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03화
그는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순진한 입맞춤에 비해 손은 그러질 못했다.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손길에 아우라가 흠칫 굳었다.
‘설마 여기서?’
동그랗게 뜬 눈이 귀엽다는 듯 카를이 눈가에 입을 맞췄다. 하지만 역시 연한 살을 파고드는 손끝은 순진하다고 할 수 없었다.
참다못한 아우라가 그를 밀어냈다. 그러나 그는 놔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우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쾌감이 머리끝까지 닿고 있었다.
“그……만해.”
“싫어.”
카를이 심술궂게 말했다. 그는 아우라의 귓불을 이로 물었다.
“아아…… 잠깐.”
은근하고도 짜릿한 쾌감이 정신없이 몰아쳤다.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어 갔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와중에 카를이 귓가에 속삭였다.
“넌 나와 있을 때 절대 날 보질 않잖아. 온갖 생각을 다 하면서 내게서 뭘 알아 갈까, 그거에만 빠져 있지.”
“……아, 카를, 잠깐…….”
“분명 넌 방금 나와 잤는데 그새 넌 여기에 없는 것 같아. 아무리 애걸하고 매달려도 너는 이렇게 또 어디론가 가 버리려 해.”
카를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들리는 듯했다. 아우라는 힘이 빠져 그에게 기댔다. 비로소 카를의 손이 아우라의 안을 놔주었다.
아우라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카를을 보았다. 아파서도, 쾌감이 도를 넘어서도 아니었다. 그냥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이 벅찼다. 지금 그가 아우라에게 하는 말까지도.
“그러니까, 한 번만이라도 그 빌어먹을 생각 없이 날 좀 봐 줄 순 없는 거야?”
아우라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가득 차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람을 제멋대로 휘둘러 놓는 주제에.”
아우라가 원망스레 중얼거렸다. 자신의 몸에 제 흔적을 점점이 남겨 놓는, 그런 못된 짓은 다 한 주제에. 어째서 그렇게 쓸쓸한 듯 말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미안해.”
카를이 한숨을 내쉬며 사과했다.
“하지만 나도 네 상상 이상으로 네게 휘둘리고 있어, 아우라.”
“…….”
“그러니 너도 하루 정도는 휘둘려 줄 수 있는 거잖아.”
아우라는 그 말이 참 우습다고 생각했다. 고작 하룻밤 자신을 휘두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언젠가 그가 혼자 남아 오늘의 기억을 곱씹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넌 무섭지 않아?”
아우라가 물었다.
“그 모든 마음이 결국 무의미한 일이 되는 게.”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으면 되지.”
그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어떻게 저렇게 자신만만할 수 있는 걸까. 아우라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그에게 맹목적으로 기대고도 싶었다.
하루 정도는 휘둘릴 수 있는 거니까. 그의 말처럼.
“……여기는 좀 무서워.”
“욕실이?”
“나 수영 같은 건 전혀 못 해. 물에 잠겨 있는 것만으로 숨이 차. 그래서 아까처럼 네가 그러면…… 숨이 막히는 것 같아서 싫어.”
아우라는 워낙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법이 없었다. 수영을 못 한다는 것도 카를은 지금 알았다.
카를이 아우라의 턱을 잡아끌었다. 이번에는 그가 그녀의 생각을 꿰뚫듯 그 청록빛 눈동자를 지긋이 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해 주길 바라?”
“……침실로 가.”
아우라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는 덮고 왔던 외투를 몸에 걸치고 타박타박 욕실을 나갔다. 아우라가 없으니 욕탕의 물이 바로 식는 듯했다.
카를은 망설임 없이 욕조에서 일어났다. 기다릴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를 원하는 마음도, 몸도.
그는 이윽고 침실로 들어섰다. 침대로 향하는 아우라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그녀를 잡아 돌려 입을 맞췄다.
입술을 파고드니 아우라가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두 입술은 마치 오늘 처음 만났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숨결을 나눴다.
긴 밤의 시작이었다.
***
이른 오전부터 안센나는 정신이 없었다.
“이쪽으로! 조심해서 옮겨라. 마지막 짐이니 흘러내리지 않게 단단히 고정하고.”
루안이 짐꾼에게 지시했다. 짐꾼은 말 등에 짐을 올리고 끈으로 고정했다.
“후우…… 안센나를 떠나다니. 꿈만 같습니다.”
자경단원 하나가 루안에게 말했다.
이제 그들은 수도의 밀론 지역에서 자리를 잡는다. 카사 황실이 준 이주 자금도 충분했다.
루안이 그에게 말했다.
“밀론에 가면 자경단 일도 복잡해질 거야. 카사의 경비대와 잘 지내야 할 거고. 행정 작업도 늘어날 테니 똑똑한 사람들을 좀 추려 놓는 게 좋겠어.”
“네, 대장.”
“대장이라고 하지 말라니까. 대장직 내려놓은 지가 언제인데.”
루안이 나무라듯 말했지만 부하는 웃어넘길 뿐이었다.
안센나에 돌아온 후 루안은 자경단원들 돕고 있었다. 단, 황실에 그의 이름이 흘러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루안은 말에 올랐다. 이제는 정말 안센나를 떠나야 했다. 말할 것도 없이 더 나은 곳을 향해서.
그런데도 루안의 얼굴엔 그늘이 졌다.
‘내가 수도로 가는 게 옳은 일일까.’
그는 떠올렸다. 한 달 전, 갑자기 카를이 나타났던 그 새벽을.
안센나로 돌아온 루안이 그 생활에 막 다시 적응했을 때였다.
달이 밝던 새벽녘, 누군가 숙소에 있던 그를 찾아왔다.
똑똑.
노크 소리에 막 침대에 누우려던 루안이 일어났다. 대원들이 오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자경단 본부는 외부인이 쉽게 들어올 수도 없었다.
대원들이 급한 일로 찾아왔나 싶어서 루안이 문을 벌컥 열었다.
“이 시간에 무슨…….”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거구의 남자.
‘적인가.’
루안이 천천히 옆으로 손을 뻗었다. 문 옆 콘솔엔 작은 나이프가 있었다.
“멈춰.”
로브를 쓴 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익숙한 목소리에 루안이 멈칫했다. 자신이 제대로 기억하는 게 맞다면……. 아니, 그렇다면 이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황제 폐하?”
“알아봤으면 들여보내 주지 그래.”
정말이었다. 카사의 황제가 안센나에 찾아온 것이다. 행색을 보아하니 아마도 혼자.
루안은 일단 길을 비켜 주었다. 카를이 미끄러지듯 루안의 방으로 들어왔다.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대체 본부의 경비는 어떻게 뚫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대체 이 밤에 여기까진 어떻게 오셨습니까?”
루안이 물었다. 카를은 로브의 모자를 벗었다. 창백한 얼굴과 검은 눈동자를 보고 루안은 새삼 놀랐다. 정말로 카를 황제가 맞았다.
“할 말이 있어서.”
당신이 나에게? 의문이 떠오르자 바로 반발심이 생겼다.
“우리가 야밤에 담소를 나눌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까칠한 말에도 카를은 반응이 없었다. 평소 자주 풍기곤 하던 조롱 섞인 분위기도 싹 사라져 있었다.
루안은 직감했다. 상당히 다급하게 해결해야 할 일이 벌어졌음을.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카를이 자신을 찾아왔다면…… 그건 아우라에 관한 것뿐이었다.
“아우라에게 무슨 일이 있습니까?”
카를은 대답 대신 로브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은은하게 빛나는 수정 구슬이었다.
“이건…….”
“핀이다.”
루안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의 가슴이 순간 쿵 내려앉았다.
제니아인들을 지옥으로 몰고 간 핀. 그것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핀을…… 다 모은 겁니까?”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모았지, 아우라가. 그리고 죽으려 하는 걸 겨우 살려 놨어.”
“뭐라고요?!”
루안은 자기도 모르게 카를의 어깨를 꽉 잡아 끌어당겼다.
어떤 마음으로 아우라를 그에게 보냈는데. 또 어떤 마음으로 안센나로 돌아왔는데!
이 남자는 아우라의 목숨은 전혀 중요치 않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겁니까!”
“마음 놓고 슬퍼할 여유 같은 건 없으니까 놔.”
카를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루안의 손을 툭 쳐 냈다. 그리고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는 루안에게 대뜸 핀을 내밀었다.
“이건 네가 가지고 있어.”
“……그게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아우라가 깨어나면 다시 핀을 찾기 시작할 거야. 아우라는 이제 내 눈치 따위 보지 않고 황궁을 뒤지겠지. 황궁 밖에서 이걸 맡아 줄 사람이 필요해.”
“……? 이유는 알겠습니다만, 왜 제가…….”
황제에게 충성할 사람은 수없이 많을 터다. 왜 이토록 중요한 물건이 이렇게 껄끄러운 사이에 오간단 말인가.
“너는 아우라가 어떤 회유와 협박을 해도 핀을 안 넘길 테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루안은 멍하니 그를 보았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핀을 보관한다면? 억만금을 줘도 아우라에게 넘기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루안에게 사랑을 맹세한다고 해도 줄 수 없었다.
루안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서 제게 안센나에 있으라고 하신 겁니까?”
카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핀을 다시 숨겨야 할 날이 올 테니까.”
“제가 이걸 받으면 아우라를 피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아십니까?”
핀을 보관한다면 아우라를 만날 수 없었다.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녀와 거리를 지켜야 했다. 그녀가 다시 한번 함께 도망치자고 해도……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카를이 말했다.
“내가 생각하기엔 이 방법이 아우라를 살리는 최선이야. 최선이기에 선택했을 뿐이고. 자네에겐 더 나은 생각이 있나?”
분하게도 없었다. 사실 없는 정도가 아니었다. 루안의 마음이 아프다는 것만 빼면 아주 탁월한 방법이니. 만약 카를이 다른 이에게 핀을 맡긴다? 그건 그것대로 불안할 거다.
루안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는 결국 핀을 받아들였다.
“아우라가 안센나로 오지 않도록 잘 막아 주십시오.”
“안센나의 제니아인들을 곧 수도로 부를 거다. 되도록 황궁에서 가까운 곳으로.”
“네?”
그게 또 무슨 말이란 말인가. 그럼 루안과 아우라가 가까워지지 않나.
“어느 지역으로 너희를 부를지는 아직 결정 못 했지만. 자, 이걸 받아.”
카를이 또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그것은 작은 폭죽이었다.
“수도에 왔을 때 위급한 일이 벌어지면 터트리도록 해.”
“…….”
“바로 그쪽으로 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