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08화
새벽달이 희미했다.
카를은 창가에 앉아 술을 한잔하고 있었다. 고급 여관이라고 했지만 어차피 민가의 숙박 시설이었다. 준비된 술이라곤 값싼 럼주뿐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이런 술도 나쁘지 않았다. 데블라에선 더 질 나쁜 술도 잘만 마셨으니.
창밖 거리에선 아직도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놀고 있었다. 여실히 느껴지는 즐거움만큼 그의 마음은 쓸쓸해졌다.
‘살리려 해 줘서 고마워.’
그는 그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살리려 한 것과 살린 건 다르다. 살리려 한 건, 살렸다는 결과를 포함한 건 아니니까.
그 말은 마치 네가 날 살릴 수는 없다는 의미 같았다.
아우라가 그때 눈물을 글썽이지 않았다면 한마디 했을 것이다. 그런 인사 같은 건 받고 싶지 않다고.
‘결국 다 제 뜻대로 하겠다는 거겠지. 내게 고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핀을 찾겠다는 거고.’
카를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게 미안해서 울먹였던 걸 테고.’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집불통.’
물론 그도 그 고집에 져 줄 마음은 절대 없었다.
카를은 주머니에서 아우라의 팔찌를 꺼냈다. 석궁을 쏘기 위해 잠깐 빼고 있던 걸 카를이 챙긴 것이다.
‘너무 얄팍한 핑계지만…….’
얼굴을 한 번 더 볼 구실 정도는 되어 보였다.
카를이 팔찌를 들고 방을 나섰다. 전해 주는 김에 몸 상태를 좀 살펴볼 생각이었다. 얼마 전 카를의 방에서도 갑자기 열이 오르지 않았던가.
카를은 복도를 지나 그녀의 방 앞으로 갔다.
똑똑.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자나?’
문고리를 잡고 돌려 봤지만 문은 잠겨 있었다.
‘……자는 모양이군.’
카를이 그대로 돌아서려다가 방문을 빤히 보았다. 집착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어쩐지 느낌이 안 좋았다.
카를이 계단을 내려가 카운터의 주인에게 갔다.
“이봐. 혹시 내 아내가 나가는 걸 보았나?”
“아, 그분께선 아까 말을 빌려 나가셨습니다.”
말을 빌려 나갔다. 그 말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적어도 먼 곳으로 떠났단 뜻이니.
“하.”
그는 손에 쥐고 있는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또 이런 식인 건가.’
그의 서늘한 표정에 눈치를 보던 주인이 조심스레 말했다.
“그, 금방 돌아온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약속?”
“네. 말을 빌려 가셨으니까요.”
약속.
그 단어에 카를은 아우라의 말을 기억해 냈다.
‘내일 아침에 만나. 약속해.’
***
아우라는 여관에서 말을 한 마리 빌렸다. 그리고 밀론이 있는 북서쪽을 향해 말을 몰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서서히 밀론의 풍경이 보였다.
‘확실히 수도 안이라 그런지 거리가 가깝네. 이 정도면 황궁에서도 보이겠어. 카사인들이 싫어할 만해.’
축제에서 봤던 연극만 해도 그랬다. 제니아인들에 대한 카사인들의 혐오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카를이 왜 그걸 감당하면서까지 이주를 강행하였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밀론으로 들어섰다. 아직 다 정돈이 되진 않았으나 거리의 풍경은 깔끔했다. 애초에 빈집이 많아 빈민들도 거리 신세는 면한 것 같았다.
‘자경단이 새벽 경비를 보고 있을 텐데. 찾아서 이야기를 나눠 보자.’
갓 이주했으니 이래저래 걸리는 일이 많을 거였다. 아우라는 그들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듣고 싶었다. 특히 카사인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아가씨.”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돌아보니 남자 서넛이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아우라는 경계하며 말고삐를 모아 쥐었다.
“이 밤에 웬 아가씨가 혼자 다니네?”
한 남자가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아우라는 탈출로를 확보하기 위해 말을 몰았다. 그러나 반대편 골목에서도 남자 몇몇이 튀어나왔다.
“어딜 가려고. 우리랑 조금만 놀다 가.”
‘이런. 잘못 걸렸네.’
아우라는 일단 석궁을 꺼내 그들에게 겨눴다.
“물러나라. 너희는 제니아인인가?”
제니아인이라면 그녀도 신분을 밝힐 셈이었다. 그러나 남자들이 키들키들 웃었다.
“우리가 그런 약해 빠지고 뻔뻔한 외국인으로 보이나?”
‘아니구나.’
아우라가 입술을 씹었다.
약해 빠지고 뻔뻔한 외국인. 그 말에 제니아인들에 대한 혐오가 가득했다. 이들은 아마 이 지역에 불법으로 살던 하층민일 것이다. 제니아인들이 이주를 오자 쫓겨났을 게 뻔했다.
“아가씨야말로 제니아인이야? 얼굴이 이쁘장한 걸 보니 그런 것 같은데.”
“물러나라고 했다.”
아우라가 철컥하고 석궁을 장전했다. 탈출로만 확보하면 달아날 수 있었다. 일단 그녀는 말을 타고 있으니.
“귀여운 짓을 하는데? 킬킬…….”
남자들은 아우라를 비웃으며 다가왔다. 아우라가 한 남자의 어깨를 겨냥했을 때였다. 뒤에서 다른 남자가 말 옆구리를 찌르려 했다.
“멈춰라!”
저 멀리서 누군가가 말을 타고 달려왔다.
“쳇! 자경단이다. 도망쳐!”
남자들은 우르르 달아났다. 순식간에 아우라는 골목에 혼자 남게 되었다.
아우라는 자신을 향해 말을 타고 달려오는 이를 보았다. 부드럽게 휘날리는 갈색 머리카락. 선이 고운 이목구비. 아우라는 그를 바로 알아 보였다.
“……루안?”
루안이 급히 말고삐를 잡았다.
“……아우라?”
두 사람은 놀라서 서로를 멀뚱히 바라만 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우라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루안…… 네가 왜 여기에…….”
루안이 안센나에 돌아갔다면 아우라에게 알렸을 거다. 혹은 자경단의 보고서에 그의 이름이 있어야 했다.
‘설마 루안이 숨긴 거야?’
하지만 그녀는 따져 묻진 않았다. 생각이 깊은 루안이라면 이유가 있었으리라.
“아우라 너야말로 이 시간에 여긴 어떻게……?”
“축제를 보러 왔다가 몰래 와 봤어. 공식적으로 오긴 어려운 상황이잖아. 루안, 대체 언제부터 안센나에 있었던 거야?”
다그닥.
아우라가 그를 향해 말을 몰았다. 그러자 루안이 제 말을 조금 뒤로 물렸다.
‘……이상해.’
루안이 그녀를 피하고 있었다. 난감해하고 경계하며.
“루안?”
“……그래. 수트라를 떠나서 제니아인들과 합류했어. 내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의무?”
루안의 눈이 짙어졌다. 그는 뭔가를 결심한 듯 아우라를 보았다.
“그래. 귀족의 의무. 제니아인들을 지켜야지.”
“그렇구나…….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수트라에서 그렇게 헤어졌던 게 마음에 걸렸는데.”
루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우라, 그래서…….”
“…….”
“여긴 대체 왜 왔어?”
그 냉정함에 아우라는 비로소 확신했다. 루안이 그녀를 반기지 않는다는 것을.
“루안. 잠깐 내려서 이야기하자.”
아우라는 그렇게 말하며 말에서 내렸다. 루안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를 따라 말에서 내렸다.
아우라가 루안의 손을 덥석 잡았다.
“루안, 무슨 일 있어?”
루안은 아우라의 손목에 감긴 손수건을 보았다.
‘손목을 그었어. 꽤 깊게.’
카를의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루안에게 다녀갔다는 걸 그녀가 알아선 안 됐다. 루안은 애써 그녀의 손목에서 시선을 뗐다.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루안. 너 이러는 거 처음 봐. 살도 많이 빠진 것 같고. 정말 괜찮은 거야?”
묻고 싶은 건 루안 쪽이었다.
‘너야말로 많이 아팠던 거 아니야? 죽으려 하는 게 무섭진 않았어?’
하지만 물을 수도, 걱정할 수도, 위로할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최선을 다해 그녀를 보내야 했다. 자신이 그녀에게 그 어떤 힌트라도 주기 전에.
“널 봤는데 내 마음이 편할 리가 없잖아.”
루안이 아우라에게 잡힌 손을 쓱 뺐다. 그녀의 손이 허공에 머물렀다.
그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너도 알잖아, 아우라. 내가 아주 오랫동안 널 좋아했다는 거.”
아우라의 눈이 커졌다. 루안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었다. 마치 서류 처리를 하는 듯한 사무적인 그의 태도가 너무 낯설었다.
“그런데 넌 카사의 황후로 남기로 결정했고.”
“…….”
“정확히는, 카를 황제의 아내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우라는 수트라에서 순순히 카를을 따라갔으니.
아우라가 말했다.
“그건…… 핀을 찾기 위해서야.”
“그렇게 네가 핀을 찾아서 죽어 버리면.”
루안의 말끝이 떨렸다. 그러나 이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루안.”
“난 네가 핀을 포기하고 내게 와 줬으면 좋겠어. 내가 바라는 건 그게 다고, 네가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면…….”
나도 네가 필요 없어.
루안은 그렇게 말해야 했다. 하지만 차마 그렇게까진 할 수 없었다.
“미안, 아우라. 나는 더는 너로 인해 고통스럽기 싫어.”
“…….”
“다신 우연이라도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화가 필요하다면 다른 자경 대원을 불러 줄게.”
“루안!”
아우라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똑바로 말해. 무슨 일이 있는 거지?”
그녀는 루안을 잘 알았다. 설사 아우라가 싫어졌다고 해도 이렇게 상처를 줄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자신에게 그럴 리 없으리라 믿고 싶었다.
루안이 아우라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나는 네가 더는 필요 없어, 아우라.”
그는 팔을 돌려 아우라를 손을 뿌리쳤다. 말에 올라타는 그를 아우라는 망연히 바라보았다.
다그닥…….
루안의 말이 골목을 떠나갔다. 순간 아우라가 크게 외쳤다.
“루안!”
그녀는 달려가 그의 말을 막아섰다. 루안이 얼른 고삐를 잡았다.
“무슨 짓이야? 위험하게!”
아우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루안의 팔을 끌어 내렸다. 그리고 그의 멱살을 잡아 자신을 똑바로 보게 했다.
‘이유가 있을 거야. 분명해. 루안이 내게 이럴 리 없어.’
평생을 함께한 친구였다. 남녀 관계 이전에 그들이 쌓아 온 추억과 기억이 있었다. 그것을 루안이 이렇게 쉽게 버린다고?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아우라는 루안에게 그 정도 믿음은 있었다.
“아우라, 제발 그만해.”
“입 다물고 날 똑바로 봐.”
아우라는 필사적으로 그와 눈을 맞췄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녹색 눈동자. 단단한 척하던 그 눈에 고통과 고민이 물들어 갔다.
결국 그는 눈을 피했다. 지금껏 자신의 말이 거짓임을 증명하듯이.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너.”
아우라는 이렇게 물으려 했다.
‘내게 뭘 숨기고 있는 거야?’
그때였다. 아우라는 벼락처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