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15화
마차가 이궁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엘리제가 황궁에서 지낸 지도 몇 달이었다. 알게 모르게 짐이 늘어 옮길 것들이 많았다.
처음 황궁에 들어왔을 때가 떠올랐다. 핀을 가지고 도망을 치던 위험했던 순간도, 본궁의 꼭대기 층에서 몸을 숨겨야 했던 답답한 시간도.
‘공작저로 돌아가면 정말 바쁠 거야. 집안사람들도 많이들 혼란스러워할 테고.’
그래도 그게 그녀가 해야 할 몫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이제 출발하셔야 합니다.”
시종이 엘리제에게 말했다. 그녀가 마차에 오르려 할 때였다.
저 멀리에서 익숙한 이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엘리제가 환하게 웃었다.
“조쉬 님. 테오 님.”
“엘리제 영애.”
테오가 미소로 화답했다. 조쉬는 쭈뼛거리며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일 뿐이었다.
“무사히 공작 위를 되찾으신 걸 축하드립니다. 지금껏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돌아가시는 건가요?”
“네. 오전에 황제 폐하를 뵙느라 시간이 좀 늦었습니다. 두 분, 지금까지 많은 도움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별말씀을요. 황실 쪽도 영애의 도움을 받아 전 공작의 죄를 증명했는데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테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황실과 공작가가 긴밀해진다면 두 사람도 앞으로 만날 일이 잦을 거였다.
한편, 조쉬는 딴청을 피우며 서 있었다. 테오가 조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
“뭐 해. 인사드리지 않고.”
“아…… 추, 축하드립니다.”
조쉬는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이놈의 혀는 어쩐지 굳은 듯했다. 테오는 픽 웃더니 선심 쓰듯 말했다.
“제가 이궁을 마지막으로 확인해 드리죠. 혹시 두고 가는 게 있으실 수도 있으니까요. 두 분 이야기 나누십시오.”
“야, 야! 너 어디 가!”
조쉬가 붙잡았지만 테오는 이궁으로 가 버렸다. 조쉬를 보고 엘리제가 생글생글 웃었다. 근심이 가신 그녀의 얼굴이 전에 없이 환했다.
“저기, 엘리제 영애님은…….”
그때 조쉬의 마음이 갑자기 확 가라앉았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다. 다음에 볼 때는 그녀가 ‘테인 공작’이 되어 있으리라는 것을. 반면 조쉬 자신은 고작해야 남작가의 서자였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겠지.’
어차피 멀어질 일밖에 남지 않았다. 뭐라도 마음을 전해야 했다.
“용기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제나요.”
“그런가요?”
“네. 전 공작을 피해 황궁에 오셔서 황제 폐하와의 알현을 요청하셨던 것도, 공작가에서 도망 나오신 것도…… 그리고 국무 회의장에서도요. 그 모든 모습이…… 저는 잊기 어려울 겁니다.”
조쉬가 표현할 수 있는 마음은 이게 한계였다. 기억하겠다는 것. 조쉬는 그런 자신이 초라했지만 스스로의 주제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엘리제는 그런 조쉬를 물끄러미 보았다.
“예전에 공작가에 오셔서 무척 큰 소리로 황제 폐하의 칙서를 읽으셨죠?”
“……아.”
조쉬 자신조차도 잊고 있던 일이었다. 그때 카를은 테인 공작의 손을 잡으려 했다. 조쉬는 그게 왠지 자신의 탓 같아서 엘리제에게 뭐라도 해 주고 싶었다. 그저 목청 터져라 소리를 지르는 게 고작이었지만.
“아…… 알고 계셨습니까?”
“당연하지요. 제가 가족을 제외하고 무도회에서 처음으로 춤을 춘 분인데요.”
조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자신을 이용하는 줄로만 알았지, 첫 춤의 상대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의 목덜미가 서서히 달아올랐다. 그 모습에 엘리제가 작게 웃고는 그에게 말했다.
“나중에.”
“……예?”
“나중에 혹시라도 제가 궁금해지면, 그러니까…… 무슨 이유에서라도 좋으니까요.”
조쉬가 고개를 갸웃했다. 궁금해지면?
“공작으로서의 모습이나, 가주로서의 모습이나, 혹은 여자로서의 모습이나…… 뭐든 좋으니 제가 궁금해지면 공작가를 찾아와 주세요.”
엘리제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조쉬는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앞뒤 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 박힌 건 한 구절뿐이었다.
여자로서의 모습이나.
엘리제가 꾸벅 인사를 하고 마차에 오르려 한 순간이었다.
“저, 저기!”
조쉬가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막상 별말은 못 하고 우물쭈물했다. 이윽고 그가 손을 쓱 내밀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감사해요.”
엘리제가 그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그러나 조쉬는 좀처럼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조쉬가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엘리제는 살짝 놀란 듯했다. 그는 전에 없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예.”
그가 그녀의 손을 놓고 물러났다. 그리고 민망한 듯 애먼 마부에게 외쳤다.
“뭐 해! 출발하지 않고.”
마차는 그대로 출발했다. 황궁을 나서는 마차가 덜컹덜컹 흔들렸다.
‘뭐, 뭐지…….’
엘리제는 멍한 얼굴로 손등만 쓰다듬었다.
잠시 후, 엘리제는 비로소 그 대답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
늦은 밤, 아우라가 창가의 테이블 앞에 앉아 생각에 빠져 있었다.
루안이 병사를 받지 않았다고 했다. 그 행동이 아우라의 확신에 조금 더 힘을 실어 주었다.
‘핀이 없다면 병사를 받지 않았을 리가 없어. 단순한 부담감 때문에 마지막 선물을 그렇게 매몰차게 거절할 루안이 아니야.’
아우라의 계획은 이러했다.
조만간 제니아인 지구에 간다.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루안을 불러낸다. 미리 심어 놓은 병사들을 이용해 그의 방을 뒤진다.
유사시에는 병사들을 이용해 루안을 공격할 수도 있었다. 그가 핀을 몸에 지니고 있다면 그 방법밖엔 없을 테니.
‘핀을 찾으면 그 후에는…….’
그녀는 창밖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북쪽 탑의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처음 죽으려 했을 땐 고민 없이 저곳으로 달려갔다. 그때의 절망은 저곳과 끔찍할 만큼 잘 어울렸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모든 걸 좋게 마무리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싶었다.
‘저곳은 다신 가고 싶지 않아.’
좀 더 나은 곳. 희망이, 의미가 있는 곳. 죽는다면 그런 곳에서 죽고 싶었다.
똑똑.
노크 소리에 아우라가 고개를 돌렸다. 이 시간에 나타날 이는 한 사람뿐이기에 아우라는 조금 긴장됐다.
끼익.
문이 열리니 아니나 다를까, 카를이 나타났다. 아우라가 담담한 척 물었다.
“카를. 무슨 일이야?”
“전할 소식이 있어서.”
“이 밤중에?”
그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고개가 그의 눈에 맞춰 위로 올라갔다.
“네가 아주 좋아할 만한 소식이거든. 오늘 일정 다 소화하자마자 온 거야. 내일까지 기다리기가 어려워서.”
‘방금 일정이 끝났으면…… 무척 피곤할 텐데.’
재판부는 오늘 저녁에야 테인 공작에 대한 판결을 내렸다. 그가 받은 형벌은 국외 추방이었다. 맨몸으로 쫓겨난 그는 이제 죽을 때까지 카사 땅을 밟을 수 없었다.
그 일로 황실이 아직 시끄러웠다. 카를도 지금까지 그 뒤처리를 했으리라.
“얼마나 대단한 소식이기에 쉬지도 않고 여기로 왔어?”
카를은 대답 대신 손끝으로 아우라의 손등을 툭툭 쳤다. 아우라는 제 손등과 카를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소릴 하려고 이러는 거지?’
그때 카를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파란 달빛에 그의 검은 눈이 또렷하게 빛났다.
“엘리제가 테인가가 샀던 제니아의 땅을 황실에 헌납하기로 했어.”
“……헌납? 그 많은 땅을?”
테인 공작이 거의 전 재산을 털어 제니아의 땅 절반을 샀다. 그렇다면 엘리제는 공작가의 재산 대부분을 헌납하는 셈이었다.
“맞아. 그걸 돌려받는 게 내가 엘리제를 돕는 조건이었거든.”
아우라는 놀라서 입을 막았다.
“엘리제를 도운 게…… 제니아 땅 때문이었어?”
“황실이 가지고 있는 땅, 엘리제로부터 받은 땅. 그걸 합하면 제니아 국토 대부분이 모이지.”
“…….”
“네게 줄게. 내일 당장이라도.”
“!”
“정확히는, 제니아인들에게 돌려주지. 국토를 가졌으니 실질적으론 독립인 셈이야.”
“……뭐?”
아우라가 홀린 듯 되물었다. 카를이 아우라의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 넘겨 주었다.
“물론 조건이 있지.”
“…….”
“계속 카사의 황후로 있어. 너만큼은.”
언젠가 카를이 이런 조건을 건 적이 있었다. 아우라가 핀을 포기하면 제니아인들을 독립시켜 주겠다고.
그때는 카를의 말이 허울뿐인 유혹으로 들렸다. 하지만 땅을 준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땅과 마력을 돌려받으면…… 제니아는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아우라가 카를을 와락 안았다.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이 기분은 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하는 걸까.
제니아의 왕녀로서는 그에게 감사해선 안 됐다. 빼앗긴 국토를 돌려받은 것이니. 그저 기뻐해야만 옳았다.
하지만 그저 기쁘지만은 않았다. 고마웠고…… 걱정됐다.
카를이 제니아인들에게 땅을 돌려주면 카사인들의 불만이 거세질 것이다. 축제에서 봤던 연극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괜찮아, 아우라. 괜찮을 수 있어.”
카를은 아우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 말했다. 그의 큰 손이 그녀의 등을 쓸어 주었다.
아우라는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을 정리했다.
‘적어도 마법사들이 마력을 얻은 후에 땅을 돌려주게 해야 해. 마치 평화 협정의 대가처럼. 그래야 카사인들도 반발이 적을 거야.’
아우라가 카를의 품을 벗어났다.
“고맙긴 하지만 당장은 좀 일러. 제니아 수뇌부들과 의견을 좀 나눠야 해.”
“……그들을 황실로 초대해 주지.”
아우라는 그 말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그는 루안과 아우라의 만남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에 돌려주면 되겠어?”
“그래.”
“확실한 시기를 말해 주면 이쪽이 일 처리 하기가 편한데.”
확실한 시기.
사실 아우라는 이미 마음에서 움튼 욕망을 느끼고 있었다.
카를을 보고 있노라면, 죽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는 그를 원하는 걸 넘어 사랑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렇게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이 뭔지 알 것 같으니까.
하지만 아우라는 카를을 선택할 수 없었다. 이대로 핀을 포기하면 남은 생을 분명 후회 속에서 살게 될 테니까.
이제 와서 제니아를 외면할 순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국민에게 받아 온 사랑에 대한 너무나도 당연한 대가였다.
그것을 알기에 제대로 결정해야 했다. 그녀 자신의 끝을.
“일주일.”
“…….”
“일주일 후에 돌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