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14화
카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죄는 아니지. 하지만 그 군사가 황실을 향해 칼을 겨누면 그건 죄가 되지.”
“제 군사는 황실에 칼을 겨눈 적 없습니다!”
“테인 공작.”
카를이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국무 회의장에 차가운 침묵이 흘렀다.
“내가 자네의 모든 면면을 다 밝히면 자네는 죽게 돼. 그리고 나는 내 손에 피를 묻히는 게 지겨운 사람이고.”
“…….”
“이 자리에서 깔끔하게 자네의 입으로 죄를 밝혀. 그럼 목숨만은 건져 줄 테니.”
테인 공작을 아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의 죄를 다 밝히고 증명하려면 나름의 인력과 시간, 돈이 들 거였다. 어차피 벌을 받게 할 거라면 그런 낭비는 하고 싶지 않았다.
“……저는…….”
테인 공작의 눈빛이 떨렸다. 젊은 황제는 자신만만했다. 그는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아니야. 이건 나를 떠보기 위함이다. 내 군사와 라이언의 군사는 그 어떤 접촉도 없었어. 모든 것은 구두로 진행됐어.’
테인 공작은 끝까지 버텨 보기로 했다.
“저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폐하.”
카를이 얕은 한숨을 쉬었다.
“북부 국경에서 그대의 하인이 잡혔네. 실시아로 가는 모든 이를 황실의 이름으로 수색하는 걸 몰랐던 모양이지?”
카를은 품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 대신들에게 내밀었다.
“라이언이 그대에게 제 군사의 반을 주기로 약속했더군. 자네와 라이언의 인장까지 착실히 찍어서 말이야.”
편지를 읽은 대신들이 경멸 섞인 시선으로 테인 공작을 보았다. 테인 공작은 사색이 됐다.
‘저, 저건…… 라이언이 해결한 줄 알았는데?’
상식적으로 그렇지 않은가. 라이언은 테인 공작의 뒤통수를 치고 달아났다. 그라면 당연히 실시아로 떠난 하인도 잡아 죽여야 옳았다. 그 하인이 편지를 전달하면 라이언도 곤란할 테니.
‘……! 일부러 잡지 않은 건가? 내가 반역자인 자신과 내통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테인 공작은 맥이 탁 풀려서 입만 쩍 벌렸다. 카를이 속으로 혀를 찼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라이언이 한 수 위군.’
“폐하! 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라이언 대공이 제 시종을 겁박해서 벌인 일입니다! 제가 연관되어 있다는 증거 따윈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한 제국의 공작을 몰아붙이실 순 없으십니다.”
“한 제국의 공작이라. 그래. 그 문제도 해결해야 하지. 공작가는 참 손볼 곳이 많아.”
카를이 조쉬에게 눈짓했다. 조쉬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회의장을 나갔다. 이윽고 회의장의 문이 열리고 엘리제가 나타났다.
“엘리제 영애가 아닌가!”
“저, 정말 폐하께서 데리고 계셨던 건가?”
놀란 대신들이 한마디씩 했다. 엘리제는 한껏 긴장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손끝도 떨렸다. 그러나 장갑 덕분에 그 떨림이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
“엘리제…… 엘리제! 네가 감히!”
테인 공작이 참지 못하고 외쳤다. 엘리제는 서늘한 눈으로 그를 볼 뿐이었다.
“공작가의 집안일은 집안사람이 말하게 하는 게 좋겠군.”
카를의 말에 엘리제가 깊이 심호흡을 했다.
‘난 이들을 설득하러 온 게 아니야. 내 말을 하러 온 거지.’
그녀가 모두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제 아버지이신 선대 공작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 그분의 유언장이 함께 사라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엘리제의 음성은 힘차고 침착했다. 마치 이 말을 위해 오랫동안 기다려 온 사람 같았다.
“그리고 얼마 전, 아버지의 인장이 찍힌 유언장을 입수했습니다. 만약 유언장을 어떤 경위로 입수했는지 궁금하시다면-”
엘리제가 테인 공작을 빤히 바라봤다. 귀부인의 태가 나는 엘리제는 흐트러진 행색의 테인 공작을 짓누르는 듯했다.
“그건 추후 소상히 밝혀 드리지요.”
테인 공작의 군사와 죽은 황태자의 군사에 쫓기던 집사, 그 집사의 죽음까지 다 밝혀 주겠다는 뜻이었다.
“그럼 유언장을 읽겠습니다.”
엘리제가 유언장을 펼쳤다.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가 국무 회의장을 채워 갔다.
***
미나는 국무 회의에서 있던 일을 아우라에게 전달했다. 아우라는 차를 마시며 그 이야기를 들었다.
“테인 공작의 건이 재판소로 넘어갔다고?”
아우라가 되묻자 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폐하. 라이언 대공과 접촉하여 황실에 반역하려 한 혐의와 공작 위 부정 계승 혐의를 공식적으로 조사한다고 합니다.”
“잘됐구나. 재판부가 나서면 황실이 더 애를 쓸 필요도 없을 테니.”
또 그의 죄가 증명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카를이 하나둘 모아 둔 증거만으로도 충분할 테다.
“황제 폐하는?”
“예?”
“황제 폐하는 회의를 끝내고 뭘 하고 계시지?”
미나는 내심 놀랐다. 아우라가 카를의 일과를 궁금해하는 건 처음이었다.
“아, 예. 듣기론 테인 공작의 일로 대신들이 많이 놀라서 회의가 계속 이어졌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하고 계시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마는…….”
“하긴.”
한 제국의 공작이 재판에 넘겨진 상태니 그럴 법도 했다. 게다가 황실은 그 꼬리를 잡는 과정을 지금껏 꼭꼭 숨겨 뒀다. 대신들에게 설명할 게 한둘이 아닐 것이다.
똑똑.
문이 열리고 한 시녀가 들어섰다.
“폐하. 엘리제 영애가 찾아왔습니다.”
“그래? 들여보내.”
시녀가 종종걸음으로 방에서 나갔다. 이윽고 엘리제가 방으로 들어왔다.
“황후 폐하.”
엘리제가 환하게 웃었다. 지금껏 봤던 그 어떤 모습보다도 밝았다.
“표정을 보니 잘 해결된 모양이구나.”
“황후 폐하 덕분입니다.”
그녀가 공손하게 예를 차렸다. 아우라는 조금은 어색하게 그녀를 한 번 안아 주었다.
“고생 많았어.”
“……감사합니다. 정말 황후 폐하가 계시지 않았다면…… 저는 무너졌을 거예요.”
엘리제가 울컥 올라오는 울음을 삼켰다.
“다음에 볼 땐 영애가 테인 공작이 되어 있겠군.”
“네.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우라가 미소를 지었다. 엘리제는 그새 확신을 담아 말하는 법을 배운 듯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영애가 이궁에 머무를 일도 없겠어.”
“네. 내일 공작저로 갈까 합니다. 아직 황제 폐하와 상의할 일이 남아서요.”
“상의할 일?”
“아, 그게…… 조금 나중에 설명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엘리제는 대답하기 난감해했다. 아우라가 손을 내저었다.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어. 그럼 늦지 않게 이궁으로 가 보도록. 지금 걸친 것들은…….”
아우라가 엘리제를 쭉 훑어보았다. 역시 잘 어울린다 싶었다.
“선물로 주지.”
“……감사합니다, 폐하.”
엘리제가 다시 한번 활짝 웃었다.
그녀가 떠나고 아우라는 발코니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엘리제가 바쁘게 이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엘리제의 머릿속은 온통 미래일 테지.’
그것만으로도 아우라는 뿌듯했다. 저 아이가 미래를 그릴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었다는 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더 나눠 줄 수 있는 게 없어 아쉽기도 했다.
어쨌거나 도통 풀리지 않을 것 같던 공작가의 일이 해결됐다. 이제 남은 건…….
‘나도 어서 핀의 봉인을 풀어야겠지.’
모든 일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니 아우라도 응당 그래야 했다.
“미나.”
“네, 폐하.”
“어제 말한 건? 진행하고 있어?”
“안 그래도 아까 진행했습니다.”
“……그래. 잘했어.”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라이언이 나타난 이상 그녀도 계획을 실행해야 했다. 핀에 서서히 다가갈 수 있을 만한 계획을.
***
루안은 자신의 눈앞에 선 한 무리의 건장한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황후 폐하께서 보내신 병사들입니다.”
황후의 방 시종이 나섰다. 그는 품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황후 폐하께서 전달하라고 하셨습니다.”
루안은 편지를 받아 읽었다.
「루안. 이별 선물로 뭘 줄까 하다가…… 자경단원이 부족할 것 같아 개인 병사를 보내. 우리의 우정을 생각해서라도 꼭 받아 줬으면 해. 예전과 같은 이유로 카를에게는 비밀로 해 줘.
루안, 네 행복을 빌게. 언제나.
-아우라.」
짤막한 편지였지만, 루안의 가슴엔 큰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이별 선물.’
그 말이 특히나 크게 와 박혔다.
하지만 아우라의 말이 맞았다. 두 사람은 이별했고, 앞으로도 이별한 상태여야 했다.
마음 같아선 이들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모두 다부진 자들이었고, 자경단에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아우라의 선물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안 되는 거야. 아우라의 사람을 들일 순 없어.’
만에 하나 아우라가 핀이 여기 있다는 걸 눈치챘다면? 저들이 핀을 훔칠지 누가 알겠는가.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했다.
루안이 입을 열었다.
“황후 폐하께 전해 주십시오. 마음은 감사드리나 병사를 받을 수는 없다고요.”
“……정말이십니까?”
“네. 이유를 물으시면…… 제가 황후 폐하께 빚을 지길 원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전해 주십시오.”
“아…… 네, 알겠습니다.”
“가 보십시오.”
루안이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돌아섰다. 이윽고 문이 여닫혔다. 루안은 그들이 나간 걸 확인하곤 제 망토를 들쳤다.
허리띠에 달린 작은 가죽 가방. 그 안에 핀이 있었다. 카를이 다녀간 후, 루안은 한 번도 핀을 몸에서 떼질 않았다.
‘아우라…….’
이번에야말로 널 지킬 수 있기를. 루안은 간절히 빌었다.
***
그 시각, 황후의 방 시종은 병사들과 밀론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인적 드문 골목에서 시종이 병사들에게 은밀히 속삭였다.
“아까 시녀장님 말씀 들었지?”
“네.”
“들었습니다.”
출발하기 전, 미나는 이들에게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폐하의 친구분께서 병사들을 받아들인다면 자경단이 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근처에서 은거하며 임무를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시종이 그 임무가 무엇인지 묻자 미나가 덧붙였다.
‘만약 그 친구분이 위험에 빠지면 목숨을 바쳐 그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황후 폐하께서 밀론으로 오시면…… 폐하의 명령에 따르면 됩니다.’
그 명령이 뭔지에 대해선 전해 듣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들이 받은 돈만큼 충성을 바쳐야 한다는 것.
시종이 재촉하듯 말했다.
“자, 그럼 너흰 이 근처에서 숨어 있거라. 절대 들켜선 안 된다.”
“네!”
병사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은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