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04)화 (104/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04화

루안은 카를의 의도를 이해했다. 딱 한 걸음 떨어져서 루안을 주시하겠다는 거였다. 정확히는 핀을.

루안이 폭죽을 받자 카를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막 방을 나가려던 카를에게 루안이 말했다.

“아우라는 괜찮은 겁니까? 죽으려고 했다면서요.”

“손목을 그었어. 꽤 깊게.”

루안은 숨을 삼켰다. 손목을 그었다니. 할 수만 있다면 당장 황궁으로 가고 싶었다.

“아, 아우라는 정말 괜찮습니까? 생명엔 지장이 없는 게 확실합니까?”

카를은 뭔가를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말을 골랐다. 루안은 조금 놀랐다. 카를이 이토록 뭔가를 망설이는 걸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핀을 숨기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줬어. 아마 그 상처가 더 낫기 힘들겠지. 이젠 날 죽도록 미워할 테고.”

“…….”

“하지만 그렇다 한들.”

카를은 그대로 루안의 방을 나가 버렸다.

그날의 일을 회상하며 루안은 수도 쪽으로 말을 몰았다.

‘그렇다 한들.’

루안은 그 말을 대해 처음엔 이렇게 생각했다. 아우라에게 상처를 줬다 해도 ‘그렇다 한들’ 어쩔 수 없다고.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같았다. 그 누구의 마음도 헤아릴 줄 모르는 그런 냉혈한.

하지만 그날을 되새겨 볼수록 점점 생각이 달라졌다.

‘어쩌면 그런 말이 아니었을까.’

아우라가 카를을 죽도록 미워해도 ‘그렇다 한들’ 어쩔 수 없다고.

루안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뭐…… 그렇다 한들.”

자신의 역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핀을 아우라에게서 숨겨 놓는 것.

***

아우라가 눈을 떴을 때는 환한 아침 햇살이 침대를 적시고 있었다. 그것만 봐도 그녀는 자신이 늦잠을 잤음을 알 수 있었다.

멍한 정신이 깨니 비로소 기억이 났다. 자신이 카를의 방에서 잠들게 된 그 모든 과정이.

긴장을 하며 몸을 뒤척였다. 다행히 침대에는 아우라 혼자였다.

“……하아…….”

안도와 후회의 한숨을 함께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술기운 때문에 머리가 깨질 듯했다.

몸에 어설프게나마 가운이 걸쳐져 있었다. 시녀의 솜씨일 린 없고 카를이 해 놓은 듯했다. 예전에 단추를 모아 둔 것도 그렇고, 카를은 이상한 데에서 섬세했다.

‘나가야지.’

아우라가 침대 밖으로 발을 내려놓았다.

“아아…….”

몸 여기저기가 심하게 쑤셔 댔다. 카를의 방만 아니면 다시 눕고 싶을 정도였다.

그녀는 무심코 협탁을 봤다. 협탁엔 간단한 아침과 쪽지 하나가 남겨져 있었다.

「깰 기미가 안 보이길래. 시녀에겐 들어오지 말라고 했으니 편하게 먹고 쉬다가 가. 아예 안 가면 더 좋겠지만.」

아우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쪽지를 보았다.

‘아예 안 가면 더 좋겠다고?’

장난인지 뭔지 모를 말이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장난이겠지만 아우라에겐 다르게 느껴졌다.

카를이 또 성큼 다가오는 느낌.

그 느낌은 달콤하고 자극적이었다. 그래서 뿌리치고 싶었다.

‘넌 무섭지 않아? 그 모든 마음이 무의미한 일이 되는 게.’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으면 되지.’

그 말을 하며 짓던 카를의 미소. 그 미소에 한도 끝도 없이 기대게 될 것 같아서였다.

‘흔들리지 말자. 어젠…… 그건 그냥 술기운이었어.’

아우라가 카를의 쪽지를 움켜잡아 구겼다. 그녀는 터벅터벅 걸어 발코니를 열었다.

발코니 밖으로 쪽지를 던지려던 아우라가 멈칫했다.

그녀의 손이 툭 떨어졌다. 그녀는 구겨진 쪽지를 다시 폈다. 다시 보니 글씨체가 안 어울리게 참 얌전했다. 잠든 아우라를 깨우기 저어하는 듯.

‘……내가 술이 덜 깼나.’

또 못된 버릇이 나오려 했다. 무의미한 일인 줄 알면서도 남겨 두고 싶은 충동. 머리카락과 단추, 다 말라비틀어진 꽃처럼.

아우라는 협탁의 아침 식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시녀를 들이지 않았다고 했으니 카를이 직접 두었곘지.

그녀는 침대에 풀썩 걸터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하면서도 수프를 떠먹기 시작했다. 조금 식었지만 맛은 좋았다.

‘확실해. 카를은 핀을 황궁 밖으로 내보냈어.’

수프 한 술.

‘수도 밖으로 나갔을까? 아닐 것 같아. 그랬다면 카를은 좀 더 늦게 돌아왔을 거야. 일단은 수도 안에서 찾아보자.’

빵 한 입.

‘수도 안에서 카를이 갈 만한 곳…….’

딸기 한 알.

‘혹은 카를이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생각 좀 그만해.’

카를의 말이 환청처럼 들려왔다. 멈칫. 빵을 집으려던 아우라가 생각을 멈추었다.

‘넌 나와 있을 때 절대 날 보지 않잖아. 온갖 생각을 다 하면서 내게서 뭘 알아 갈까, 그거에만 빠져 있지.’

그렇게 말하며 파고들던 손끝이 다시 느껴지는 듯했다.

“……미쳤어, 정말.”

아우라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녀가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정신 좀 차려. 그게 뭐라고. 그냥 이전처럼 하룻밤을 보낸 것뿐이잖아.’

하지만 그녀도 알고 있었다. 어젯밤은 이전의 그 수많은 밤과 달랐다는 것을.

아우라는 혼란스러웠다. 그는 대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그토록 불타던 분노마저도 힘을 잃은 걸까.

미워해야 해. 미워해야 해. 아우라가 주문처럼 되뇌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그를 더는 미워하지 않는다는 사실뿐이었다.

생각이 미처 다 정리되지도 못했을 때였다.

벌컥.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말할 것도 없이 이 방의 주인이었다.

아우라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카를 역시 아직도 아우라가 있어 조금 당황한 듯했다.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파?”

잔뜩 붉어진 그녀의 얼굴을 보고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우라는 얼른 일어나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잘되진 않았지만.

방금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죽어도 들켜선 안 됐다.

“아니, 방이 좀 더워서.”

“덥다고? 이 가을에?”

카를이 아우라의 이마에 손을 댔다. 아우라가 흠칫 놀라 손을 뿌리쳤다.

“괘, 괜찮아.”

“열이 좀 있는데. 황궁의를 불러 줄까?”

“괜찮다니까. 노크는 왜 안 해? 깜짝 놀랐잖아.”

카를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내가 내 방에 들어오는데 왜 노크를 해.”

지극히 맞는 소리였다. 아우라는 할 말을 잃었다.

“정오가 넘어가니까 당연히 방으로 돌아간 줄 알았지.”

‘세상에. 벌써 정오가 넘었구나.’ 

생각보다 많이 흐른 시간에 아우라가 민망해졌다.

하지만 그건 아우라의 탓이 아니었다. 카를은 새벽하늘이 밝아 올 무렵까지 아우라를 놔주지 않았다. 그래 놓고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이는 카를이 괴물 같았다.

카를이 말했다.

“안 그래도 할 말이 있었는데 잘됐네. 내일 수도에서 축제가 열려. 수도 분위기 좀 살필 겸 가 볼까 하는데. 이틀 정도.”

“이틀? 밖에서 잔다는 뜻이야?”

“말이 이틀이지 다음 날 오전에 돌아올 거야.”

“그래. 다녀와.”

아우라는 그가 외박에 대한 허락을 받는 줄 알았다. 그래도 명색이 부인이니까. 그러자 카를이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너도 가.”

“……나?”

“그래. 너 황궁 떠나는 거 좋아하잖아.”

놀림인지 조롱인지 경고인지 모를 말이었다. 아우라가 고개를 저었다. 축제는 즐길 수 있다지만 카를과 함께라면 싫었다. 특히 마음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더.

“난 싫어. 기사들과 다녀와.”

아우라가 딱 잘라 말하자 카를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불길해서 아우라가 다시 못 박았다.

“정말이야. 안 가.”

“뭐, 그래 그럼.”

그는 순순히 물러나더니 협탁의 음식을 보았다. 제법 손을 댄 모양새가 만족스러운 듯했다. 그는 아우라의 머리를 쓱 쓰다듬었다.

“잘했네. 혼자서 식사도 하고.”

아우라는 자신을 애 다루듯 하는 그의 행동에 발끈했다. 그러나 여기서 따졌다간 꼴만 우스워질 게 뻔했다.

“다 먹었으니 난 이제 갈 거야. 내 옷은 서재에 있지?”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옷은 거기서 다 벗어 던졌다. 아우라는 샛문으로 나가려 했다. 그때 카를이 샛문 옆 콘솔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기. 아침에 가져다 놨어.”

콘솔엔 드레스가 곱게 개어져 있었다. 아우라가 미심쩍다는 듯 물었다.

“……네가?”

“시종 시녀들이 아무리 아랫사람들이라지만 굳이 우리가 서재에서 뒹굴었다는 걸 알릴 필욘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 피곤하고 바쁜 아침에 옷을 챙겨 왔다 이 말이었다.

‘그 말을 저렇게 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겠지.’

“그래. 고마워.”

아우라는 예의상 인사하고 콘솔로 갔다. 그렇게 옷을 가지고 오긴 했는데 지금부터가 난감했다.

‘옷을 갈아입고 나가야 하는데.’

카를이 나갈 생각을 안 했다. 그의 방이니 눈치를 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대낮에 가운만 입고 황궁을 돌아다니면 기삿감이 될 테고.

더는 그의 앞에서 벗은 몸을 보이는 것도 싫었다. 어제의 일을 생각해서라도.

눈치가 없는 건지, 없는 척을 하는 건지. 카를은 멀뚱하게 서 있기만 했다. 아우라는 일단 돌려서 물었다.

“그런데 방에는 왜 돌아온 거야?”

“잠깐 쉬고 집무실로 가려고 했지.”

쉬는 게 목적이면 더 문제였다. 그가 다 쉬고 나가길 기다리는 것도 이상했다. 이젠 솔직하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잠깐만 응접실이나 집무실로 가 줄래? 옷을 갈아입어야겠는데.”

“아하. 저런.”

그는 나가긴커녕 소파 등받이에 슬쩍 걸터앉았다.

“그럼 내가 안 나가면 너도 이 방에서 못 나가?”

“장난치지 말고, 카를.”

“쪽지에도 썼는데. 여기 계속 있으면 좋겠다고. 장난인 줄 알았어?”

‘말을 말자.’

아우라는 체념하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쨌건 카를은 언젠가 나갈 거였다. 아우라는 그때까지 버텨 볼 심산이었다.

카를은 속으로 웃었다. 발끈한 마음을 꾹꾹 누르는 그녀의 속이 다 보이는 듯했다. 저렇게 애써 태연한 척하려는 게 참 아우라다웠다. 그래서 더 괴롭히고 싶었다.

카를이 아우라의 곁에 앉았다. 아우라가 슬쩍 거리를 벌렸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 내리곤 아우라를 보았다.

“왜. ……왜.”

“어제 그렇게 울어 놓고 또 침대로 오는 건 무슨 용기인가 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