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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17)화 (117/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17화

테오가 놀라서 카를에게 되물었다.

“제니아에 다녀오신다고요? 게다가 당장 내일이라뇨.”

“그래. 황후와 다녀올 거야. 밤에 돌아오지.”

테오는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했다. 황제가 하는 의외의 일들은 모두 다 황후로부터 시작되니까.

보좌관의 입장에선 그 행보가 달갑진 않았다. 하지만 부하로서는 마냥 싫다고만 할 순 없었다. 황후와 엮일수록 황제는 알게 모르게 변해 가고 있었으니. 좀 더 안정감이 생겼다고 해야 할까. 일단은 혼자서도 잠을 그럭저럭 자고 있다는 것부터가 그랬다.

하지만 테오는 이번 일만은 말리고 싶었다.

“폐하, 라이언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알아. 나와 황후의 안전은 내가 알아서 해. 조쉬에게 황궁의 보안을 맡길 생각이고. 업무는 부득이하게 네게 맡겨야겠군.”

“일이야 당연히 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몰래, 조용히 다녀올 거야. 너와 조쉬 말곤 그 누구도 알 수 없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

황제 부부가 제니아에 다녀오는 건 비밀이란 뜻이었다. 테오가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

“폐하, 내일 오후에 실시아로 보낸 원정대가 도착합니다. 그들이 실시아 공국의 가계도를 완벽하게 구했다고 합니다. 적어도 그 자료는 바로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실시아 공국의 가계도. 카를은 그 말에 타이를 느슨하게 당겼다.

“그래…… 하필 내일 온다 이건가.”

“네. 그러니 하루만 더 늦게 출발하시지요.”

‘테오의 말이 맞지. 제니아는 언제든지 갈 수 있으니.’

하지만 쉽게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너, 결혼하고 한 번도 우리 왕가에 인사 온 적 없잖아.’

그 말을 하던 아우라는 분명 서운해 보였다. 그 서운함을 숨기려 티스푼으로 커피 잔을 젓던 손길은 또 어떻고.

일의 순서와 시급함? 따져야 했다. 따지는 게 옳았고. 그걸 따져 가며 아우라와의 약속을 하루 미룰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루를 미루면 하루만큼의 서운함이 더 쌓일 거였다.

게다가 아우라의 그 부탁은 의미가 남달랐다. 카를이 아무리 방어적으로 생각해도 가리키는 방향은 하나였다.

바로 남편으로 인정해 준다는 의미.

“아니. 제니아부터 다녀오는 걸로 하지. 실시아의 자료는 네가 잘 가지고 있어, 테오.”

“폐……. 네, 알겠습니다.”

테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쯤 되면 황명이었으니 그는 말릴 권리가 없었다.

“일은 최대한 해 놓고 가지.”

그 말을 지키려는 듯 카를이 자리에 앉았다. 오늘도 산처럼 쌓여 있는 서류를 하나씩 해치울 생각인 듯했다.

테오도 슬쩍 보좌관의 자리에 앉았다. 카를이 서류를 하나 펼치며 말했다.

“테오.”

“네.”

“내가 없는 동안 북서쪽의 밀론 지역을 주시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건 이미 카를이 일찍이 황제군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내가 없어도 밀론에서 폭죽이 올라오면 바로 그쪽으로 가라. 가서 무조건 루안을 지키도록 해.”

“네, 폐하.”

테오는 루안의 정체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 루안을 지켜야 하는지는 아직 듣지 못했다. 다만 그는 이렇게 추측할 뿐이었다.

‘폐하께서 이토록 밀론에 집착하신다면 분명 핀과 관계가 있을 거야.’

반면 카를이 제니아로 가면 밀론과의 거리도 멀어진다. 그렇게 되면 유사시에 카를이 바로 움직일 수 없다.

‘……그런데도 꼭 가셔야겠다는 건…….’

역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였다.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

수도의 허름한 카페. 그곳에서 라이언과 신디온은 로브를 쓴 채 마주 앉아 있었다.

신문을 보던 라이언이 키들거렸다.

“테인 공작이 결국 국경 밖으로 쫓겨났군.”

신디온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맛이 고약해서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반면 라이언의 잔은 이미 깨끗했다. 신디온은 생각했다.

‘귀공자처럼 생겨서는 은근히 적응력이 좋단 말이지.’

오랫동안 이어진 떠돌이 생활에도 라이언의 피부는 매끈하기만 했다. 옷매무새는 조금 흐트러졌지만 행동과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그동안 신디온은 수도의 여관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라이언이 그를 찾아왔다. 소문으로만 듣던 공명석을 들고.

“이, 이걸 어디서 나신 겁니까?”

“테인 공작이 가지고 있었어.”

“그럼 공작은…….”

“살려는 뒀어.”

살려는 뒀다는 건 죽기 직전까지 몰고 갔다는 뜻이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신디온은 궁금했다. 왜 그를 죽기 직전까지 몰고 갔는지가 아니라 왜 살려 뒀는지가.

그 질문의 의미를 알아들은 라이언이 피식 웃었다.

“우리 조카님께서 뒤처리를 해 주실 테니까. 실시아의 우리 군대는 다 빼돌렸겠지?”

“네. 이미 수도 외곽에 숨어 있습니다.”

“그럼 잠시 대기해. 그 전에 할 일이 있으니.”

“무슨 일 말입니까?”

라이언이 말없이 공명석을 들어 올렸다. 공명석은 희미하게 푸른빛을 내고 있었다.

“찾아야지. 핀을.”

공명석을 들고 핀을 찾아다닌 지도 며칠이 지났다. 그러나 공명석은 좀처럼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핀은 수도 가장자리에 있는 듯합니다.”

“그렇겠지. 공명석이 빛을 발하는 거로 보아 수도 밖에 있진 않을 테고…….”

라이언이 대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로브를 툭툭 털고 해사하게 웃었다.

“뭐, 발품을 팔아 보는 수밖에.”

“예. 출발하시죠.”

신디온도 동전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따라서 일어났다.

“주군을 잘못 만나 고생이 많군, 신디온.”

더러운 골목을 걸으며 라이언이 말했다.

“아닙니다. 탐나는 게 있으면 달려들어야죠.”

“하하…… 역시 자네도 참 재미있는 사람이야.”

골목에 라이온의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신디온은 뛰어난 마법사였다. 제니아에서 태어났으면 왕궁 마법사가 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제 출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실시아 마법사가 배척당하는 현실에 맞서 싸울 야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라이언이 나타났다.

라이언은 약속했다. 자신을 도우면 마법사로서 이름을 떨치게 해 주겠노라고.

처음엔 거절했다. 대공이나 되는 자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게 실시아 마법사의 팔자였기에.

‘그래. 자네 말이 맞아. 대공의 권력이란 고작 그 정도지. 하지만…… 황제가 되면 말이 달라지지 않겠나?’

미친 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명색이 대공이니 적당히 장단을 맞춰 줄 필요는 있어 보였다. 그래서 대공의 성에서 의사 노릇을 했다.

시간이 갈수록 신디온의 생각은 바뀌었다. 라이언은 정치적으로 명석했으며, 군사적으로는 과감했다. 수트라 성 뒤편에서 점점 늘어 가는 군사를 볼 때마다 신디온도 기대를 품게 됐다.

신디온이 앞서가는 라이언의 등을 보았다.

‘이 사람이 정말 황제가 될 수 있을까?’

그는 이내 그 질문을 거뒀다.

‘어차피 이미 난 공범이야. 이렇게 된 이상……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돕는 수밖에.’

“어?”

라이언이 한 마디 내뱉었다. 그가 품에서 공명석을 꺼냈다.

“왜 그러십니까?”

“공명석에서 열기가 올라서 봤더니…….”

공명석의 불빛이 더 환해졌다. 라이언이 한쪽 입꼬리를 감아올렸다.

“신디온. 혹시 나침반이 있나?”

“아, 예. 있습니다.”

신디온이 주머니에서 나침반을 꺼내 라이언에게 주었다. 라이언이 능숙하게 그것을 살폈다.

“……북서쪽이군. 북서쪽이면…….”

라이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밀론이면…… 새로운 제니아인 지구 아닌가?”

“그렇긴 합니다만. 핀을 그곳에 숨겨 놓은 걸까요?”

“그러게. 왜 그곳일까?”

도통 답을 알 수가 없었다. 황후가 밀론에 핀을 숨겼다? 혹은 황제가 황후 몰래 밀론에 핀을 숨겼다? 뭐가 됐건 딱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건 답은 하나였다. 밀론에 가야 한다는 것.

신디온이 물었다.

“그쪽으로 바로 출발할까요?”

“아니. 그 전에…… 신디온, 귀를.”

“네, 전하.”

신디온이 귀를 가까이 댔다. 라이언이 그에게 뭔가를 속삭이기 시작했다.

***

마차가 국경을 넘었다.

창밖으로 제니아의 황폐한 국토가 보였다. 농사를 짓던 땅도 민가도 다 엉망이었다.

아우라가 턱을 괸 채 그런 제니아 땅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생각이 참 많은 표정이었다. 앞에 앉은 카를은 그녀를 그냥 두고 보았다.

애초에 제니아에 오는 건 이런 꼴을 본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를 감당하는 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몫이었다.

“카를.”

“응.”

“여긴 정말 예쁜 땅이었어. 남쪽으로 강이 흐르고 토지가 비옥해서…… 지금 같은 가을이면 이런저런 농작물이 열리거든.”

“그래?”

“그 모습이 살아 있을 때 미리 와 볼 걸 그랬나 봐. 그럼 너도 보기 좋다고 했을 텐데.”

“내년에 오면 되지. 그때쯤이면 제니아인들도 다 들어와 살고 있을 테고, 이 땅에 뭐라도 심었을 테니까.”

그 말에 아우라가 미소를 지었다. 생각만 해도 뿌듯했다. 다시 제 땅을 찾은 국민과 농작물을 키울 수 있는 땅. 거기에 마법이 있으면 농작물도 더 풍요롭게 자라날 것이다.

카를이 손을 내밀었다. 아우라가 그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러니까 내년에 또 와.”

그가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다섯 개의 손가락 끝에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입을 맞췄다.

아우라는 다른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칼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카를이 눈을 반듯하게 뜨고 그녀를 직시했다.

“어서 대답해.”

그가 아우라를 채근했다. 도망칠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듯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그녀도 더 이상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도망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 내년에 또 오는 걸로 해.”

“같이.”

“…….”

“같이 와.”

“……그래. 같이 오자.”

아우라는 결국 거짓말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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