모양이야. 가 보자.”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대장은 골목을 계속 살피십시오. 시간이 없잖아요.”
그의 말이 맞았다. 안 그래도 일손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래.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외치고.”
“네.”
자경단원이 옆 골목으로 뛰어갔다. 루안은 혼자서 더 깊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러던 중 빈집이 하나 있어 들어가 안을 살폈다. 언제 사람이 살았는지도 모를 폐가였다.
‘여긴 철거하라고 해야겠군.’
“오랜만이네.”
루안이 우뚝 멈춰 섰다. 기억 저 먼 곳에서 달려와 루안을 붙잡는 듯한 목소리.
“이름이…… 에밀이라고 했었나?”
‘날 아직 ‘에밀’이라고 부르는 사람……. 그건 한 사람뿐이지.’
루안이 검집에 손을 댄 채 천천히 뒤를 돌았다.
아니나 다를까. 라이언이 집의 입구를 막아서고 있었다. 그는 뿌듯하게 말했다.
“내 말이 맞았네. 제니아인.”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대공 전하.”
루안이 경계를 풀지 않은 채 물었다. 라이언이 천천히 다가왔다.
“대공이라. 자넨 신문도 안 보나?”
“카사의 정치에는 끼어들고 싶지 않습니다.”
“아우라 황후의 일에는 끼어들고 싶고?”
루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 푸른 눈동자 앞에서 틈을 보였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라이언은 주머니에서 웬 돌을 하나 꺼냈다. 그 돌은 신비로운 푸른빛을 산발하고 있었다.
“오호라. 역시 맞았네. 반가운 얼굴이 보여 따라와 봤더니.”
‘저게 뭐지?’
루안이 그 돌을 불길하게 바라보았다.
“아, 궁금한가? 이 돌의 정체가?”
라이언이 돌을 손에서 툭툭 던지며 장난을 쳤다.
“많은 걸 설명할 시간은 없고…… 이렇게 말해 주면 이해할 수 있으려나.”
“…….”
“이 녀석은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야. 내 앞에 있는 사람이…… 핀을 가지고 있다고.”
차캉!
루안이 바로 검을 뽑아 들었다.
“비켜라. 다가오면 베겠다.”
“아하하…… 방금까진 대공이라더니 이제는 검을 빼 드는군.”
라이언은 한껏 웃어 젖혔다. 그리고 물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검을 뽑았다.
공기가 고요해진 듯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보았다.
루안은 느낄 수 있었다.
‘보통 상대가 아니다.’
죽거나 다치는 게 무섭진 않았다. 문제는 그가 지닌 핀이었다. 그걸 뺏긴다면 자신이 아니라 아우라의 목숨이 위험해질 것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카를이 주고 간 폭죽 역시 가방 안에 있었다.
‘유사시엔 이 폭죽을 터트리도록. 그럼 바로 오겠다.’
‘일단 집 밖으로 나가야 해. 그래야 폭죽을 터트릴 수 있어.’
그러나 라이언이 문을 막은 상태였다. 루안이 라이언의 움직임을 유도하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라이언은 붙박인 듯 선 채 검을 겨눴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난 비켜 줄 마음 없어.”
라이언이 대놓고 루안을 도발했다. 루안이 입술을 물었다.
“이야아!”
루안이 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깡!
검이 매서운 기세로 맞부딪혔다.
끼기기기기-
검날에서 작은 불꽃이 튀었다. 루안은 죽일 듯이 라이언을 노려보았다. 라이언의 관자놀이에도 핏줄이 섰다.
“보기보단 꽤 쓸 만한 검사였군. 곱상하게 생긴 게 황후의 노리개인 줄 알았는데.”
라이언이 순간 루안의 검을 쳐 냈다. 그러나 루안이 다시 검을 돌려 그의 목을 노렸다.
깡!
다시금 두 개의 검이 맞부딪쳤다.
“……읏.”
루안의 팔이 미세하게 떨렸다. 힘은 둘째 치더라도 검의 무게와 성능부터가 큰 차이가 났다. 이대로 힘 싸움을 하다간 루안이 밀릴 게 분명했다.
‘다치는 걸 감수하고서라도…… 일단 나가야 해.’
루안은 집 왼편의 창문을 떠올렸다. 유리창이 있지만 몸을 던진다면 못 부술 것도 없었다.
끼릭!
그가 있는 힘을 다해 검을 돌렸다. 어라? 하는 얼굴로 라이언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팍!
순간 루안이 그의 무릎을 찼다.
“억!”
라이언이 한 걸음 물러났다. 그 틈에 루안이 창문으로 몸을 던졌다.
와장창!
창문이 산산조각이 났다. 루안은 그 위로 넘어졌다.
“……윽!”
유리 조각들이 온몸에 박힌 것 같았다. 그는 얼른 몸을 일으켜 가방의 폭죽을 꺼냈다.
그때였다.
푹.
그의 등에 꽂히는 검이 있었다.
“도망부터 쳐야지. 거기서 늑장을 부리면 어떡해?”
뒤에서 들려오는 서늘한 라이언의 목소리. 그는 루안의 등에서 검을 자비 없이 빼냈다.
“윽…….”
극렬한 통증에 루안의 무릎이 풀렸다.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라이언이 여유롭게 창문을 넘었다.
“용케 쓰러지지 않네. 마음에 들어.”
“…….”
“얌전히 핀을 내놓으면 내 군사로 써 주지. 그러기 싫다면…….”
라이언의 검이 이번에는 루안의 목을 겨눴다.
“이 골목이 네가 마지막으로 보는 풍경이 될 거다.”
“……하하.”
별안간 루안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슬쩍 뒤를 돌았다. 하얀 뺨에 피가 한 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너 같은 새끼 밑으로는 안 가.”
루안은 폭죽의 끈을 힘껏 당겼다.
슈욱- 펑!
이제 막 해가 져 가기 시작한 하늘에 폭죽이 터졌다. 라이언이 그것을 올려다보는 사이, 루안이 비척비척 물러났다.
“허억…….”
루안이 떠밀리는 숨을 골랐다.
“도망치는 게 좋을 거야. 이제 곧 황제가 올 테니까.”
황제.
그 말에 라이언의 입꼬리가 떨렸다.
“……일이 재미있게 흘러가네.”
툭.
라이언의 검 끝이 바닥에 박혔다. 그는 그렇게 검을 질질 끌며 루안에게 다가갔다.
기기긱- 기긱-
그 소리에 루안의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그는 계속 뒷걸음질을 쳤다. 라이언의 눈에 광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도망치는 게 좋을 거라고? 너야말로 어디 한번 도망쳐 봐.”
라이언이 검을 꽉 쥐었다. 그 순간, 루안이 골목으로 달려 들어갔다.
라이언이 그 뒤를 따라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
별장에서 황궁으로 돌아오는 길은 여유로웠다. 마부는 적당한 속도로 말을 몰았고, 창밖 풍경은 평화로웠다.
그러나 마차 안의 아우라는 그러질 못했다. 처음엔 카를과 대화를 했고, 어느 순간 손을 잡았고, 정신을 차렸을 땐 그와 입을 맞추고 있었다.
“……하아…….”
아우라가 가쁜 숨을 내뱉었다. 얼마나 입술을 문댔는지 입술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이제, 그만…….”
그 말이 무색하게 카를이 그녀의 허리를 당겨 입술을 머금었다. 혀가 또 그녀의 입술을 쓸었다.
아우라는 머릿속이 녹을 것 같아 그의 팔을 매달리듯 붙잡고 숨을 삼켰다. 입안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그의 혀가 버거웠다. 하지만 달콤한 것만은 사실이어서 결국 최선을 다해 받아 주게 되었다.
“힘들어? 그만할까?”
카를이 이제야 그 말을 입 밖으로 냈다. 아우라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엄지로 닦아 주었다. 그렇게 오래 입을 맞춰 놓고도 아쉬운 눈치였다.
“하아…… 황궁까진…… 얼마나……?”
아우라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카를이 그녀의 턱을 잡고 다시 눈을 맞췄다.
“그렇게 빨리 그 골치 아픈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
“난 이대로 도망이나 갔으면 좋겠는데.”
그 농담조에 아우라는 하마터면 이렇게 말할 뻔했다. 나도 어쩌면 그러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아우라는 그 말을 하지 못했다.
펑!
저 멀리 북서쪽에서 폭죽이 하나 올라와 터졌다.
카를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 폭죽을 바라보았다. 혹은 올 것이 왔다는 얼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