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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11)화 (111/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11화

테인 공작이 공명석을 얻은 건 1년 전 일이었다.

그날 테인 공작은 황태자의 부름으로 황궁으로 갔다. 응접실에서 만난 황태자는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병석에 든 황제의 목숨 줄이 2년이나 붙어 있었다. 통치권은 건네받았으나 아직 ‘황제’ 소리를 못 듣는 것이 그의 불만이었다.

“엘리제는 얌전히 잘 지내나?”

“네. 제깟 게 별수 있겠습니까? 죽은 듯이 지내지요.”

황태자가 피식 웃었다.

“공작 위를 빼앗겨서 꽤 억울할 텐데 티 한 번을 안 내는군. 순하기도 하지.”

그는 시가에 공들여 불을 붙였다. 그리고 깊이 빨아들였다가 후 내뱉었다. 테인 공작의 눈앞에 매캐한 연기가 흩어졌다.

“지금은 아버님이 저렇게 지겹도록 살아 계셔서 내 재혼 이야기를 못 꺼내지만…… 곧 돌아가실 것 같아.”

“그렇습니까.”

“그렇게 되면 내가 엘리제를 후궁으로 맞지.”

황태자는 큰 은혜를 베풀 듯 말했다. 테인 공작이 되물었다.

“황후가 아니라 후궁 말입니까?”

“황후? 하하…….”

그의 입에서 담배 연기가 아무렇게나 흘러나왔다.

“황후는 정략결혼으로 맞아야지. 엘리제는 예쁘장하니 적당한 자리에 두는 거고.”

“…….”

“황실이 공작가와 정략결혼으로 묶일 사이는 아니잖나.”

스쳐 들으면 황실과 공작가의 친분을 드러내는 듯했다. 하지만 실상은 공작가를 무시하는 말이었다. 테인 공작이 속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명색이 황태자란 자가 시장의 무뢰배처럼 군단 말이지.’

하지만 그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혼사 이야기를 하시려고 저를 부르셨습니까?”

“아, 그런 건 아니고.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네.”

황태자가 시가를 재떨이에 걸쳐 놓았다. 그리고 대단한 비밀인 양 몸을 숙여 말했다.

“자네에게 돈을 좀 받고자 하는데.”

테인 공작은 황당했다.

‘빌려 달라는 것도 아니고, 받고자 한다고?’

“얼마……를 말씀하시는 건지요?”

황태자가 가까이 오라는 듯 손가락질을 했다. 테인 공작이 다가가자 그가 귓속말을 했다.

“예? 그렇게 큰 돈을……!”

“쉿. 그래도 자네는 줄 수 있잖나. 가지고 있는 제니아 땅을 좀 팔아도 될 거고.”

“급히 쓰실 곳이 있으신 겁니까?”

“뭘 물어. 알고 있으면서.”

황태자가 코를 찡긋했다. 테인 공작은 짐작이 갔다.

‘황제 폐하께서 병석에 든 후로 황궁에서 매일같이 도박판이 벌어진다더니. 대체 얼마나 잃은 거지?’

“그 대가로 내가 가진 것 중 원하는 게 있으면 주지. 어떤가?”

테인 공작은 황태자가 괘씸했다. 조금 무리긴 했지만 제니아 땅을 팔지 않고도 돈이야 줄 수 있었다. 주지 않으면 또 무슨 보복을 할지 몰랐고.

‘이왕 뺏길 거라면 날 우습게 보지 못하게라도 해야겠어.’

황태자에게 있어 중요한 물건. 하나밖에 없는 것.

그는 순간 좋은 생각이 났다.

“핀의 조각을 주십시오.”

“……뭐?”

“황태자 전하의 핀 조각을 주신다면 저도 전하를 믿고 돈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황태자가 소파 등받이로 몸을 물렸다. 시가를 쭉 빨아들이는 그 표정이 일그러졌다.

“후우…….”

그가 흰 연기를 잔뜩 뱉었다.

“자네, 내게 죽고 싶은 건가?”

그 제안이 분명 그의 심기를 거스른 게 분명했다. 그래도 테인 공작은 입을 꾹 다물었다. 여기서 꼬리를 내렸다간 앞으로도 수시로 돈을 뜯길 게 뻔했다.

“하아…….”

황태자가 한숨을 쉬었다. 아쉬운 쪽은 어디까지나 그였다. 돈 없는 권력은 권력도 아니므로.

“그럼 이렇게 하지.”

“……예?”

“핀은 나도 곤란하고, 공명석을 주겠네.”

“공명석이라면……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공명석은 완전한 형태의 핀에 반응하는 돌이었다. 핀이 모이지 않으면 그 존재는 무의미했다. 하지만 핀과 관계 있는 물건이라는 점에서 가치는 충분했다.

어쨌거나 테인 공작이 힘겹게 받아 낸 공명석이었다. 라이언에게 쉽게 내어 줄 순 없었다.

“제게 공명석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언젠가 죽은 조카님이 말해 주더군. 자네에게 넘겨줬다고.”

죽은 조카. 그것은 황태자를 뜻했다.

“어차피 자네에게 있어 봤자 쓸모도 없는 거, 내게 주게. 공명석이 있으면 내가 핀을 찾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 않겠나?”

“그렇긴 합니다만…… 그냥은 드릴 수 없습니다.”

“이봐. 우리는 한편이 아니었던가?”

라이언이 너스레를 떨었다. 테인 공작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한편은 무슨. 모든 일을 자기 좋을 대로만 밀어붙이려는 주제에.’

테인 공작은 라이언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었다. 라이언 역시 그럴 테지만.

라이언이 다리를 꼬며 물었다.

“뭐, 좋아. 들어나 보지. 내게 뭘 원하지?”

“대공의 군사 절반을 제게 주십시오.”

군사 절반. 말을 꺼내는 것조차 무례일 수 있는 제안이었다. 라이언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거면 되나?”

그 순순한 태도에 놀란 건 오히려 테인 공작이었다.

“그렇습니다.”

“나 참, 그게 뭐라고 이렇게 심각하게 말하지? 어차피 황실에 쳐들어가면 다 같은 ‘우리’의 군일 텐데.”

라이언은 테인 공작과의 연합에 진심인 것처럼 말했다. 테인 공작은 턱을 쓰다듬었다.

‘믿어도 되는 걸까.’

“그럼 먼저 군사를 받아야겠습니다.”

“날 못 믿는군.”

라이언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이렇게 하지. 내가 지금 바로 자네가 보는 앞에서 실시아 쪽으로 사람을 보내 편지를 부치는 거야. 군사의 반을 공작가로 보내라고. 그러면 믿겠나?”

“그렇게까지 하신다면…… 좋습니다.”

테인 공작이 하인을 불렀다. 라이언은 약속대로 편지를 쓰고 인장을 찍었다. 테인 공작도 제 인장을 남겼다. 하인이 그것을 들고 집무실로 나갔다.

“자, 이제 자네 차례야. 내가 믿음을 보였으니 자네도 보답해야지.”

“크흠…….”

테인 공작은 일어나 자신의 책상으로 갔다. 그리고 가장 안쪽 서랍을 열어 작은 상자를 꺼내 왔다. 그런데 소파에 앉아 있던 라이언이 보이질 않았다.

“……대공?”

그때였다.

푹.

테인 공작은 등이 불타는 듯한 통증에 입을 쩍 벌렸다. 그가 핏발이 선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라이언이 비죽 웃고 있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상자를 가져갔다.

풀썩, 테인 공작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손을 뻗어 라이언을 제지하려 했지만 될 리가 없었다.

“라, 라이언…….”

“내 죽은 조카님이 공명석 이야기를 하며 말씀하셨지. 테인 공작 자네는 너무 주제를 모른다고. 그래서 그 주제 모름 때문에 죽고 말 거라고.”

라이언이 상자를 열었다. 작은 돌이 푸른빛을 내고 있었다.

“오호라.”

그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황후 폐하께서 기어이 핀을 다 모으신 모양이군.”

***

아우라는 서류 한 부를 들고 카를의 집무실을 찾았다. 아우라가 황실 업무를 보지 않는다는 사실은 대외적으로 비밀이었다. 그래서 이따금 그에게로 갈 서류가 그녀에게 도착하곤 했다.

카를은 어쩐 일인지 집무실을 비운 상태였다.

툭. 그녀는 서류를 카를의 책상에 올려 두었다.

이제 나가면 그만이었으나 어쩐지 아쉬운 기분에 아우라는 집무실을 걸어 보았다.

그녀의 걸음이 개인 서재 앞에 멈췄다.

“…….”

열쇠를 받은 후 처음 들어갔을 때는 그 안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두 번째 때는 벽장을 무너뜨렸고, 세 번째 때는 카를과 몸을 섞었다. 그 이후론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아우라는 서재의 문고리를 잡아 돌려 보았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끼이익…….

조심스레 서재 문을 연 아우라가 조금 놀랐다. 서재는 여전히 엉망진창이었다.

‘언제까지 이대로 둘 생각이지?’

아우라는 책을 몇 권 주워 책꽂이에 꽂았다. 심하게 밟혀 구겨진 책도 툭툭 펴 주었다.

대충 책을 정리한 그녀가 서재 안쪽으로 들어섰다. 넘어진 벽장과 거대한 책장들도 지났다. 그러자 큰 책상이 있는 꽤나 넓은 공간이 나왔다.

“……이런 곳이 있었나?”

아우라는 책상 위에 펼쳐진 종이들을 살펴보았다.

‘이건…… 카사 황실 가계도잖아?’

그리고 그곳에 휘갈기듯 쳐진 두 개의 동그라미.

[라이언 카사]

[릴리안 카사]

‘릴리안 카사는 라이언의 죽은 어머니인데…… 카를이 왜 라이언의 어머니를 주시하고 있지?’

아우라는 홀린 듯 그 옆의 종이를 살폈다. 낡고 더러운 낱장들엔 이국적인 이름이 가득했다.

‘이것도 가계도 같은데…… 카사나 제니아는 아니고…… 어디의 가계도지?’

아우라가 그 이름들을 하나씩 짚어 볼 때였다.

“난 들어오라고 허락한 적 없는데.”

난데없는 목소리에 그녀가 흠칫 놀라 뒤를 돌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카를이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놀랐잖아.”

“나만큼 놀랐을까. 내 서재에 침입자가 들어왔는데.”

‘거짓말. 일부러 발소리를 죽여 왔으면서.’

서재의 문이 열린 걸 봤을 때부터 그는 눈치챘을 것이다. 이 서재에 허락도 없이 들어올 사람은 아우라뿐이니.

“서류 한 부가 내게 잘못 와서. 돌려주러 왔다가 아무도 없길래 들어와 봤어.”

“아무도 없으면 막 들어와도 돼?”

“마음대로 들어와도 된다며.”

“그건 네가 나와 아침 식사를 해 줬을 때의 이야기지.”

아우라는 할 말이 없었다. 서재에 드나들지 않은 후로 아침 식사도 함께하지 않았으니.

그녀는 이야기도 돌릴 겸 책상을 가리켰다.

“그런데 이게 다 뭐야? 라이언의 어머니는 왜 조사하는 거고?”

“음…… 일종의 약점 찾기랄까.”

애매한 대답이었으나 아우라는 더 묻지 않았다. 라이언을 잡는 문제는 어디까지나 카를의 일이었다.

“서재는 왜 정리하지 않았어?”

“네가 언제 다시 뒤지고 싶을지 모르잖아.”

“…….”

“그때 편하게 이어서 뒤지라고.”

아우라가 헛웃음을 지었다. 편하게 망가뜨리라고 치우지 않았다니.

그녀는 팔짱을 끼고 그에게 다가갔다.

“폐하의 깊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어쨌거나 서류도 드렸으니 저는 나가야겠네요.”

“황후는 정말이지 제멋대로군. 멋대로 들어와 놓고 멋대로 나가다니.”

‘멋대로’라는 말을 세 번이나 들었다. 아우라는 정말 자신이 제멋대로인 인간이 된 느낌이었다.

‘따지는 건지, 장난치는 건지.’

“그럼 내일 아침 식사 같이해. 그럼 되는 거지?”

“그런 식으로 늦게 지불하면 이자가 붙어.”

“이자?”

카를이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다가오는 그 얼굴에 번지는 미소를 보고야 알았다. 모든 말들이 다정한 장난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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