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05화
아우라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새벽의 일이 가감 없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그녀가 불에 덴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발, 카를!”
아우라가 도망치듯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문 앞에서 멈칫하고 서 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가운 차림으로 나갈 용기가 있을 리 없었다.
한편, 카를은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새빨개진 얼굴. 어쩔 줄 모르는 표정. 꽉 모아 쥔 손. 살짝 문 입술.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저를 향한 욕까지.
그런 것들을 상상하고 있노라니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카를이 아우라에게 다가가 그녀를 뒤에서 꽉 안았다.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있을까.”
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스읍 하고 숨을 들이쉬니 아우라 특유의 향이 났다.
“넌 날 좋아하지도 않는데. 억울하게.”
말을 뱉어 놓고 나니 괜한 심술이 났다. 카를은 내친김에 그녀를 안은 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느릿한 걸음이었지만 분명 침대로 향하고 있었다. 아우라는 어설픈 걸음으로 그에게 끌려갈 뿐이었다.
또 한 걸음, 마지막 한 걸음.
풀썩하고 카를이 아우라를 침대에 눕혔다. 의외로 그녀는 별다른 반항을 안 했다. 그저 카를을 멀뚱히 올려다볼 뿐이었다.
카를이 천천히 그녀의 입술을 향해 내려왔다. 순간 아우라가 정신을 차린 듯 흠칫 놀랐다.
“카를. 잠깐만.”
그녀가 양손으로 카를의 가슴을 밀었다. 그러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너무 늦은 거 아냐?”
“아니, 아니. 잠깐.”
카를을 밀어내는 아우라의 손길이 다급해졌다. 그는 아우라의 손목을 잡으려다가 흉터를 보고 그만두었다.
그는 점점 다가왔다. 입술이 닿기 직전, 아우라가 번개처럼 외쳤다.
“가, 갈게!”
“아니. 못 나가, 이제.”
“축제에 갈게, 축제!”
카를이 비로소 멈칫했다. 그는 다시 아우라와 거리를 벌렸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이야?”
“그래. 축제고 뭐고 갈 테니까 이제 그만해.”
아우라가 색색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카를이 피식 웃었다. 얼마나 급했으면 축제에 간다는 소리까지 했을까 싶었다.
어차피 축제엔 데려갈 작정이었다. 황제 부부의 암행을 공식적 일정으로 만들면 그만이니. 하지만 카를은 마지못한 척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얌전히 침대까지 와 준 게 어디인가.
물론, 한편으론 이상하긴 했다. 결국 거부할 거면 왜 침대까지 왔는지.
“좋아. 대신 그 약속 꼭 지켜야 해.”
“……알았어.”
카를은 그제야 아우라를 일으켜 주었다. 그리고 아쉬운 듯 뺨을 잡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럼 난 다 쉬었으니 집무실로 가봐 야겠어.”
아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은 샛문 문고리를 잡았다가 그녀에게 말했다.
“아우라. 정말 여기에 더 있어도 돼.”
“아니야. 너 나가자마자 옷 갈아입고 나갈 거야.”
카를이 귀엽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아, 정말이지.”
가기 싫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샛문을 열고 집무실로 갔다. 이대로 있다간 영원히 이 방을 못 나갈지도 몰랐다.
달칵.
샛문이 닫혔다. 혼자 남은 아우라가 깊이 심호흡을 했다.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있을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몸이 굳고 말았다. 사랑한다는 말을 처음 듣는 것도 아닌데.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들킬까 봐 조마조마할 정도였다.
그래도 그때는 자신을 안은 카를을 뿌리칠 수 있었다. 정말로 뿌리칠 마음이었고.
문제는 다음 말이었다.
‘넌 날 좋아하지도 않는데. 억울하게.’
그 말을 듣고 나니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영부영 침대로 왔고, 정신을 차리니 카를이 자신 위에 올라와 있었다.
아우라는 눈을 꽉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제발 정신 차려…… 제발.”
***
아우라는 보석함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손수건과 팔찌. 어떤 걸로 손목의 흉터를 가릴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팔찌는 카를에게 받은 날 이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랜만의 외출인지라 장신구를 할 필요를 느끼는 아우라였다. 문제는 얄궂게도 흉터를 가릴 만한 팔찌는 카를이 준 것뿐이란 점이었다.
그때 미나가 짐 가방을 들고 다가왔다.
“폐하, 지시하신 대로 짐을 다 쌌습니다. 보좌관들이 예약한 숙소로 미리 짐을 부치겠습니다.”
“그래. 부탁해.”
오늘 밤 카를과 아우라는 축제에 간다. 예약해 둔 여관에서 하룻밤 묵고 내일 아침에 축제장을 살핀 후 돌아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우라는 그사이에 일정을 하나 더 끼워 넣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밀론에 들릴 작정이었다. 새로운 제니아 지구의 상황을 자신의 눈으로 살펴보고 싶었다.
물론 카를 몰래 혼자 갈 생각이었다. 그래야 자경단을 만나도 솔직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테니.
잠시 후, 짐을 부치러 갔던 미나가 돌아왔다.
“폐하, 황제 폐하께서 본궁 앞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그래…… 알았어.”
아우라는 보석 상자 앞에서 다시 망설였다.
“……폐하?”
미나가 약간의 재촉을 담아 그녀를 불렀다.
‘아…… 모르겠다.’
아우라는 결국 팔찌를 잡았다.
***
축제가 한창인 광장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아우라와 카를은 그 인파 속을 걷고 있었다. 보이진 않지만 수많은 기사가 그들을 비호하고 있었다.
“카사의 축제는 처음 와 본 건가?”
카를의 물음에 아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자비 시절엔 데려와 줄 이가 없었다. 그때 카를은 훈련 때문에 워낙 바빴으니까.
“카를, 넌 어떤데?”
“나도 처음이야.”
‘하기야 카를도 놀러 다니는 거랑은 거리가 멀지.’
아우라는 슬쩍 손을 내려다보았다. 대체 그와 손은 왜 잡고 걷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렇게 붙들릴 줄 알았으면 마차에서 내릴 때 손을 맡기는 게 아니었다.
“손은 놔도 되는데.”
“축제가 생각보다 요란해. 잃어버리면 못 찾아.”
아우라도 알고 있었다. 그건 손을 잡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애도 아니고, 따라붙은 기사가 몇인데.
좌우로 늘어진 좌판엔 온갖 음식과 술을 팔고 있었다. 제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신기한 물건들도 보였다. 두 사람은 그런 것들을 구경하며 거리를 걸었다.
“아.”
아우라는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눈이 무기상을 향했다.
“왜 그래? 사고 싶은 거라도 있어?”
카를이 무심코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석궁을 하나 살까 해서.”
“석궁?”
카를은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맛깔 나는 음식과 온갖 장신구는 다 지나치고선 고른 게 무기라니.
“석궁은 있지 않아? 무기 모으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네.”
“갖고 있던 석궁, 지금은 없어.”
“왜? 잃어버렸어?”
아우라가 물끄러미 카를을 보며 말했다.
“수트라에서 라이언이 부숴 버렸거든.”
그 말에 카를의 표정이 굳었다. 석궁을 부수다니. 싸움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뭐?”
“날 위협하길래 나도 석궁을 들었지. 쐈지만 맞추지 못했고, 라이언이 빼앗아서 부쉈어. 그게 다야.”
아우라는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일단 석궁을 들었다는 건 그만큼 위험했다는 뜻이었다. 빼앗아 부쉈다면 더 위험한 상황이 이어졌을 테고.
“그게 다일 리가 없잖아. 그리고? 부순 후에는?”
아우라는 조금 난감한 듯 말했다.
“음……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그 작자가 원하는 대로 계약서에 서명을 했는데…… 이후의 일은 뭐, 뜻대로는 안 됐어. 너도 그때 봐서 알잖아.”
카를은 속에 불길이 이는 듯했다. 수트라에서 라이언의 목을 잘랐어야 했다. 애초에 황궁까지 데려올 것도 없는 문제였다.
또다시 의문이 들었다. 그녀가 왜 그때 계약서에 대해서 굳이 숨겼는지.
“대체 왜…….”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문제를 따졌다가 무슨 사달이 벌어졌는지 그도 뼈저리게 겪어 알았으니.
카를의 질문을 이은 건 오히려 아우라였다.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그래.”
“그 말을 하려면…… 그날의 일을 다시 기억해야 하잖아. 그게 끔찍해서 안 했어. 시간이 지나니 괜찮아졌지만.”
“…….”
“그땐 수트라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황궁에 라이언이 있다는 생각을 하니…… 그냥 그 일을 회피하고 싶었어.”
아우라는 좀 허무해졌다. 뱉어 놓고 나니 별것도 아닌 일로 호들갑을 떤 것만 같았다.
“아무튼, 난 석궁을 살 거야.”
아우라의 말에도 카를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를 볼 뿐이었다.
‘왜 이러지. 화났나?’
그럴 수도 있었다. 라이언의 이야기가 나오면 카를은 화를 내니까. 또 아우라의 말을 우스운 변명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 해도 이게 사실인 걸 어떡해.’
“……알았어. 사자, 석궁.”
카를이 그녀를 무기상으로 데려갔다.
“석궁을 좀 봤으면 좋겠는데. 여자도 쓸 수 있을 정도로 가볍고 작은 걸로.”
“네! 석궁 말입니까? 이쪽을 보십시오!”
주인이 활기차게 한쪽 벽을 가리켰다. 그곳엔 수많은 석궁이 매달려 있었다. 카를이 말했다.
“골라.”
석궁을 둘러보던 아우라가 그중 가장 작은 것을 가리켰다.
“저걸로 해야겠어.”
카를이 주인에게 말했다.
“저만한 크기에서 가장 좋은 재료로 만든 걸로 볼 수 있나?”
“있긴 합니다만, 가격이 좀 나갈 텐데요.”
“상관없어. 보여 주게.”
신이 난 주인은 바닥의 상자를 열어 석궁 하나를 꺼냈다.
“석궁은 활과 달라서 목재보다는 걸림쇠의 만듦새가 중요합니다. 이 녀석이 요즘 나온 것 중에 가장 깔끔합니다.”
주인이 한번 보라는 듯 석궁을 내밀었다. 아우라가 받아서 살폈다. 몸체는 검게 칠해져 있었고, 쇠는 매끈했다.
‘마음에 들어.’
카를은 아우라의 얼굴을 보더니 주인에게 말했다.
“이걸로 하지.”
그가 자연스럽게 값을 치르려 했다. 아우라가 얼른 금화를 꺼냈다.
“내가 살게. 내 거니까.”
하지만 카를이 고집스럽게 그녀의 손을 막았다. 그리고 자신의 금화를 기어이 주인에게 내밀었다. 아우라가 발끈했다.
“카를! 대체 뭐야. 왜 네 멋대로…….”
“정 싫으면 받고 버려도 돼.”
아우라가 그를 쏘아보았다. 대체 뭐 하자는 짓인지 알 수 없었다. 멋대로 선물을 안겨 주곤 싫으면 버리라고?
“됐어. 너한텐 안 받아.”
아우라가 돌아서려 했다. 그때 카를이 한풀 꺾인 말투로 말했다.
“미안해서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