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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21)화 (121/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21화

아우라는 눈을 떴다.

낯선 천장과 이불의 촉감에 놀란 것도 잠시. 그녀는 어제 일을 기억하곤 마음을 놓았다.

‘제니아에서 황궁으로 가는 길에 별장에 들렀지.’

어쩌다 잠들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났다. 머리를 말리다가 졸았던 것 같은데. 카를이 데려다 놓은 걸까.

부스스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를은 없었고 맛있는 냄새만 풍겨 왔다.

“……아.”

무심코 창밖을 내다본 아우라가 나지막이 말했다.

비가 다 내린 하늘이 화창했다. 그 맑은 하늘 아래에 푸른 바다가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다.

“깼어?”

카를의 목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가벼운 셔츠 차림의 그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는 아우라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해 주었다.

“수프를 좀 끓였어. 가서 먹어.”

“저것 좀 봐, 카를.”

그녀가 그의 소매를 툭툭 당기곤 창밖으로 가리켰다.

“너무 예뻐. 그림 같아.”

창밖을 보는 그의 미간이 햇빛에 찌푸려졌다. 그가 보기에도 확실히 예쁜 풍경이었다. 나른한 아우라의 표정만큼은 아니었지만.

가만히 반쯤 내려앉은 눈꺼풀, 긴 속눈썹과 그 아래로 빛나는 눈동자, 살짝 벌어진 입술, 가운 사이로 드러난 가느다랗고 하얀 목덜미.

카를은 난감했다.

‘수프가 끓고 있는데.’

딱 지금 먹어야 좋을 것이다. 늦어지면 볼품없이 졸아들 게 뻔했다.

‘하지만 별수 있나.’

카를이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살짝 놀라 커진 아우라의 눈이 다시금 감겼다.

미끄러지듯 침범해 온 그의 혀가 그녀의 입안을 쓸었다. 잠이 덜 깨 둔한 아우라의 혀를 그가 보채듯이 감아올렸다.

“……응.”

그 압박감에 아우라가 신음을 흘렸다. 그게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카를이 그녀를 부드럽게 눕혔다. 아우라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카를을 올려다봤다.

“아우라.”

“응.”

카를은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입에서 이런 낯간지러운 소리가 나온다는 게.

“네가 더 예뻐.”

“……푸핫.”

아우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 역시 믿을 수 없었다. 저런 진지한 얼굴로 이런 소리를 하다니.

그녀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카를이 씩 웃어 보이곤 다시금 입을 맞췄다. 아까보다 더 깊이 파고드는 혀와 숨결.

훤한 아침부터 들끓는 욕망을 온전히 받아들이긴 쉽지 않았다. 아직 채 풀어지지 않는 몸을 쓰다듬는 손길이 자극적이었다.

“너무 밝…….”

밝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카를이 먹어 버렸다.

아우라가 손을 뻗어 커튼을 치려다가 그대로 하늘에 시선을 빼앗겼다. 하얀 구름이 푸른 하늘에 흐드러지듯 퍼져 있었다.

“어딜 그렇게 봐?”

카를이 속삭이듯 물었다.

“하늘이…… 너무 맑아서.”

“……다행이네. 눈이 심심하지 않겠어.”

그의 손이 가운을 파고들어 그녀의 살결을 한껏 탐했다. 요리를 하느라 살짝 젖은 손바닥이 그녀의 가슴을 쥐었다. 동시에 목덜미를 파고드는 입술과 혀가 자극적이었다.

카를이 아우라의 목덜미에서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아!”

순간 아우라의 몸으로 전기가 흐르는 듯했다. 그녀의 몸이 떨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카를이 쇄골을 살짝 물었다.

그의 이와 혀가 점점 내려가 가슴까지 닿았다. 아우라의 감은 눈 속에서 하얀빛이 퍼져 나갔다.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눈이 심심하지 않겠다는 말은 일종의 선전 포고였다. 애초에 그가 하늘 같은 걸 볼 여유를 줄 리가 없었다.

그의 혀가 아우라의 가슴을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그 끝을 혀로 감았다가 이로 살짝 물기까지 했다. 아우라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예민해진 감각이 이리저리 튀었다.

“아…… 읏. 아! 그만!”

아우라가 결국 도망치듯 몸을 뺐다. 그러나 카를이 바로 그녀에게 따라붙었다.

그는 잔뜩 상기된 아우라의 얼굴에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어때? 아직도 하늘 볼 정신이 남았어?”

“……왜 심술을 부려.”

아우라가 조금 울상을 지었다. 그러자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뭐야, 너. 귀엽게.”

“……어?”

귀엽다니. 그에게 처음 들어 보는 말이었다. 대체 뭐가 귀엽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쪽. 그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싫으면 안 할게. 어떻게 할까?”

다음은 달아오른 뺨과 턱이었다. 그의 입술과 숨결이 연달아 닿아서 간지러웠다. 아우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간지러워. 간지러워, 정말.”

아침부터 정말 웃을 일이 많았다. 카를과 침대에서 뒹굴면서 이렇게 웃다니. 꿈이라고 해도 못 믿을 일이었다.

“간지럽게 안 하면 되는 거야?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

그가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웃었다. 전율이 찌르르 몸속으로 퍼지는 듯했다.

‘싫다고…… 안 해도 되는 거겠지.’

일주일 중 고작 이틀이 지났을 뿐이었다. 조금은 더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었다.

“응? 말을 해 봐.”

카를이 재촉했다. 아우라가 카를의 얼굴을 잡았다. 그리고 입술을 가만히 포갰다가 떨어졌다.

“부드럽게.”

‘정말 서로를 사랑해서 원하는 것처럼.’

한 번이라도 그런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 어떤 오기와 복수심, 연민도 없이.

카를이 미소를 지으며 몸을 세웠다. 셔츠 단추를 하나씩 푸는 손길이 느긋했다. 밝은 아침 햇살이 그의 몸을 적셨다. 그 광경이 다소 선정적이어서 아우라는 얼굴을 붉혔다.

카를이 셔츠를 벗어 침대 밖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와 입을 맞췄다.

가운을 모두 벗기고 몸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나긋했다. 그가 그녀의 가슴을 쥐었다가 허리를 지나 골반을 잡았다. 그러는 내내 맞춘 입에서 달콤한 숨결이 오고 갔다.

카를이 그녀의 무릎을 세우더니 그대로 잡아서 다리를 벌렸다. 이윽고 그가 그녀의 몸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말처럼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하아…….”

이번에는 그가 긴 숨을 내뱉었다. 이런 느릿한 움직임은 그도 처음이라 전에 없이 긴장됐다.

아우라가 팔을 들어 그를 껴안았다. 카를이 그런 그녀의 팔에 살짝 입을 맞췄다. 아우라는 처음 느껴 보는 감각에 입술을 꽉 물었다.

“읏…… 흐읏…….”

비명을 내지를 만큼 날카로운 쾌락은 없었다. 다만 그의 움직임에 따라 감각 하나하나가 살아서 피어오르는 듯했다. 배 속 저 깊은 곳에서 뭔가를 계속 요구하고 있었다. 다리가 덜덜 떨려 왔다.

그녀는 자신에게 계속 물었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좋지? 대체 어떻게…….

그러나 그녀는 답을 몰랐기에 결국 카를의 이름을 불렀다.

“카를…… 카를…… 읏!”

그가 몸을 세우자 몸이 스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눈물 고인 그녀의 몽롱한 시선이 카를을 응시했다. 카를은 모든 피가 아래로 쏠리는 기분이었다. 젠장. 카를이 중얼거리며 그녀를 세게 쳐올렸다.

“아!”

불현듯 치고 들어오는 쾌락에 아우라의 허리가 들렸다. 숨이 턱 막혔다. 카를은 계속 그녀를 쳐올렸다.

“읏! 아!”

“아우라.”

그녀의 신음 사이로 카를의 낮은 목소리가 퍼졌다. 그녀는 낯설었다. 달뜬 숨결에 섞인 자신의 이름 세 글자가.

“아우라, 사랑해.”

그 말을 하는 검고 짙은 눈동자도.

“…….”

습관적으로 아우라는 그 눈동자에 담긴 것을 살폈다.

아우라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여자였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그녀는 아주 잘 알았다.

아우라는 순간 온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카를의 눈에 담긴 건 자신이 받아 왔던 그 어떤 사랑보다도 뚜렷하고 선명했다.

***

“바보 같아.”

아우라가 질척거리는 수프를 스푼으로 떴다. 그 걸쭉한 걸 입에 넣자마자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짜도 너무 짰다.

“수프가 다 끓었으면 그렇다고 말을 해야지.”

무작정 침대로 달려들면 어떡하냐는 말이었다.

카를은 민망해져 아우라의 수프에 물을 넣었다. 

“말을 하려고 했지. 수프를 다 끓였으니 일어나서 식사하라고. 그런데…….”

“그런데?”

어디 들어나 보자 하는 얼굴로 아우라가 그를 봤다. 카를이 숟가락으로 애꿎은 접시만 툭툭 쳤다.

결국 두 사람은 아침에 다시 목욕을 해야 했다. 덕분에 식사는 카를의 생각보다 한참 늦게야 이루어졌다. 졸아들 대로 졸아든 수프와 다 식은 빵과 함께.

“……먹기나 해.”

카를이 결국 패배를 인정했다.

차마 맨정신으로는 말하기 어려웠다. 햇빛 속에 나른하게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예뻤다고. 그래서 수프고 나발이고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고.

그런 소리를 하기엔 그의 정신은 너무 맑았다.

피식 웃는 아우라를 모른 척하고 카를은 수프를 떠먹었다. 미지근한 물까지 부어 버려서 수프는 더 맛이 이상해졌다.

“억지로 먹을 필요는 없어. 수도로 들어가면 아침을 사 줄게.”

“아니야. 먹을래.”

아우라가 수프를 크게 한 입 떠먹었다. 맛없을 게 뻔한데도 식사를 멈추지 않았다.

카를은 기분이 묘했다. 누군가가 자신이 해 준 요리를 먹어 주는 건 처음이었다. 그 상대가 아우라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고.

저 입으로 들어가는 수프 한 입 한 입이…… 뭐랄까, 마음을 간지럽게 했다.

카를이 말했다.

“다음엔.”

“응?”

“다음엔 더 맛있는 걸 해 줄게. 네가 좋아하는 걸로.”

다음.

그 말에 아우라가 멈칫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그들을 보좌했던 기사가 들어왔다.

“폐하, 황후 폐하. 마부가 마차를 고쳐서 가져왔습니다. 이제 곧 출발하셔야 합니다.”

“그래. 식사만 하고 바로 떠나도록 하지.”

“네. 그럼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기사가 문을 닫고 나갔다. 아우라는 닫힌 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 환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직감했다. 이런 소소한 행복도 이제는 끝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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