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12)화 (112/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12화

아우라는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다정한 말과 자연스러운 입맞춤 같은 것. 그런 것들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카를의 입술이 닿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약속이라도 한 듯 눈을 감고 그의 팔을 잡았다.

그가 아우라의 입술을 머금었다. 그의 혀가 부드럽게 아우라의 입안을 유영했다. 아우라는 힘이 빠지는 듯해서 그의 팔을 더 꽉 잡았다. 그러자 그가 그녀의 팔을 잡고 제 목에 둘렀다. 더, 더 가까이 오라는 듯이.

등을 쓸어내리던 손길이 허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아우라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

아우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 그 햇빛이 카를의 속눈썹에 걸쳐진 듯했다. 그 장난기 어린 소년 같은 눈길에 아우라가 배시시 웃었다.

“이걸로 이자는 다 지불한 거지?”

“아니.”

“얼마나 비싸게 받으려고.”

카를의 손이 아우라의 드레스 단추로 갔다. 아우라는 그가 무슨 짓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면서도 그냥 두었다.

“나머지는 침실에 가서 받을까 하는데.”

“황제 폐하께서는 바쁘지도 않으신가 봐? 대낮부터 여자를 침실로 끌어들이는 걸 보면.”

“제국의 저주지. 이따위 나라 그냥 망해 버리라고 해. 나도 너처럼 도망이라도 좀 가 보게.”

카를은 남이 들으면 절대 안 될 말을 잘도 했다. 그가 장난스레 물었다.

“그래서, 침실로 가 줄 거야?”

아우라는 어쩔까 싶었다. 머릿속은 가지 말라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이미 너무 많이 했다. 여기서 일탈 한 번 더 한다고 해서 뭐가 어떻단 말인가? 어차피 끝은 정해져 있는데.

“그-”

그래, 라고 말하려 할 때였다. 서재 밖에서 테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폐하! 안에 계십니까?”

카를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여간 도움이 안 돼.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곤 엄숙하게 외쳤다.

“급한 일이라도 있나? 그게 아니면 조금 있다가 나가지.”

카를은 그녀의 뺨에 연신 입을 맞췄다. 웬만하면 나가지 않을 작정인 듯했다.

“그게…… 테인 공작이 찾아왔습니다.”

그 말에 카를과 아우라 모두 멈칫했다. 카를이 예민해진 눈으로 물었다.

“그런 알현 일정은 없지 않았나?”

“네, 그렇긴 합니다만…… 사안이 다급한 것 같아 일단 제 권한으로 들였습니다. 죄송합니다.”

테오는 분명 ‘들였다’고 했다.

“집무실에 들였다는 뜻인가?”

“네. 지금 곁에 있습니다.”

알현실도 아니고 집무실이라니. 테오가 괜히 그랬을 리는 없다.

아우라가 먼저 카를을 살짝 밀며 속삭였다.

“나가 봐.”

카를은 마지막으로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엿듣고 싶으면 엿들어도 돼.”

그리고 그제야 그녀를 놓고 서재를 나섰다. 정말로 서재의 문을 살짝 열어 둔 채로.

아우라는 그 문 곁에 섰다. 어디 테인 공작이 무슨 소릴 하는지 들어 볼 생각이었다.

집무실로 나온 카를은 테인 공작을 보고 흠칫 놀랐다.

“공작, 그 모습은…….”

카를은 테오가 왜 그를 불러들였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테인 공작은 몸이 상당히 나빠 보였다. 허리는 구부정하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일단 앉지.”

“……송구, 합니다…….”

테오가 테인 공작을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

“……윽.”

테인 공작이 몸을 수그렸다. 카를은 그런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등을 다쳤나?”

“……예. 칼에 맞았습니다.”

“누가 그랬지?”

테인 공작인 결연하게 대답했다.

“라이언 대공입니다.”

“……라이언.”

그가 수도에 있다니. 예상 못 한 일이었다.

“라이언은 실시아로 도망친 걸로 알고 있는데. 그가 어떻게 자네의 등을 찔렀을까. 어디서, 언제 당했지?”

“어젯밤 공작저에서 당했습니다.”

“구체적으로.”

테인 공작이 침을 꿀꺽 삼켰다.

“어제 새벽, 라이언 대공이 공작가에 몰래 침입했습니다. 그리고 집무실에 있는 절 찾아오더니…… 함께 황실을 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아하. 황실을 치자?”

카를은 참 재미있다는 듯 되물었다.

“자네가 황실을 칠 마음이 있다는 걸 그가 어떻게 알았을까?”

“화, 황실을 칠 마음이라니요? 그런 건 전혀 없었습니다!”

테인 공작이 당황해서 외쳤다. 카를은 묘한 미소를 짓더니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래, 그건 그렇다고 치고. 그다음엔?”

“그는 자신이 모은 실시아의 군대에 대해서 자랑하듯 떠벌리더군요.”

카를이 계속해 보라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제가 끝까지 거부하니 그가 저를 찌르고 달아났습니다. 폐하, 그는 황실을 노리고 있습니다. 당장 군사를 풀어 그를 잡아들이셔야 합니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 짐작 가는 곳은 있나?”

테인 공작이 머리를 굴렸다.

‘공명석 이야기를 하면 내가 핀과 관련이 있다는 걸 시인하는 셈이 된다. 황제가 짐작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 입으로 말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야.’

그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건 잘 모르겠으나…… 아마 황궁이 아닐까 합니다.”

테인 공작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공명석이 빛나는 걸 분명히 봤어. 황실이 핀을 다 모은 거야. 그럼 결국 라이언의 목적지도 황궁이 될 터.’

칼을 맞은 곳이 죽도록 아팠다. 하지만 한시라도 빨리 라이언 쪽으로 황실의 화살을 돌려야 했다. 라이언이 반역에 성공하면 그는 분명 저부터 가만두지 않을 것이기에.

카를은 테이블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테오.”

“예.”

“이자를 지하 감옥에 가둬라.”

“폐, 폐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테인 공작이 화들짝 놀랐다. 정보를 넘겼더니 자신을 가둔다고?

“테오, 뭘 하고 있지?”

“네, 폐하. 공작님, 일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테오가 천연덕스럽게 테인 공작에게 물었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카를과 테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 이게 무슨……? 폐하?”

“테인. 내가 개인적으로 자네에 대해 알아본 바가 있는데…….”

“…….”

“지금 자네가 내게 말한 내용과 약간의 차이가 있어서 말이야. 하지만 그걸 우리끼리 말하는 건 다소 무리가 있고, 내일 국무 회의에서 이어서 하지.”

카를이 더 들을 것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 제게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이, 이자가! 어딜 잡느냐! 으윽!”

“어서 가시지요, 공작님.”

테오는 부드럽게 말하며 그의 팔을 자비 없이 들어 올렸다. 테인 공작은 등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에 결국 벌떡 일어났다. 테오는 그런 그를 질질 끌고 나갔다.

“폐, 폐하! 폐하!”

테인 공작의 목소리가 점점 사라져 갔다. 경비병에게 그를 넘긴 테오가 다시 돌아왔다.

“폐하, 내일 국무 회의를 위해 뭘 준비해야 할까요?”

“이궁의 엘리제에게 가. 내가 곧 들린다고 전해.”

“네, 알겠습니다.”

테오가 황제의 집무실을 나갔다. 카를이 서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아우라가 나왔다. 그녀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카를에게 다가왔다. 카를은 궁금해졌다.

‘넌 이제 어떻게 나오려나.’

라이언이 수도로 왔다. 지금까지의 행적으로 미루어 보아 그 역시 핀을 찾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라이언이 핀을 찾기 전에 얼른 내놓으라고 할 건가.’

물론 줄 수야 없었다. 핀도, 그 어떤 힌트도. 지난 며칠 그녀가 보여 줬던 달콤한 모습들. 그런 게 꿈결처럼 날아간다고 해도.

아우라가 카를에게 말했다.

“내일 아침 식사는 모레로 미루는 게 좋겠네. 국무 회의를 준비하려면 정신없을 테니까.”

“음…… 그래. 그편이 낫겠지.”

“나도 당분간 조심히 다녀야겠어. 언제 라이언이 들이닥칠지 모르니.”

그녀는 그렇게만 말했다. 핀을 요구하지도, 카를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아우라.”

“응?”

“……아니야. 경비를 늘려 줄게. 되도록 혼자 다니지 마.”

“그래. 오늘은 이만 돌아갈게. 바쁠 것 같으니.”

아우라가 산뜻하게 대답하곤 집무실을 나갔다.

“후우…….”

카를이 창틀에 몸을 툭 기댔다.

예상했던 것과 반응이 전혀 달랐다. 그녀는 마치 핀을 찾아야 한다는 걸 잊은 사람 같았다. 그저 자신의 안위만 염려하고 있었다.

딱 그가 바라던 그런 아우라가 된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온순함은 그를 불안하게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

아우라는 자신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테인 공작은 분명 라이언과 합심해서 황실을 치려 했을 거야. 그 과정에서 갈등이 생겼을 테고…… 라이언이 먼저 그를 죽이려 했겠지.’

거기까지는 카를도 짐작했을 것이다. 아우라는 거기서 더, 조금 더 생각해야 했다.

‘라이언과 테인. 두 사람의 차이가 있다면…… 라이언은 핀의 봉인을 꼭 해제하려 한다는 데에 있어.’

테인 공작의 말도 이상한 데가 있었다.

‘지금 라이언은 황실을 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공작의 군사를 쓸 수 없게 되었을 테니까. 그런데도 공작은 라이언이 황실로 온다고 말했어. 그건…… 핀이 황실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거야. 그는 언제나 핀이 먼저였으니까.’

하지만 라이언이 황궁에 온다는 건 테인 공작의 추측이었다. 설령 그 추측이 맞는다고 해도 라이언은 결국 나중에 핀이 황궁에 없다는 걸 알게 될 거고.

아우라가 걸음을 멈췄다.

‘만약 그가 핀이 루안에게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혹은 지금 알고 있다면?’

라이언은 루안부터 칠 것이다.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이유로 넘겨 버릴 수 없는 문제였다. 특히 핀에 관해서만큼은 그녀는 모든 가능성을 다 고려해야 했다.

그녀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루안을, 핀을 지켜야 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