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06화
아우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이언과의 일을 두고 미안하다는 말이 나왔다. 카를의 입에서.
“라이언과 널 두고 한 말. 어떻게 주워 담아야 할지 모르겠어.”
“…….”
“고작 이런 걸로 용서해 달라는 건 아니고. 이거라도 하게 해 줬으면 해서.”
아우라의 말문이 막혔다. 카를이 대뜸 사과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저…… 손님?”
주인이 조심스레 그들을 불렀다. 그는 한 손에는 석궁을, 한 손에는 거스름돈을 들고 있었다.
“아, 그래. 주시오.”
카를이 그제야 거스름돈을 받았다. 이제 주인과 카를 모두 아우라만 보았다. 아우라는 엉겁결에 석궁을 받았다.
눈치를 보던 주인이 헤헤, 웃으며 말했다.
“멀지 않은 곳에 석궁으로 놀 수 있는 가게가 있으니 연습하시는 셈 치고 한번 들려 보시지요.”
“알았소.”
카를이 대충 대답하곤 아우라를 데리고 거리를 걸었다.
아우라는 고민스러웠다. 이걸 받긴 받았는데 기뻐해야 하는 건지, 끝까지 거절해야 하는 건지.
그의 사과도 그랬다. 미안하다는 말로 무마될 상처는 아니었다. 당시엔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하지만 그 역시 시간이 지나서였을까. 아니면 그의 사과에 진심이 느껴져서일까. 마음이 수그러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받아 주자. 고집 부려 거절하는 것도 일이니.’
아우라는 석궁을 등에 멨다.
“아!”
머리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우라의 긴 머리와 석궁의 끈이 엉킨 것이었다. 머리카락을 앞으로 끌어오려는데 카를이 저지했다.
“잠깐만. 풀어 줄게.”
그는 엉킨 머리카락과 끈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가끔 드레스 단추도 잘 못 푸는 투박한 손이었다. 머리카락이라고 쉬울 리 없었다.
그래도 카를은 열심히 머리카락을 풀었다. 아우라는 땅만 바라본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통해 전해지는 손길. 그 손길이 몸 여기저기까지 간지럽게 했다.
“사과 안 받아 줄래.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런 말을 하지 않으면 못 견딜 정도로.
등 뒤에서 픽,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실컷 미워해.”
“…….”
“다 됐다. 이제 안 아프지?”
그의 말처럼 머리는 더 아프지 않았다. 아우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이 희미한 미소를 띠며 아우라의 머리를 한 번 쓱 쓰다듬었다.
아우라는 그런 카를을 멍하니 보며 생각했다.
‘……잊지 마, 카를은 핀을 숨겼어. 난 그걸 찾아야 하고.’
두 사람은 한참을 그렇게 걸었다. 아우라는 부쩍 말이 없어졌다. 카를도 굳이 그녀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그저 밤거리를 걸었고, 가끔은 쓸데없는 물건을 구경했다. 이곳의 수많은 사람이 그런 보통의 행복을 누리듯이.
“어?”
아우라가 저 멀리 뭔가를 보곤 걸음을 멈췄다. 인파가 가득한 그곳에선 연극이 열리고 있었다.
카를이 물었다.
“연극인가? 보고 싶어?”
“응. 볼래. 보고 싶어.”
그녀는 흔치 않게 적극적으로 말했다. 책과 문학, 연극 같은 예술은 아우라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가서 보자, 그럼.”
그들은 인파 속으로 끼어들었다. 배우들의 목소리가 워낙 커서 멀리서도 잘 보였다.
‘저 배우가 주인공인 모양이네.’
무대 중앙에 검은 옷을 입고 서 있는 남자. 그의 어깨엔 우스꽝스럽게 만든 견장이 달려 있었다. 표정은 과도하게 근엄해서 바보 같아 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검은 옷과 견장? 마치…….’
황제의 옷 같지 않은가.
“아버지! 큰일이에요.”
다른 배우가 헐레벌떡 달려오며 대사를 했다.
“우리 집 앞마당에 옆집 놈들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흐흠! 그래? 하지만 그게 뭐가 문제라는 거지?”
아버지 역을 한 배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관중들이 배우를 향해 야유를 퍼부었다.
“우우우우!”
아들 역을 한 배우가 답답하다는 듯 그를 잡아끌었다.
“뭐가 문제긴요. 쫓아내야죠. 그놈들이 우리 밭의 당근과 호박을 다 캐 가고 있습니다.”
“흐흠! 음식은 나눠 먹어야지. 사이좋게. 그리고 그들은 네 엄마의 친척들이 아니냐?”
아우라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건 황실 풍자극이야. 제니아인들을 수도로 들인 카를을 비난하고 있어.’
연극의 내용은 점점 불편해졌다. 아들은 아버지의 무능함을 비웃고 조롱했으며, 관객은 그걸 보고 웃었다. 반면 카를은 연극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안 되겠다. 카를, 가자.”
아우라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왜? 재미있는데.”
그는 못 이기는 척 그녀에게 끌려 나왔다. 인적이 드문 곳까지 왔을 때 카를이 아우라에게 말했다.
“재미없었어?”
“난 별로였어. 정말로.”
“너는 재미있어 할 줄 알았는데. 날 욕하는 내용이니.”
“……알고 있었어?”
“뻔하잖아. 눈치를 못 채는 게 이상하지.”
“기분 나쁘지 않아?”
“국민이란 원래 그래. 정치에 대한 불만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고.”
카를은 정말 괜찮은 듯했다. 한편으로는 정말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다.
그는 아우라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물었다.
“왜? 내가 욕을 먹으니 화가 나?”
그렇게 말하는 카를의 표정이 묘했다. 장난기와 심술 아래에 깔린 일말의 기대감 같은 것. 그런 것들이 보이는 듯했다.
너를 생각해서가 아니야. 제니아인들이 비난받으니 그게 화가 난 거지.
아우라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기분이 상한 건 카를이 비난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오히려 아우라가 그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게. 대체 내가 자꾸 왜 이러는 걸까.’
그녀는 왠지 모르게 조금 울컥했다. 자꾸만 그가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 같았다. 그가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좋을 대로 생각해.”
“그럼 난 진짜 나 좋을 대로 생각할 건데. 그래도 괜찮아?”
‘봐. 지금도.’
그는 아우라를 몰아붙이는 게 확실했다. 이렇게 당황하게 하고 말문이 막히게 하다니.
“마음대로 해. 넌 원래 네 멋대로잖아.”
아우라는 그렇게 퉁명스레 말하고 돌아서 버렸다.
한참을 또 그렇게 걷던 아우라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광장 한쪽에 작게 마련된 간이 사격장이었다. 준비된 석궁으로 과녁을 맞혀 선물을 가져가는 방식이었다.
‘아까 무기상 주인이 말했던 곳이 저기구나.’
마음이 답답해서였을까. 자꾸만 카를에게 휘둘리는 것 같은 자신에 대한 화풀이였을까.
아우라가 충동적으로 말했다.
“저거 해 볼래.”
아우라가 사격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사격장은 조악했다. 석궁이 놓인 선반과 저 안쪽의 종이로 만든 과녁이 다였다.
아우라가 주인에게 물었다.
“내 석궁으로 해 보고 싶은데, 그래도 되겠소?”
주인은 아우라를 흘긋 보았다. 아무리 봐도 석궁 한 번 안 잡아 봤을 것 같은 귀부인이었다.
원칙적으로는 사격장의 석궁을 사용해야 옳았다. 곁에 선 훤칠한 남자였으면 안 된다고 했을 것이다.
“뭐, 그렇게 하십시오. 총 10발을 쏘시면 되고, 가격은 30골드입니다.”
아우라가 금화를 꺼내려 했다. 하지만 카를이 더 빨랐다. 그는 아까 무기상에서 받은 거스름돈을 모두 주었다. 주인이 횡재 맞았다는 얼굴로 동전을 셌다. 카를이 물었다.
“이 정도면 몇 발 정도를 쏠 수 있지?”
“에…… 28발…… 그냥 30발 쏘게 해 드리겠습니다.”
아우라는 또 멋대로 돈을 낸 카를을 살짝 흘겼다. 카를이 모른 척 자리를 비켜 주었다.
아우라는 석궁을 들어 자세를 잡았다. 석궁 몸체에 팔찌가 눌려서 고민 없이 풀어 버렸다.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 능숙하게 손목에 묶었다.
“진지하게 하네.”
카를은 팔짱을 낀 채 선반에 몸을 툭 기댔다. 아우라는 적이라도 나타난 것처럼 과녁을 쏘아볼 뿐이었다.
철컥.
아우라가 석궁을 장전했다.
슉- 텅!
쏘아진 화살이 과녁의 귀퉁이에 맞았다. 아우라가 석궁을 슬쩍 보았다.
‘이런 느낌이구나. 예전 것보다 좀 더 가벼운 느낌.’
철컥.
빠르게 다시 장전을 했다. 카를이 아우라의 양어깨를 잡아 살짝 내렸다.
“무기가 가벼우면 몸의 무게 중심을 더 잡아 줘야 해. 조준점은 살짝 낮추고.”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아우라가 바로 석궁을 쐈다. 물론 어깨는 살짝 내린 상태였다.
슉- 텅!
화살은 가운데 동그라미 안으로 가 박혔다. 명중이었다.
“잘하네. 그동안 연습이라도 했어?”
“아니.”
철컥, 슉- 텅!
또 명중이었다.
“재능 있네. 사냥제에서 멧돼지 잡았을 때도 느꼈지만.”
카를이 뭐라 하건 아우라는 계속 화살을 쐈다. 그렇게라도 해서 머릿속의 잡생각들을 없애고 싶었다.
그렇게 모든 화살이 과녁에 박혔다. 그중 21발이 명중이었다. 처음에는 낭패라는 표정이던 주인도 결국 박수를 쳤다.
“여자분이 대단하십니다. 10발 중 7발 이상이 명중이면 1등 상품을 드리니 받아 가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선물이 있었나?”
“그럼요. 보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주인은 웃으며 어디론가 갔다. 아우라는 내심 기분이 좋았다. 상품을 준다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복잡했던 머리도 조금은 환기가 된 듯했고.
하지만 아우라는 곧 당황하고 말았다.
주인이 가져온 상품이라는 건 사람 키만 한 박제 곰이었다.
“이, 이게 상품이라고……?”
“네. 좀 무겁긴 합니다. 드실 수 있겠습니까?”
아우라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상품이라는 건 받는 사람이 좋아야 하는 게 아닌가? 대체 이런 걸 줘서 어쩌겠다는 거지?’
속으로만 열심히 따지고 도는 아우라를 카를이 모를 리 없었다. 그는 그녀의 심각한 표정에 큭큭 웃기 시작했다.
“웃지 마.”
“들고 갈 수 있겠어? 안 되겠으면 들어 주고.”
들어준다니. 아우라는 그런 귀엽기 짝이 없는 빚을 지고 싶진 않았다.
“됐어. 안 받아 갈 거니까. 주인장, 상품은 안 받는 걸로 하겠소.”
“그럴 수야 있나.”
카를이 곰을 번쩍 안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