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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09)화 (109/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09화

그녀가 품고 있던, 혹은 스쳐 보냈던 수많은 퍼즐이 있었다.

핀을 가지고 황궁을 떠났다던 카를. 안센나로 가려는 아우라를 제지하던 카를. 제니아인 지구를 가까운 수도로 옮긴 그 무리한 결정. 제니아인들과 합류한 것을 아우라에게 숨긴 루안.

그 퍼즐들이 이제 한 가지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핀이구나.’

왜 루안이어야 했을까. 답은 간단했다.

루안은 아우라에게 죽어도 핀을 안 줄 테니까. 그녀가 자신을 그에게 준다고 해도.

즉, 아우라는 핀을 두고 루안과 거래도 협박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카를에게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그 충격을 견디기 어려웠으나 지금은 내색해선 안 됐다.

아우라가 그의 멱살을 놓고 돌아섰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어, 루안.”

“…….”

“……오늘 온 건 카를에겐 비밀로 해 줘. 그가 알면 내가 많이 곤란해지니까.”

“……그래. 잘 돌아가.”

루안의 낮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말발굽 소리가 골목 저 멀리 점차 사라졌다. 아우라는 그제야 뒤돌아 루안의 뒷모습을 보았다.

얼굴을 보고 인사하지 못했다고 아쉬울 건 없었다. 언젠가 그들은 다시 만날 수밖에 없을 테니.

***

아우라는 터벅터벅 여관의 복도를 걸었다. 푸른 새벽빛이 복도를 채웠다.

그리고 저 멀리 아우라의 방문에 누군가가 기대어 서 있었다. 아우라는 그 인영의 주인공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카를이었다.

아우라는 우뚝 서서 카를을 바라보았다. 멍한 얼굴로 한참이나.

인기척을 느낀 카를이 아우라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카를.”

“어딜 갔다 왔어?”

그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툭 물었다. 아우라가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대답했다.

“밤 산책.”

“말을 타고?”

“조금 멀리 갔거든.”

카를이 아우라의 행색을 보았다. 미리 준비해 온 듯한 낡은 옷과 로브, 가죽 구두. 그 모든 것들이 말해 주는 듯했다. 아우라가 처음부터 카를을 속일 계획이었다고. 축제에 가기 위해 황궁을 나서던 순간부터.

카를 앞까지 다가온 아우라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카를의 눈빛은 차가웠다.

“조금 멀리? 어디로?”

“밀론.”

“가서 누굴 만났는데?”

아우라가 열쇠를 꺼내 방문을 열었다. 아우라가 방으로 들어서자 카를이 따라 들어왔다.

아우라가 로브를 벗어 아무 곳에나 걸쳐 두었다. 그때 카를이 저벅저벅 다가와 아우라의 양어깨를 잡았다.

“대답해. 누구를 만났어?”

“……아무도.”

“거짓말하지 마.”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사람들이 밀론에 제대로 자리를 잡았나 확인하러 갔을 뿐이야. 그 시간에 누굴 만났겠어.”

“그럼 나와 같이 갔어야지! 이 밤에! 어떤 놈들을 만날 줄 알고!”

카를이 결국 큰 소리를 냈다. 아우라가 되물었다.

“말했으면 보내 줬을 거야?”

“…….”

“아무도 못 보고 온 건 사실이야. 못 믿겠으면 알아봐.”

루안은 오늘의 만남을 카를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아우라를 곤란하게 할 사람이 아니니까.

그래도 카를은 아우라를 놔주지 않았다.

“그럼 몸이 안 좋다는 소리는 뭐였는데?”

“아, 그거.”

아우라의 입술 끝에 미소가 걸렸다.

“미안해. 거짓말이었어.”

“하, 아우라.”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조소했다. 아우라 역시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너도 날 속였잖아.”

“…….”

“앞으로도 속일 테고.”

카를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기가 막힌다는 듯 그녀의 차림을 한 번 훑어보았다.

“속도 좋네. 아침에 보자고 약속했지? 그 말대로 딱 아침까지만 기다리려고 했어. 해가 뜰 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든 찾아내서.”

카를이 그녀를 확 잡아끌었다. 아우라의 어깨가 움찔 놀랐다. 그가 그녀의 귓가에서 그르렁거렸다.

“가만두지 않았을 거야.”

아우라가 떠났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꾹꾹 눌러 온 분노. 그 분노가 뜨거운 숨결이 되어 귀와 목덜미로 스미는 듯했다. 아우라가 비뚜름하게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그래. 난 약속 지켰어, 카를.”

“…….”

“넌 그 약속 한마디를 믿고 밤새도록 날 기다린 거고. 착하게도.”

“그만해, 아우라. 날 화나게 하지 마.”

아우라가 손을 올려 그의 목덜미를 감쌌다. 뜨거운 목에서 맥이 강하게 뛰었다. 화가 난 건지, 흥분을 한 건지.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보란 듯 핀을 숨겼음에도, 이렇게까지 그녀를 방해하고 있음에도…… 아우라는 더는 그가 증오스럽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애처로웠다.

루안에게 핀을 넘긴 카를. 아우라의 약속을 믿고 밤새도록 그녀를 기다린 카를.

그런 카를의 마음이 참으로 안쓰러웠다. 하지만 네가 참으로 안쓰럽노라고 말할 순 없었다. 위로조차 해 줄 수 없는 마음은 오히려 삐뚤어졌다. 그의 신경을 한계까지 긁어 내는 줄 알면서도.

“그래서…… 어떻게 가만두지 않으려 했어? 내가 아침까지 돌아오지 않았다면.”

순간 카를이 아우라에게 확 입을 맞추었다. 그가 그녀의 입술을 물어뜯을 듯 짓이겼다. 마치 복수라도 하듯이.

그의 이가 닿는 곳이 아팠다. 혀로 강하게 쓸어 내는 입안의 연한 살도.

“……읏.”

아우라가 신음을 흘렸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목덜미와 머리카락을 꽉 잡았다.

정말 아팠다. 입안 곳곳이 마비되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그녀는 그가 여전히 안쓰러웠다. 그가 한 모든 노력이 곧 물거품이 될 거라는 게. 그래서 한도 끝도 없이 그를 받아 줄 작정이었다.

그의 손이 아우라의 골반과 허리를 짓누르듯 더듬었다. 노골적인 손길이 아우라의 상체로 올라왔다. 제멋대로 유영하는 그 손길에 입안의 통증이 쾌락으로 뒤집혔다.

카를이 아우라를 침대로 밀어붙였다. 풀썩하고 그녀가 침대에 던져지듯 누웠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팔 사이로 아우라를 가뒀다.

“이제 궁금증이 풀려? 사람 돌게 만드니 만족해?”

그가 반쯤 이성을 잃고 그녀를 쏘아보았다.

아우라가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잡고 끌어 내렸다.

“아니. 아직도 궁금해.”

그건 일종의 허락이었다. 더 헤집고 파고들어 보라는.

카를은 망설일 것 없이 아우라에게 입을 맞췄다. 그는 아우라의 말랑한 아랫입술을 힘껏 빨아들였다.

“앗…….”

그 통증에 아우라가 신음을 뱉었다.

그는 그녀를 먹어 치우고 싶었다. 입술부터 시작해서 그녀의 혀, 목, 가슴과 배, 그리고 가장 은밀한 곳까지도.

그렇게라도 해서 꽁꽁 가둬 놓고 싶었다. 그녀가 언제 또 신기루처럼 사라질지 몰랐다. 다 먹어 치우기 전까진 이 불안감과 조급함에 시달릴 게 분명했다.

카를의 손이 아우라의 등으로 갔다. 그녀는 살짝 몸을 들어 그가 단추를 풀기 쉽게 해 주었다. 카를은 그 배려를 비웃었다.

‘여유를 부리다니. 사람을 밤새 세워 놓은 주제에.’ 

투둑.

그가 드레스의 단추를 당겨 뜯어 버렸다. 아우라의 눈이 순간 흠칫 커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입안으로 들이닥치는 카를의 혀에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정신없이 혀가 얽혔다. 그 와중에 그의 손이 그녀의 드레스를 벗겼다. 낡은 드레스는 코르셋조차 없이 헐렁했다.

푸른 새벽빛에 그녀의 맨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카를은 머리끝까지 차오른 화가 욕망으로 뒤집히는 걸 느꼈다.

“이렇게까지 화가 나게 하다니.”

그가 아우라의 가슴을 부드럽게 쥐었다.

“대체 왜 이렇게 사람을 괴롭혀?”

가슴을 뭉근하게 만지던 카를이 손톱으로 그 끝을 쓸었다. 가벼운 통증과 깊은 쾌감. 순간 아우라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카, 카를…….”

“응? 대답 좀 해 봐, 아우라.”

말과는 다르게 그는 대답할 틈 같은 건 주지 않았다.

“그만…… 응! 읏…….”

집요한 괴롭힘에 아우라가 결국 몸을 옆으로 뺐다. 그러나 카를이 그녀를 붙잡아 그조차도 여의치 않게 했다.

“제, 제발…… 제발, 카를…….”

도를 넘은 자극에 아우라의 눈에 기어이 눈물이 맺혔다. 그 눈물이 흐르는 걸 본 후에야 카를은 그녀를 놔주었다.

카를이 제 셔츠의 단추를 풀어 옷을 벗었다. 탄탄한 몸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는 이제 시작이라는 듯 그녀의 허벅지에 손을 댔다.

굵고 뜨거운 손가락이 그녀의 허벅지를 쥐고 가차 없이 벌렸다. 언제나 숨겨져 있던 뜨거운 안에 차가운 공기가 스몄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훤했다. 그리고 그 순간, 아우라가 눈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아프게 하지 마.”

카를은 멈칫하더니 아우라에게 몸을 숙였다. 그는 아우라의 손을 그녀의 얼굴에서 떼어 냈다.

흥분과 걱정이 뒤섞인 얼굴. 그는 그런 얼굴로 아우라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솔직하게 말해. 몸이 괜찮은 게 맞아?”

몸이 안 좋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했는데. 그래도 그는 혹시나 한 것 같았다.

아우라가 떨리는 숨을 길게 뱉어 냈다. 내심 겁이 났던 모양이었다. 잔뜩 화가 난 그를 받아들이는 게.

하지만 저 얼굴을 보고 저 말을 들으니 그것조차도 상관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우라는 카를을 껴안았다.

“아니, 내가 잘못 말했어. 아프게 해도 돼.”

“아우라.”

“……정말이야.”

카를이 그녀를 가만히 보았다. 청록빛 눈동자가 그를 향해 활짝 열린 듯했다. 그의 얼굴에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욕망과 흥분이 들어찼다.

카를이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의 안에 파고들었다.

“아!”

아우라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를 악물어도 소용없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몸 안이 휘몰아쳤고, 정신없이 울려 댔다.

“아, 아! 카를…… 아윽!”

평소보다 거친 움직임에 아우라가 시트를 쥐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몸이 침대 위로 밀려 올라갈 것 같았다.

카를은 그녀의 손을 펴서 제 손을 잡게 했다. 아우라가 그 손을 꽉 잡으며 눈을 크게 떴다.

제대로 봐 둘 생각이었다. 오로지 그녀로 가득 차 있는 그의 얼굴을. 아우라는 그걸 기억해 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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