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07화
곰이 어찌나 무거운지 그의 팔뚝에 힘줄이 돋았다. 아우라가 그를 말렸다.
“힘들 텐데. 정말로 안 받아도 돼.”
“그렇게 무서운 기세로 석궁을 쏴서 받은 건데, 챙겨야지.”
“그래도. 이 커다란 걸 어디다 두게?”
“진심이야? 우리 집에 이거 둘 공간이 없을까.”
우리 집.
아우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황궁이 그들의 집이라면 집이었다. 이것도 장식품이라고 친다면 둘 공간이야 얼마든지 있었고. 하지만 그의 입에서 그 단어를 들으니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카를이 멋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곰 때문에 시야 확보가 안 되는데도 겁도 없이 성큼성큼 걸었다.
그의 걸음이 길가의 좌판 매대로 향했다. 잘못하면 그대로 들이받을 것 같았다.
“카를! 부딪히겠어.”
아우라가 급하게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카를이 아우라 쪽으로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곰의 등에 뺨을 툭 대며 말했다.
“앞이 하나도 안 보여. 네가 잘 끌고 가야 해.”
아우라는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그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그녀는 얼른 생각을 정정했다. 그 누구도 커다란 곰을 끌어안고 그 북슬북슬한 털에 뺨을 대면 귀여워 보일 거라고.
“빨리 데려가. 무거우니까.”
카를이 재촉했다. 아우라는 하는 수없이 곰의 팔을 잡고 이끌었다. 마주 오는 사람들이 킥킥 웃었다.
“엄마! 저것 봐! 저 누나가 곰이랑 걸어가.”
“어머~ 그러게. 너무 귀엽다!”
사람들이 즐거워할수록 아우라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우라가 우뚝 섰다.
“하하…….”
그녀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스스로가 봐도 이 모습이 너무 어이가 없고 귀여워서. 지금까지 부러 퉁명스럽게 굴던 노력이 모두 무너지고 말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고작 박제된 곰 때문에.
카를이 물었다.
“갑자기 왜 웃어?”
“곰이랑 걸어간다잖아. 너무 웃기고 창피해.”
아우라가 화끈거리는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카를은 그런 그녀를 빤히 보더니 곰을 내려놓았다. 그는 아우라의 손을 떼어 내려 했다. 웃는 얼굴을 꼭 봐야겠다는 듯.
“왜 이래? 싫어. 놔.”
아우라는 거부했지만 결국 카를이 손을 떼어 버렸다. 그녀가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카를이 아우라를 따라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네가 창피해하면 어떡해. 내가 더 창피해.”
“그러니까 안 받는다고 했잖아. 다 너 때문이야.”
“그게 왜 나 때문이야?”
“몰라. 너 때문에 웃는 거야.”
아우라가 해맑게 웃으며 타박했다. 순간 카를이 멈칫했다.
그는 이런 웃음을 예전에 식당에서 본 적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다신 볼 수 없을 줄 알았으니까.
그는 그녀의 손목에 감긴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자신은 이런 상처를 주지 않았나. 그래서 그때와 같이 웃는 모습을 다시 보는 건 몸을 섞기보다 더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걸 바라는 것조차 염치가 없어서 사실은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따금 느끼는 거지만, 아우라는 순수하고 착했다. 아무리 그녀가 독한 말을 하고 상처를 주어도 카를은 항상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결국 먼저 웃어 주는 건 아우라였다.
카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아우라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더니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러자 아우라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우라는 그가 무슨 짓을 할지 눈치챘다. 그녀는 놀라서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왜 말이 안 돼?”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이렇게 눈에 띄는 곰을 옆에 두고?’
그러나 아우라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실제로 벌어졌기 때문이다.
두 입술이 가만히 겹쳐졌다. 카를이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머금었다. 혀로 그녀의 입술을 핥는 움직임이 부드러웠다.
녹아 버릴 듯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화살을 쏘아도 답답함이 가시질 않았는데. 그의 입술이 닿는 순간 머릿속의 잡념이 하나둘 지워지고 있었다.
바보 같게도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입맞춤이 끝나면 곰을 들어 줘서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다고. 하마터면 그 말을 잊을 뻔했다.
카를이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그가 엄지로 그녀의 뺨을 살살 만지던 순간이었다.
펑!
별안간 하늘에서 불꽃이 터졌다. 두 사람은 하늘을 보았다.
펑! 펑!
온갖 색깔의 불꽃이 하늘을 수놓았다. 화려하게 터졌다가 사라지는 그 형형색색의 무늬들. 그 앞에서 아우라는 넋을 놓았다.
‘아름다워.’
그 아름다운 빛이 밤하늘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도 깨끗하게 씻겨 나갔다.
아우라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무엇을 그토록 무의식적으로 외면했는지. 어떤 말을 기를 쓰고 피해 왔는지.
그 말은, 곰 따위를 두고 해서는 안 됐다.
“예쁘네.”
카를이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우라는 그의 눈에서 빛나는 불빛들을 가만히 보았다.
“카를.”
“응?”
카를이 아우라를 보았다. 아우라가 그의 팔을 잡았다.
“날 살려 주려 해서 고마워.”
아우라의 눈에 가는 눈물이 고였다.
‘그래. 처음부터 이 말을 해야 했어.’
아우라는 사실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그를 비난했지만, 결국 부정할 순 없었다. 그가 얼마나 그녀를 살리고 싶어 하는지.
‘날 증오해.’
그 말도 결국 그랬다. 그 증오의 힘으로나마 살아 줬으면 하는 집념. 그것을 아우라는 오랫동안 모른 척했다.
하지만 아우라는 더는 그 마음을 외면하기 어려웠다. 자신을 지금까지 살린 사람, 그래서 이 아름다운 불꽃을 보게 해 준 이는 카를이었으므로.
카를이 말했다.
“살려 주려 해서 고맙다는 게 뭐야.”
“…….”
“살려 줘서 고맙다고 해야지.”
그는 그녀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
자정이 다 되어 갈 무렵, 두 사람은 고급 여관을 찾았다. 보좌관들이 일찍이 예약해 둔 여관이었다.
여관의 주위엔 기사들이 잠복해 있었다. 주인조차도 눈치 못 챌 정도로 은밀히 이 주위를 지킬 것이었다.
숙소로 들어서며 아우라가 물었다.
“어때? 축제를 보니까.”
“특별한 점은 없어. 하나 꼽자면, 황실에 대한 민심이 안 좋다는 것 정도?”
“저래도 괜찮은 걸까 싶어.”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야. 내일 아침에 마지막으로 살펴보고 돌아갈 생각인데, 혹시 더 있고 싶어?”
아우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충분히 피곤해. 들어가자마자 곯아떨어질 것 같아.”
그들은 카운터에 도착했다. 멀끔하게 차려입은 주인이 그들을 맞았다. 주인은 카를이 안고 온 곰을 보고 흠칫 놀랐지만 침착하게 물었다.
“……어서 오십시오.”
카를은 태연하게 주인에게 가명을 댔다. 명부를 확인한 주인이 대기하고 있던 시종을 불렀다.
“이자가 방을 안내해 드릴 겁니다.”
“혹시 남은 방이 있는가?”
아우라가 물었다. 주인은 예약표를 훑어보았다.
“1인실이 하나 있긴 합니다만.”
“그 방도 같이 주시오.”
카를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아우라가 금화를 내밀었다.
“방을 따로 써도 괜찮겠지요?”
그녀가 태연하게도 물었다. 카를이 이것 봐라, 하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카를로선 괜찮을 리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방 문제로 티격태격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부인 좋을 대로 하시오.”
“그러죠. 주인장, 들여온 짐 중에 작은 것을 1인실에 옮겨 주었으면 하는데.”
“네, 그렇게 해 드리겠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얼른 위로 올라갔다. 잠시 후 그가 계단을 내려와 짐을 다 옮겼음을 알렸다.
“준비가 다 되었으니 이쪽으로 오십시오.”
시종이 앞장섰다. 그들은 계단을 올라 예약된 방으로 갔다.
“1인실은 복도의 끝에 있습니다.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알아서 하지.”
카를이 열쇠를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아,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시종이 그 손에 열쇠를 공손히 올려놓았다.
시종이 떠난 후, 카를은 열쇠를 꽉 쥐었다. 문에 삐딱하게 기대어 서는 카를을 보며 아우라는 생각했다.
‘나왔네. 마음에 안 들어 죽겠다는 표정.’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줘. 얼른 가서 쉬고 싶어.”
“내가 그렇게 싫어?”
“그런 게 아니라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래.”
“몸이? 어디가?”
“피로가 좀 쌓였나 봐. 혼자서 쉬고 싶어.”
“……아무 짓도 안 할게. 약속해. 옆에서 쉬어.”
이쯤 되니 카를은 아우라를 더 혼자 두기 싫어졌다. 그러나 아우라는 강경했다.
“네가 옆에 있으면 내가 신경 쓰여서 못 쉬어. 오늘만 좀 봐줘.”
오늘만 좀 봐줘. 그 묘하게 약한 소리에 카를이 헛웃음을 지었다.
“약았네. 그럴 소릴 하다니.”
결국 카를이 졌다. 그는 열쇠를 아우라의 손바닥에 꾹 올려 두었다. 아우라가 열쇠를 쥐며 미소를 지었다.
“문은 잠글 거야. 헛걸음하지 마.”
“정말로 안 갔으면 좋겠는데.”
아우라는 피식 웃더니 손끝에 입술을 댔다가 카를의 뺨으로 옮겼다.
“내일 아침에 만나. 약속해.”
그렇게 아우라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얼마나 걸었을까.
달칵.
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우라가 뒤를 돌았다. 카를은 복도에 없었다.
같은 방을 쓰기 싫어 방을 따로 잡은 건 아니었다. 그를 더 속이기 싫어서였다.
아우라는 새벽이 되면 밀론으로 갈 생각이었다. 같은 방을 쓰면 지금까지와 같은 방법으로 그를 재워야 했다.
그녀는 더는 그런 식으로 카를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짐 가방을 열었다. 미리 준비한 낡은 드레스와 로브, 그리고 가죽 구두. 이 정도면 기사들의 눈을 속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