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20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잔뜩 경계하는 그녀와 달리 카를은 침착했다.
“몸보다 머리부터 감는 게 나으려나. 여자들 씻는 건 하나도 몰라.”
행동을 보아하니 정말 씻겨 주려는 것 같기도 했다.
아우라는 말려 봤자 소용없겠다는 생각이 들자 체념하는 마음으로 콘솔 위의 비누를 가리켰다.
“……머리부터 감는 게 편하긴 하지. 저기, 비누로.”
카를이 비누를 가져와 거품을 냈다. 충분히 거품이 나자 그는 아우라의 머리를 난간에 뉘었다. 그리고 정말 그녀의 머리카락을 감겨 주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을 씻기는 손길이 섬세했다. 시녀들 같은 기술은 없었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아우라가 카를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정말 씻겨 주고 싶어서 그랬던 거야?”
“그럼 뭐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피식 웃었다. 아우라가 괜히 민망해져서 시선을 피했다.
똑, 똑…….
수증기 때문에 천장에 맺혔던 물방울이 떨어졌다. 아우라는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몸은 따뜻하고 그의 손길은 편안했다. 머릿속까지 나른해지는 기분이었다.
“카를.”
“응.”
“넌 내가 또 도망을 가도 붙잡으러 올 거야?”
“응.”
“몇 번이나 그걸 반복해도?”
“응.”
“수십 번, 수백 번을…… 죽을 때까지 그래도?”
아우라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사실 그녀도 알 수 없었다. 왜 갑자기 이런 어린애 같은 질문을 하고 싶었을까.
그가 말없이 아우라를 보았다. 그리고 대뜸 욕탕의 물을 퍼서 그녀의 머리에 쏟았다.
“아!”
놀란 아우라가 눈을 꽉 감았다. 머리카락과 비누 거품이 얼굴로 쓸려 내려왔다. 아우라가 겨우 눈을 뜨고 카를을 보았다. 카를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녀의 질문에 대한 작은 복수에 성공했다는 듯이.
“놀랐잖아. 대체 무슨 짓이야.”
“눈 감아. 거품 들어가.”
그는 엄지로 그녀의 눈가를 쓸어 주었다. 그는 눈을 감은 아우라에게 말했다.
“죽을 때까지 그러면 죽을 때까지 쫓아다니긴 할 건데…….”
“…….”
“그러다간 제국이 망할 테니 다른 방법을 써야겠지.”
“다른 방법?”
“가둬 놓을 거야. 평생 황궁에서 못 나가게.”
그 말에 아우라가 웃었다. 그러나 카를은 사뭇 진지했다.
“농담 같아?”
“음…… 아니.”
마음만은 진심일 거였다. 정말 그렇게 하진 못하겠지만.
‘가둬 놓았을 거라면 일찍이 그렇게 했겠지. 처음부터.’
그러나 카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몇 번이나 아우라를 붙잡는 길을 택했다.
아우라는 문득 생각했다. 그가 도망간 자신을 잡으러 왔던 순간들을.
안센나에서 떨어져 내린 그녀를 그가 받아 주었을 때. 수트라에서 라이언에게 나쁜 일을 당할 뻔했을 때. 북쪽 탑에서 그녀가 목숨을 끊으려 했을 때.
1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그는 세 번이나 그녀를 붙잡아 살렸다.
세 번이면 충분했다. 그도, 자신도 충분히 했다고…… 아우라는 생각했다. 이 이상 더 붙잡는 것도, 붙잡아 주길 바라는 것도 욕심이 아닌가.
카를이 말했다.
“이젠 몸을 씻겨 줄 건데, 싫으면 말해.”
아우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카를이 향유를 탕에 쏟아부었다. 욕실에 백합 향이 진동했다.
그는 천천히 그녀의 어깨와 등을 쓸었다. 손길이 가슴을 스치고 배로 내려갔다. 살결을 은근하게 누르는 듯한 느낌에 속에서 뭔가 끓는 듯했다. 아우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러느니 차라리…….’
아우라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카를에게 말했다.
“너도 탕에 들어와. 같이 씻어.”
결국엔 몸을 섞을 것 같아서 한 말이었다. 이런 손길만 잔뜩 묻히고 목욕이 끝날 린 없으니까.
“그랬다간.”
카를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더듬었다. 그의 손이 미끄러지더니 다리 사이로 손이 들어갔다. 아우라가 숨을 살짝 들이마셨다.
“널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아서. 말했잖아. 욕탕엔 안 들어간다고.”
“지금도 가만두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참는 거야. 물에서 그러는 건 무서워서 싫다며.”
아우라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래.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지.’
리엘과 함께 피크닉에 갔던 날이었다. 그의 서재에서 몸을 섞고 욕실로 갔다. 아우라는 그때 내내 핀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약이 오른 카를이 그녀를 괴롭혔고, 그때 아우라는 말했다. 수영을 못 해서 욕탕은 무섭다고.
‘그걸 기억하고 있었나.’
어쨌거나 그는 묵묵히 아우라를 씻겨 주었다. 물론 그러고만 싶은 손길은 아니었지만.
***
긴 목욕이 끝났다.
아우라에 이어 카를이 몸을 씻었다. 그동안 아우라는 벽난로 앞 소파에 앉아 있었다.
차가웠던 몸이 데워져서일까. 갑자기 잠이 몰려왔다.
‘머리를…… 말려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은 하면서도 그녀는 하염없이 불길만 바라봤다. 그때, 그녀의 머리에 하얀 수건이 툭 올라왔다. 고갤 드니 언제 욕실에서 나왔는지 카를이 서 있었다.
“빨리 말려. 감기 걸려.”
“……응.”
그는 그녀를 두고 어디론가 갔다. 아우라가 힘없이 머리의 물기를 닦기 시작했다. 하지만 팔을 들어 올리는 것도 힘에 부쳤다.
‘너무 피곤해. 지쳤나 봐.’
이윽고 카를이 돌아와 머그잔 두 개를 테이블에 올려놨다. 아우라가 이게 뭐냐는 듯 그를 보았다.
“차야. 꿀을 좀 넣었어.”
“네가 끓였어?”
“그럼 누가 했겠어.”
카를이 피식 웃으며 머그잔을 아우라에게 내밀었다. 아우라가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맛있네.”
정말이었다. 그저 그런 차에 꿀을 넣었을 뿐일 텐데 이상하게 맛이 좋았다.
아우라가 배시시 웃었다.
“정말 맛있어.”
그때 카를이 수건을 들고 아우라의 머리를 말려 주기 시작했다.
“……뭐 해?”
“너 하는 대로 두고 보다간 밤새겠어.”
“먼저 침대로 가면 되잖아.”
“무슨 소리. 같이 갈 건데.”
아우라가 그를 슬쩍 흘겨보았다.
‘그럼 그렇지. 카를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아우라는 그만하라고 말하려다가 그냥 두었다. 정말이지 너무 피곤했고, 머리 말리기는 영 귀찮았다.
머리를 스치는 부드러운 수건의 느낌에 그녀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정말 눈만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툭.
그녀의 이마가 그의 가슴에 닿았다. 카를이 멈칫하며 아우라를 보았다. 그녀는 거짓말처럼 잠들어 있었다.
“아우…….”
그는 그녀를 부르려다가 그만두었다. 대신 수건을 내려놓고 젖은 머리카락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선 그와 똑같은 향이 났다.
카를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려던 순간이었다. 아우라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아, 미안.”
“……가자.”
카를이 그녀를 안아 들었다.
‘어딜 가? 설마 이렇게 정신 못 차리는 사람을 침대로 데려가게?’
아우라는 속으로만 따졌다. 너무 힘들면 말도 제대로 안 나오는 모양이었다.
그는 정말로 침대로 가서 아우라를 눕혔다. 아우라가 낭패라는 얼굴로 고개만 저었다.
“정말…… 정말…… 못…… 해.”
뭉개지는 발음에 카를이 픽 웃었다. 그는 이불을 끌어다가 아우라의 몸에 덮어 주었다.
“자.”
그 말을 듣자 아우라가 비로소 실낱같이 정신을 차렸다. 옆자리에 머리를 괴고 누운 카를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우라가 카를의 뺨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잘…… 자.”
그녀는 흐린 의식을 저편으로 보내며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금방 잠들어 버렸다.
“…….”
카를은 한참이나 그녀를 그렇게 바라만 보았다. 잠든 모습이 꼭 아이 같았다. 조심스럽게 얼굴을 쓰다듬었다. 새근거리는 숨결이 손에 닿았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됐을까.’
시작은 아우라가 덜덜 떨며 벽난로 앞에 서 있었을 때였다. 그 뒷모습에서 유난히 두드러지던 작은 어깨.
그 어깨를 보니 처음에는 짜증이 치밀었다. 저렇게 덜덜 떠는 주제에 무슨 양보를 하겠다고. 평소처럼 제멋대로 굴어도 모자란 상황에서. 그래서 억지로 욕실로 끌고 갔다.
원래는 그 안에 두고 나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짜증스러움은 정체 모를 충동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되지도 않는 억지를 부리며 옷을 벗겼다.
그녀의 몸을 보면 그 충동이 사라질 것 같았다. 혹은 그 몸을 마음껏 만지면 사라질 것 같았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았다. 뭔가가 계속 치밀어 올랐다. 신경질이 날 정도로 거슬리게. 자꾸만, 자꾸만.
남은 건 몸을 섞는 일뿐이라 그러려고 했다. 그녀가 머리를 다 말리면 침대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아우라가 바보처럼 꾸벅꾸벅 졸 때까지만 해도.
그런데 그때 그녀가 제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아무런 경계심도, 걱정도 없는 얼굴을 하고서.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
카를이 그녀를 끌어당겨 힘껏 껴안았다.
몸 저 안쪽에서 들끓고 있던 것이 화르르 솟아나는 듯했다. 더, 더, 더 세게 품에 안고 싶었다.
그는 처음부터 이런 걸 하고 싶었다. 하염없이 그 어떤 목적도 없이 안아 주는 것. 그녀가 그의 품에 있다는 걸 순수하게 확인하는 일.
사실 카를은 요 며칠 이어지는 평화가 불안했다. 아우라는 핀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핀에 대한 체념?
‘아니. 그럴 리가 있나.’
카를이 아는 한 아우라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부인보다는 한 나라의 왕녀가 되는 걸 선택할 여자였다. 그게 제 의무이자 존재 이유라고 생각할 테니.
불안감은 집착을 낳기 마련이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낯설 정도로 집착적인 면모를 보인다는 것을.
‘그러니까 죽지 마. 죽지 않겠다고 약속해.’
‘그러니까 내년에 또 와. 어서 대답해.’
그러면 그녀는 약속하고, 대답했다. 마치 떼를 쓰는 아이에게 선물을 주듯.
그리고 은연중에 또 이렇게 묻는 것이다.
‘넌 내가 또 도망을 가도 붙잡으러 올 거야?’
사람을 미치게 하려는 게 분명했다.
‘그런 질문을 하는 주제에 약속은 무슨 약속.’
카를이 아우라를 더 꽉 끌어안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진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는 썩 착한 짓이 아닌 걸 알면서도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잠에서 깨지 않도록 가만히 머금었다가 부드럽게 핥았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황홀할 정도로 달콤한 입술이었다.
아우라는 모를 것이다. 그녀가 그를 불안하게 할 때마다 결국 그의 오기를 건드린다는 것을.
‘붙잡아야지. 수백 번이건, 수천 번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