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19화
아우라와 카를이 신전에서 나왔을 때였다.
투둑…… 툭…….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우라가 손바닥을 들자 그 위로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카를이 하늘을 보았다. 하늘엔 어느새 먹구름이 가득했다.
“금방 그칠 것 같진 않은데. 빨리 돌아가자.”
그는 외투를 벗어 아우라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왕궁 정원을 가로질렀다.
왕궁을 떠나기 직전, 아우라는 뒤를 돌아보았다. 비 내리는 왕궁의 풍경은 스산했다.
‘머지않은 시일에 예전 모습을 되찾을 수 있겠지.’
아우라는 그런 바람을 남기고 마차에 올라탔다. 그들을 보좌하던 기사가 창문에 노크를 했다. 카를이 창문을 열었다.
“폐하, 보통 비가 아닐 것 같아 마차를 좀 빨리 몰까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러도록 해. 최대한 빨리 카사 땅으로 진입한다.”
“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기사가 창문을 닫고 마부에게 말을 전했다. 카를이 아우라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비된 길이 아니라 마차가 꽤 흔들릴 거야. 날 잡아.”
“아니, 난 괜찮-”
덜컹!
“꺅!”
갑자기 요동치는 마차에 아우라가 카를의 팔을 붙잡았다. 이렇게 요란하게 출발하는 마차는 처음이었다.
“괜찮을 리가 있나.”
카를이 피식 웃었다. 아우라는 그를 흘겨보곤 그의 팔을 더 꽉 잡았다.
창문이 비로 다 얼룩질 정도로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아우라가 중얼거렸다.
“갑자기 웬 비가…….”
덜컹, 덜컹!
고르지 않은 길을 갈 때마다 마차가 흔들렸다.
쫙!
채찍으로 말을 후려치는 소리가 빗소리에 뒤섞여 들려왔다. 말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아우라는 걱정이 됐다.
‘무사히 도착할 수 있겠지?’
“걱정돼?”
카를이 물었다. 아우라는 아니라고 하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얼굴은 안 봐도 불안투성이일 게 뻔했으므로.
“조금 불안해. 무섭기도 하고.”
그가 아우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러면 좀 나아?”
“어? ……어.”
아우라는 겨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떨렸다. 이 모든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아우라는 자신을 달랬다.
‘따지고 보면 온갖 짓을 다 한 사이야. 감정의 밑바닥까지 내보이면서. 이제 와서 왜……. 정신 차려, 아우라.’
그녀도 인정하곤 있었다. 요즘 카를과의 관계가 꽤 좋았다는 것을. 적어도 남은 일주일 동안은 그와 잘 지내고 싶었으니.
그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은 좋은 마무리를 위해서였다. 이렇게 행동 하나하나에 설레자는 게 아니라.
문득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아우라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덜컹!
마차가 세게 한 번 더 흔들렸다. 그리고 마차는 별안간 카를이 앉은 방향으로 팍 기울어졌다.
“꺄악!”
아우라의 몸이 그에게로 쏟아졌다. 카를이 재빨리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녀의 뺨이 그의 가슴팍에 닿았다.
“괜찮아?”
“어? 어어…… 무슨 일이지?”
“바퀴가 빠진 것 같아. 일단 나가자.”
카를이 아우라를 데리고 마차 문을 열고 나갔다. 그들은 쏟아지는 비를 꼼짝없이 맞으며 상황을 살폈다. 카를의 말처럼 마차 바퀴가 하나 빠져 있었다.
“제길…….”
카를이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폐하! 황후 폐하! 괜찮으십니까?”
기사가 급히 다가와 물었다. 그때 마침 마부가 빠진 바퀴를 낑낑거리며 들고 왔다. 그 바퀴는 대가 몇 개 나가 있었다.
“바퀴부터 고쳐야겠군. 가능하겠나?”
카를이 물었다. 마부는 바퀴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고개를 저었다.
“당장은 무리입니다. 비라도 안 온다면 모를까요.”
“어쩐다……. 황궁까진 얼마나 남았지?”
카를이 기사에게 물었다.
“반나절은 달려야 합니다. 마차의 말을 타시겠습니까?”
“이 빗속에서 황후가 그렇게 오래 말을 탈 순 없다. 근처에 묵을 곳을 알아보는 게 좋겠어.”
하지만 이 주위는 드넓은 평야였다. 다들 난감한 채로 말들을 아꼈다. 카를의 젖어 가는 어깨를 보는 아우라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뭐라도 생각해야 해. 뭐라도.’
그때였다. 그녀의 머릿속에 뭔가가 스쳤다.
“저기.”
그녀가 입을 열자 모두 그녀를 보았다.
“제니아와 접한 국경을 넘어왔다면 카사의 동쪽 솔리안 해안가와 가깝지 않나?”
“네. 솔리안 해안가가 멀지 않습니다.”
갑자기 웬 해안가? 카를이 딱 그런 표정으로 아우라를 보았다.
“솔리안 해안가에 황족의 별장이 있어, 카를. 지금은 비어 있을 거야.”
“아…… 아. 그렇지.”
카를은 생각지도 못한 곳이었다. 별장은 한가한 황족이 드나드는 곳이었고, 그는 한가한 적이 없었으니.
“일단은 거기로 가는 게 좋겠군.”
그는 더 생각할 것 없다는 듯 마차의 말을 빼냈다. 그리고 아우라를 번쩍 들어 말 등에 앉히며 말했다.
“외투 잘 여며.”
그렇게 말하는 카를은 이미 흠뻑 젖은 채였다. 아우라는 미안한 마음에 그의 외투 옷깃을 꽉 모아 잡았다.
“제가 먼저 가서 별장을 살피겠습니다!”
기사가 훌쩍 다른 말에 오르더니 우렁찬 기합과 함께 빠르게 달려 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혼자 황제 부부를 보좌해야 하니 부담이 큰 듯했다.
카를이 아우라의 뒤에 올라탔다. 그는 말을 굉장히 빨리 몰았다. 사방의 풍경이 일그러지며 스쳐 지나갔다. 아우라는 본능적으로 그의 허리를 꽉 잡았다.
***
그들이 해안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 그들은 서둘러 별장으로 들어섰다. 바다에 눈길을 줄 틈 같은 건 없었다.
별장에는 훈기가 감돌았다. 기사가 해 놓은 듯 벽난로에 불이 피워져 있었다. 아우라는 카를의 외투를 벗고 곧장 벽난로 앞으로 갔다.
가을비를 너무 많이 맞아서일까. 아우라의 몸이 미약하게 떨렸다.
“후우…… 그래도 있을 만하군.”
카를이 비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머리고 얼굴이고 옷이고 그는 남김없이 젖어 있었다. 기사가 얼른 카를과 아우라에게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별장 관리인이 말하길, 하룻밤 지내시는 데엔 무리가 없으실 거라고 했습니다. 오신다는 말을 듣고 바로 옷가지와 목욕 준비도 해 두었다고 합니다.”
카를이 수건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와 목욕 시중이 필요하실 테니 황궁에서 시종과 시녀를 데려오겠습니다.”
그 말에 아우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소. 이 비에 어딜 또 다녀온다고.”
“하지만…….”
카를이 딱 잘라 말했다.
“자넨 별장에 딸린 별실에서 쉬도록 해. 식사건 목욕이건 알아서 할 테니. 내일 오전에 출발할 테니 그때 다시 오도록.”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기사는 결국 푹 젖은 몰골로 별장을 나섰다.
아우라는 여전히 벽난로 불을 쬐고 있었다. 몸이 좀처럼 따뜻해지질 않았다.
“아우라.”
카를이 다가왔다. 갑작스러운 재난 때문에 그는 조금 예민해 보였다. 그의 시선이 벽난로에 뻗은 아우라의 창백한 손끝으로 갔다.
“불을 쐴 게 아니라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가야 해. 욕실로 가.”
“네가 먼저 씻어. 넌 다 젖었잖아.”
셔츠 바람으로 말을 몬 카를을 두고 먼저 씻을 수는 없었던 아우라가 말했다.
카를은 뭔가를 꾹 참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젖고 안 젖고는 안 중요해. 네 체온이 내려갔으니 네가 더 급해. 어서.”
지시적인 말투에 괜한 반발심이 든 아우라가 손등으로 카를의 이마를 툭 짚었다.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네 이마도 차가워. 네가 먼저 씻어.”
카를이 순간 정색을 하곤 그녀의 손을 잡았다.
“왜, 왜…….”
“……너 정말…… 안 되겠다.”
“뭐가?”
그는 대답 대신 대뜸 그녀를 안아 들었다.
“뭐, 뭐야! 놔!”
당황한 아우라가 그 품을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카를이 놔줄 리가 없었고, 그대로 욕실로 들어갔다. 갓 채워 놓은 온수 덕분에 욕실엔 수증기가 가득했다. 그는 욕실에 아우라를 내려놓았다.
“억지로 이러는 게 어디 있어! 카, 카를?!”
볼멘소리를 하던 아우라가 기겁했다. 카를이 난데없이 아우라의 옷 단추를 풀기 시작한 것이다. 놀란 그녀가 뒷걸음질을 쳤다.
“무슨 짓이야!”
그녀가 뭐라고 하건 말건 카를은 끝까지 따라붙었다. 그는 기어이 단추를 다 풀어 버리더니 드레스를 끌어 내렸다. 아우라가 필사적으로 드레스를 가슴께에서 붙잡았다.
“카를!”
“별수 없잖아. 사람 말을 안 듣고 오기를 부리는데.”
그 침착한 목소리에 아우라의 배 속에서부터 소름이 쫙 끼쳤다. 잠시 잊고 있었다. 카를이 이렇게 집요한 데가 있다는 것을.
“……알았어. 내가 알아서 씻을 테니까 이만하고 나가.”
아우라가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드러난 어깨에 닿았다. 드레스로 겨우 가린 봉긋한 가슴에도.
그의 엄지가 그녀의 쇄골에 와 닿았다. 순간 그녀가 움찔하고 물러났다. 언제 이렇게 밀려난 건지. 등이 차가운 욕실 벽에 닿았다.
“씻겨 줄게.”
아우라의 눈이 커졌다. 지금 뭘 해 준다고? 그녀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시, 싫어.”
“아무 짓도 안 할게. 응?”
카를이 그녀의 드레스를 잡아당겼다. 단추가 다 풀린 옷은 몸을 가리는 데에 별다른 도움이 안 됐다. 옷자락 사이로 그의 손이 들어와 맨허리를 감쌌다. 아우라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이 갑작스러운 모든 일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카를이 무감하게 말했다.
“욕탕에 들어가지도 않을 테니까. 그냥 씻겨만 줄게.”
아우라가 침을 꿀꺽 삼켰다. 욕실의 온기가 부족해서 그런 건지, 카를의 눈빛 때문인 건지 몸이 다시 떨려 오기 시작했다. 카를이 그런 그녀의 등을 감쌌다.
“어서 들어가. 떨지 말고.”
카를이 기어이 아우라의 손에서 드레스를 떼어 냈다. 그 아래 걸치고 있던 속옷이 힘없이 내려갔다.
아우라는 어쩔 수 없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다. 반면 그는 그녀의 몸을 무신경하게 바라보았다. 지금으로선 그녀의 몸을 덥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듯이.
“어서.”
그렇게 재촉하기만 했다.
아우라가 떠밀리듯 욕탕에 들어가 앉았다. 이 모든 상황이 정말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 긴장감에 몸을 감싸는 온기조차 잘 느껴지지 않았다.
카를이 욕탕 난간에 걸터앉았다. 아우라가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거기서 뭘 하게.”
“뭘 하긴. 씻겨 준다니까?”
그가 젖은 셔츠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