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18화
당연하게도 제니아 왕궁은 텅 비어 있었다.
색이 바랜 왕궁 건물과 깨진 창문들. 잡초가 무성한 대정원과 물이 흐르지 않는 분수대.
아우라는 정원에 서서 멍하니 그런 풍경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내던 곳이었다. 그런 곳이 이렇게 쓸쓸하게 변하다니. 직접 보니 기분이 더 참담했다.
축 처진 아우라의 어깨를 카를이 감싸며 물었다.
“신전으로 가자. 어느 쪽으로 가야 하지?”
“아…… 남쪽에 있어.”
아우라가 앞장섰다. 두 사람은 신전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문득 아우라는 이상함을 느꼈다. 왕궁은 텅 비어 있었지만 폐허 같진 않았다. 적어도 전쟁의 잔해는 다 치워져 있었다.
“왕궁은 카사 황실 소유일 텐데, 네가 여길 관리했어?”
“기본적인 것만.”
카를이 관리인들을 둔 건 사실이었다. 다만 황제 부부가 오는 건 비밀이라 그들을 잠시 물려 둔 상태였다.
“관리라고 할 건 없어. 내가 황위에 올랐을 때 이미 엉망진창이었거든. 3년을 버려진 채로 있었으니 말 다 했지. 지금은 사람을 시켜 석상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 잔해를 치워 둔 정도야.”
“…….”
“이렇게 올 줄 알았으면 좀 더 손봤을 테지만.”
카를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아우라는 그런 그를 빤히 보았다.
“왜 그런 표정으로 봐?”
“우리 왕궁을 신경 쓰고 있는 줄은 몰랐어.”
“정말로 신경 썼다면 정원 꼴이 이렇진 않았겠지.”
그가 구두 굽으로 바닥을 툭툭 찼다. 제멋대로 자란 잡초가 짓이겨졌다.
계속 걸어가려던 카를이 멈칫했다. 아우라가 그의 소매를 잡은 채 서 있었다.
“아우라?”
“왜 항상 그렇게 말해?”
“……질문의 의미를 모르겠는데.”
“제니아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그렇잖아. 예전에 안센나에 역병이 돌았을 때도 그랬어. 이미 의사를 보내 놓곤 내게는 도와주지 않겠다고 말하고, 지금도 왕궁을 돌봐 놓고도 신경 쓰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잖아.”
아우라가 또박또박 따져 물었다. 그녀 역시도 지금에서야 깨달은 점이었다. 그는 제니아를 신경 쓰면서도 막상 그녀에겐 아닌 척을 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을 좋아한다면서. 그럼 더 생색을 내야 하는 게 아닌가. 왜 항상 퉁명스럽게 말하며 선을 긋는 걸까.
카를이 덤덤하게 말했다.
“신경 쓰고 있다고 어떻게 말해.”
“……?”
“내가 무슨 염치로?”
카를이 소매를 잡힌 손을 유려하게 돌렸다. 순식간에 아우라는 그에게 손을 잡혔다.
“어쨌거나 여길 쑥대밭으로 만든 건 내 형이잖아.”
“하지만 네가…….”
“그래. 내가 그놈을 죽였어. 그렇다고 해서 우리 집안이 저지른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아우라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가 이런 죄책감을 느끼는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역병 때 일은? 그땐 왜 거짓말을 했어?”
그때 아우라는 굉장히 화가 났었다. 화뿐이랴. 카를에 대한 실망감에 눈물마저 흘렸다.
그 일을 생각하자 아우라는 다시 울컥했다. 그녀는 주먹으로 가볍게 그의 가슴을 쳤다.
“왜 그랬냐고.”
“그건…….”
카를이 머뭇거렸다. 젠장. 그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네가 루안 그 자식과 한참 노닥거렸잖아. 그런 상황에서 순순히 의사를 보내 줬다고 하면…….”
“하면?”
“내가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것 같잖아.”
“……뭐?”
아우라는 그만 웃고 말았다. 아무렇지 않아 보일까 봐 그랬다니.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아우라가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는 생전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조금은 당황하고, 조금은 민망해했다. 그리고 그 동요를 애써 무표정으로 가리려 했다. 잘되진 않는 것 같았지만.
카를이 대뜸 그녀의 눈을 가려 버렸다.
“나 보지 마.”
“질투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으셨다?”
“한마디만 더 하면 입 맞출 거야.”
이런 걸 협박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뭐가 됐건 아우라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는 빈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아우라가 그의 손을 잡고 제 눈에서 치웠다. 그녀는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가자.”
잠시 후, 그들은 신전에 도착했다.
끼이익.
카를이 무거운 나무 문을 힘껏 밀어 열었다. 썩은 나무에서 먼지와 가루가 후드득 떨어졌다.
신전은 서늘하고 건조했다. 아우라는 숨을 들이마셨다. 먼지와 고요의 냄새가 함께 나는 듯했다.
두 사람은 신전의 단상으로 걸어갔다. 석상들을 대부분 깨져 있었다. 무너진 천장으로 들어온 낙엽이 제멋대로 굴러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신전 앞쪽의 거대한 여신상만은 그대로였다. 여신상은 양팔을 벌린 채 그들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를이 석상을 우러러보았다. 카사는 신앙이 발달한 나라가 아니었다. 이렇게 큰 석상을 보는 것도 그로선 처음이었다.
“아우라.”
“응?”
“넌 신을 믿어?”
순수한 질문이었다. 신을 믿기에 굳이 여기까지 온 걸까 싶어서.
아우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하지만 필요하다고는 생각해.”
아우라가 무너진 단상을 손으로 쓸었다. 하얀 대리석 가루가 먼지와 함께 묻어 나왔다.
“사람들은 믿을 게 필요하거든. 마음을 내려놓고 안식할 공간도 필요하고.”
안식. 그 말에 카를이 물었다.
“쉬고 싶어서 온 건가?”
“그런 것도 있지만…… 내가 말했잖아. 너, 결혼하고 우리 왕가에 인사 온 적이 없지 않느냐고.”
아우라가 앞으로 걸어갔다. 자박자박. 그녀의 구둣발 소리가 신전을 울렸다.
그녀가 여신상 앞에 서더니 뒤돌아 카를을 봤다.
“이 자리야.”
“?”
“예전에 왕궁 중앙 회랑에 그림이 하나 걸려 있었어. 이 신전에서 열렸던 부모님의 결혼식을 그린 그림이었는데…… 두 분이 딱 여기에 서 계셨거든.”
그 그림은 대단히 크고 화려했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왕비와 붉은 옷을 입은 국왕. 그들이 부부가 됐음을 선포하며 하늘을 향해 경배하던 대신관. 모여들어 축복하는 사람들.
“어렸을 땐 여기서 결혼하고 싶었어. 부모님처럼.”
“…….”
“물론 철이 들면서 체념했지. 왕녀는 대체로 정략결혼을 하게 되니까. 결혼식은 외국에서 올리기 마련이고.”
아우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도…… 언젠가 남편이 생기면 데려오고 싶었어.”
카를이 뚜벅뚜벅 다가와 그녀의 앞에 섰다.
“그 얘길 왜 이제야 하는데? 3년 전엔 얼마든지 와 볼 수 있었잖아.”
아우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무서워서.”
카를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카사 황실이 제니아에 다녀오는 걸 반대할까 봐?”
“아니. 그런 것보다는…… 어린애 같은 마음이긴 한데…….”
아우라가 말문이 막혔다. 이런 이야기까지 할 마음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내가 정말 무서운 건 너였거든. 나는 정말 너 하나만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민망한 듯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당시엔 네가 너무 바빠 보였어. 공부에다가 검술에다가…… 또 황실 눈치도 분명 보였을 거고. 만약에 내가 제니아에 다녀오자고 부탁했는데 네가 거절하면…… 상처받을 것 같았어.”
“…….”
“누군가와 여기 오는 건 내 오랜 꿈이었거든.”
천진한 소녀의 바보 같은 꿈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당시의 아우라는 남편과 여길 오는 것이 진짜 결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까지도.
카를은 말이 없었다. 아우라는 짐짓 밝게 미소를 지었다.
“그냥 옛날이야기야. 이렇게…….”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름다운 석상, 성가대의 노래, 축복의 박수, 미소 짓는 부모님. 꿈꿔 왔던 모든 게 무참히 무너져 있었다.
“이렇게…… 됐으니까.”
카를이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그래서?”
“…….”
“아직도 내가 무서워?”
아우라가 고개를 저었다.
“거절당하는 건 이젠 상처 축에도 못 끼지. 못 온다고 한다면 혼자라도 왔을 거야. 하지만…….”
그녀가 픽 웃었다.
“바로 와 준다고 했을 땐 기쁘긴 했어.”
카를은 지금 그녀의 웃음을 오랫동안 기억할 것 같았다. 후 하고 불면 새털처럼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평화. 그런 평화가 겨우 둘 사이에 내려앉은 느낌 역시.
“카를. 사실 우리 부모님은 널 탐탁지 않게 생각하셨어.”
“그러셨겠지. 이해해. 넌 고귀하니까.”
왕국의 하나밖에 없는 귀한 딸이었다. 그에 비해 카를 자신은 그림자나 다름없는 황자였고.
아우라가 장난처럼 말했다.
“하지만 지금 살아 계셨다면 좋아하셨을지도 몰라.”
“그런가.”
“네가 날 지키려고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아셨다면…….”
아우라의 말문이 막혔다. 아까부터 애써 참아 왔던 눈물이 기어이 고이고 말았다.
눈물이 하필 카를의 손등에 투둑 하고 떨어졌다. 아우라가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아아…… 정말 울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가 얼른 눈가를 닦았다.
“……나가자. 너무 오래 머물렀어.”
그녀의 계획은 이런 게 아니었다. 이곳에 온 이유를 혼자만 더듬고 가는 것이었다. 어쩌다가 카를에게 미주알고주알 털어놓게 됐는지. 그녀 자신도 이해가 안 될 정도였다.
그때, 카를이 그녀를 가만히 안아 주었다.
“왜 말을 하다 말아.”
밉지 않은 핀잔이었다. 달래듯 등을 쓰다듬는 손길에 아우라가 더 울컥했다.
“내가 널 지키려고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아셨다면…… 기뻐하셨을 텐데. 그렇지?”
카를의 말에 아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우라는 딱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아쉽네. 잘 보일 기회가 날아가서. 그런 기회 흔치 않았을 것 같은데.”
카를이 농담조로 말하며 그녀를 위로했지만 아우라의 눈에선 계속해서 눈물이 나왔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게 슬펐고, 무너진 이 신전이 슬펐고, 이 농담과 이 품이 너무 따뜻해서 슬펐다.
“그만 울어.”
카를이 아우라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 위로가 서툴기 짝이 없어서 오히려 눈물이 그쳤다. 그녀가 배시시 웃자 그도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