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13화
엘리제는 멍하니 거울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어제 오후 카를이 이궁에 다녀간 일을 되짚어 보았다.
“테인 공작을 잡아 놨다. 내일 국무 회의에서 모든 걸 밝힐 생각이야.”
그녀의 심장이 가만히 내려앉았다.
“그렇군요.”
“준비하도록 해. 이쪽은 준비를 마쳤으니.”
카를은 담담하게 말했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준비하겠습니다.”
카를에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엘리제는 침착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공작 위를 이어받기 위해 많은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 교육은 통치나 화술에 집중되어 있었다. 누군가와 싸운다거나 비판하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게다가 상대는 삼촌이었다. 그녀를 어려서부터 봐 온.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이제 곧 국무 회의가 열릴 것이다. 그녀로서는 모든 게 결정될 시간이었다.
엘리제는 아버지의 유언장을 다시 읽었다. 이미 수십 번은 다시 읽어 본 유언장이었다. 자신도 황실도 오늘을 위해 힘썼다. 이제 와 약해질 순 없었다.
“후우…….”
엘리제가 깊은숨을 몰아쉴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울리더니 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린 엘리제가 깜짝 놀랐다.
“황후 폐하?”
그곳엔 아우라가 미나가 있었다. 엘리제가 얼른 일어나 다가갔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오랜만이구나.”
아우라가 이궁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그녀가 떠났을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오늘 국무 회의에서 유언장을 공개한다고 들어서. 준비는 다 되었나 하고.”
“아, 예. 준비를 다 마치고 기다리는 중입니다.”
아우라는 엘리제를 살짝 훑어보았다. 엘리제는 공작저에서 도망 나오며 별다른 짐을 챙기지 못했다. 황실에서 의류를 제공하긴 했지만 아주 좋은 건 아니었다.
지금도 그랬다. 드레스는 평범했고, 머리는 직접 땋아 올린 듯했다.
“수수하구나. 예쁘긴 하다만 국무 회의에 어울리는 차림은 아니지.”
“알고는 있습니다만, 차림을 갖출 만한 상황이 아니라 이렇게라도 가 볼까 합니다.”
엘리제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가 기가 죽은 건 차림 때문도 있었다. 황궁의 국무 회의장은 크고 화려한 것으로 유명했다. 참석하는 이들도 모두 고위 귀족일 것이다.
“내가 옷을 가져왔으니 갈아입도록 해. 장신구도, 신발도.”
“네? 아, 아닙니다. 저는 이걸로 충분합니다.”
엘리제가 습관적으로 사양을 했다. 아우라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했다.
“엘리제. 정치는 이미지야.”
“…….”
“돈이건 명예건 외모건 남을 압도하는 이가 하는 말은 무시할 수가 없어. 특히 여성은 남자들에게 얕보이지 않게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하지. 장담하건대, 그대로 가면 아무도 네 말에 제대로 귀 기울이지 않아.”
정치는 이미지다. 그 말이 엘리제의 마음으로 푹 들어왔다. 딱딱한 아우라의 말투마저도 상냥하게 들릴 정도로.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혼자 입긴 어려운 옷이야. 미나, 엘리제를 도와.”
“네, 폐하. 이쪽으로 오십시오.”
미나가 엘리제를 가림막 뒤로 안내했다. 엘리제는 그 안으로 들어가 미나의 안내를 받아 드레스를 갈아입었다.
삭, 삭…….
코르셋의 끈을 당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우라는 애잔함을 담은 시선으로 가림막을 보았다.
“많이 긴장한 것 같던데.”
“조금…… 그렇긴 합니다.”
가림막 안에서 엘리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우라는 피식 웃곤 잠시 상념에 빠졌다. 그렇게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아우라가 입을 열었다.
“엘리제.”
“네, 폐하.”
“너는 그들을 설득하러 가는 게 아니야. 너의 말을 하러 가는 거지.”
“…….”
“너의 말에 힘을 담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고.”
“……그게 무엇인가요?”
“너의 확신.”
왕녀 시절, 아우라는 국왕은 따라 이따금 국무 회의에 참석해야 했다. 일종의 왕족 수업이었다.
아우라는 국무 회의에 들어가기 직전에 항상 긴장했다. 잘못된 의견을 내서 비웃음을 살 것만 같았다. 그런 아우라에게 국왕은 이렇게 말했다.
“확신을 가져라, 아우라. 네 말을 지킬 수 있는 건 너 한 사람뿐임을 잊지 말고.”
그런 말들이야말로 아우라가 이어받은 것 중 가장 중요한 유산이었다. 아우라는 자신도 누군가에게 그 유산을 남기고 싶었다. 그리고 엘리제라면 아깝지 않게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엘리제가 가림막에서 나왔다. 중후한 분위기의 녹색 드레스가 잘 어울렸다.
“다행이구나. 잘 맞아서.”
엘리제는 부끄러운지 아우라를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아우라가 말했다.
“미나. 장갑을.”
“네, 폐하.”
미나가 도톰한 검은 장갑을 아우라에게 내밀었다. 아우라가 장갑을 엘리제의 손에 직접 끼워 주었다.
손을 내어 주긴 했지만 엘리제는 의아했다. 아직 손이 시린 계절은 아닌데 왜?
“넌 분명히 긴장할 거야. 그러지 않으려 해도 손부터 떨겠지.”
“아.”
“이게 그 떨림을 좀 가려 줄 거다.”
아우라가 장갑을 낀 엘리제의 양손을 살짝 힘주어 잡았다.
“그렇다고 너무 떨진 말고.”
“……폐하.”
엘리제는 벅찬 기분을 느꼈다. 긴장감은 오간 데 없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엘리제가 조금 망설이다가 아우라를 안았다.
“감사합니다, 폐하.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제가 모든 일이 제자리를 찾고 제대로 된 힘을 얻게 되면…… 꼭 보답하겠습니다.”
‘내가 그 보답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아우라가 힘 빠진 미소를 지었다.
“말이라도 고맙군.”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제를 놓았다.
“미나, 엘리제의 머리를 만져 줘. 난 이만 돌아갈 테니.”
“네, 폐하.”
아우라는 손끝에 입맞춤을 남기더니 엘리제의 이마에 댔다.
“잘해 봐. 얕보이지 말고.”
엘리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우라는 유유히 방을 떠났다.
잠시 멍하게 있던 엘리제는 창가로 다가가 바깥을 살폈다. 곧 창밖으로 아우라가 정원을 가로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엘리제는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떨림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마법처럼.
***
국무 회의는 평소와 같이 진행되었다. 몇 가지 사안에 대해 논의했고, 모두 금방 결정이 났다. 카를이 회의를 오래 끄는 걸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앞에서 대신들은 무의미한 기 싸움 따윈 하지 않았다.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판단과 결정. 회의는 오직 이 흐름으로 흘러갔다.
카를이 말했다.
“준비된 논의는 이제 다 끝난 것 같고. 더 할 이야기가 남았소?”
침묵이 돌아왔다.
“그럼 내가 급하게 한 가지 안건을 좀 올려 보지. 오래 걸릴 것 같진 않은데, 괜찮겠소?”
대신들이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시지요.”
“저희는 좋습니다, 폐하.”
뭐 그리 큰일이겠냐 싶은 분위기였다. 카를이 눈짓하자 조쉬가 회의장 문을 열었다. 그리고 들어오는 이에 대신들이 깜짝 놀랐다.
“……?! 테인 공작님?”
“고, 공작님이 어째서?”
그는 경비병들에게 부축을 받으며 들어섰다.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진 옷매무새. 어딘가 아픈 듯 찡그린 표정. 그의 몰골은 한마디로 말이 아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폐하?”
한 대신이 놀라 물었다.
“엊그제 테인 공작이 도망친 사형수인 라이언 전 대공과 접촉했지. 그것도 공작저에서, 은밀하게.”
대신들이 놀라 테인 공작을 보았다. 라이언과 접촉하다니. 사실이라면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공작은 공작대로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다.
“테인 공작은 라이언에게 칼을 맞았고, 어제 내게 그것을 일러바치러 왔더군.”
“그, 그런데 공작님의 몰골이 왜……?”
“아, 내가 지하 감옥에 가두었소.”
“예?! 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도주의 우려가 있어서 말이오.”
대신들이 술렁였다. 공작이 라이언과 접촉은 했다지만 해를 입지 않았나. 그들이 보기엔 감옥에 들어갈 이유도, 도주의 우려도 없었다.
“폐하…… 저는 억울합니다! 라이언은 저를 찾아와 황실을 치자고 유혹했고, 저는 그것을 거절했을 뿐입니다!”
테인 공작이 쉰 목소리로 외쳤다. 카를이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바로 저 말이 거짓 같아서 말이야.”
“거짓이 아닙니다!”
“말 길게 하고 싶지 않아. 테오.”
“네, 폐하.”
카를이 손을 내밀었다. 테오가 준비된 서류를 그 손에 올렸다. 카를은 오랫동안 준비한 서류를 테이블에 툭 던졌다.
“이걸 경들에게 보여 줄 수 있어 속이 다 시원하군.”
“이게 무엇입니까?”
“테인 공작이 숨겨 놓은 군사와 그 움직임에 대한 조사 보고서.”
테인 공작이 움찔했다.
“경들도 읽어 보면 알겠지만 수도 동남쪽 이데나 숲은 공작가의 비밀 사유지네. 그곳에 군사를 숨겨 두고 그 몸집을 불려 왔더군.”
“비, 비밀 사유지라니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과연 모르는 일일까. 자네의 조카는 아주 잘 알고 있던데.”
테인 공작은 속으로 외쳤다.
‘……엘리제!’
“엘리제요? 엘리제 영애는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한 대신이 물었다. 카를이 어깨를 으쓱했다.
“엘리제는 내가 데리고 있소.”
국무 회의장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황제가 엘리제를 데리고 있다니. 그들은 그 이유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엘리제가 날 찾아와 말하더군. 자신의 삼촌인 웨일 테인이 황태자가 섭정을 할 때 부당한 방법으로 공작 위를 찬탈했다고.”
“그,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테인 공작이 말했다.
“그거야 점차 알아 가면 될 문제일 테고. 아무튼 그대의 조카딸이 그동안 자네를 아주 열심히 관찰했던 모양이야. 공작가의 땅이 어떻게 군사 요새가 되었는지 자세히도 알고 있더군.”
“……큭.”
“그곳의 군사 몇만 데려다가 조금만 고문을 해도 주인의 이름이 나오겠지. 안 그래?”
서류의 내용을 훑어보던 대신들의 얼굴에 배신감이 어렸다.
“대체 이 많은 군사를 뭐에 쓰려고…….”
“허, 참……. 이 정도 군사면 돈도 적잖이 들었을 텐데…….”
그러나 테인 공작은 물러나지 않았다.
“마, 맞습니다. 제가 불안증이 심해 개인 군사를 늘렸습니다. 하지만!”
카를이 태연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귀족이 군사를 가진 게 죄는 아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