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02화
그를 밀어내려던 손이 그대로 그의 어깨를 잡고 말았다.
그가 ‘제발’이라고 했다. 제발 자신을 밀어내지 말라고. 분명히 그렇게 애걸했다.
이것만이었다면 아우라는 견뎠을 거였다.
미워해도 좋으니 버리지 말라는 말. 그녀를 살릴 수 있어 행복했다는 말.
그것도 아우라는 견딜 수 있었다.
그녀가 견디기 어려웠던 건, 애써 피했던 건 따로 있었다.
내가 살아남은 건 너와 상관없노라 말했을 때 그가 지었던 서글픈 미소. 죽음이 두렵지도 않으냐고 묻던 불안한 얼굴. 이혼 신청서를 보던 슬픈 눈빛.
그조차도 미처 숨기지 못했던 그 순간들. 그러니까, 진심들.
지금도 카를은 그랬다. 어깨에 닿은 뜨겁고 땀에 젖은 이마, 귓가에 닿은 고통 어린 숨소리, 그녀가 뿌리칠까 봐 겁먹은 채 애처롭게 등을 감싼 손길.
그런 것들에서 배어 나온 진심들이 얼기설기 뒤섞였다. 거기 있어라, 다가오진 말아라 기도했던 것들이 결국 그녀의 마음을 파고들어 터져 버렸다.
아우라는 카를이 불쌍했다. 불쌍하고, 안쓰럽고, 애처로웠다.
‘네가 나를 얼마나 살리고 싶었으면.’
아우라가 눈을 꽉 감았다.
‘오죽했으면. 카를 네가 오죽했으면.’
카를이 고개를 들어 아우라와 눈을 맞췄다. 그녀의 눈에 가늘게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녀의 표정에서 카를이 뭘 읽었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다시 입을 맞춰 왔을 때 아우라는 결국 그의 입맞춤을 받아 주었다.
벌려진 입술 사이로 혀가 얽혔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안을 깊게 파고들었다. 아우라의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이건 그저 카를에 대한 연민만은 아니었다. 이건 그녀 자신의 본능이기도 했다. 이 본능이 경멸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나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에 있어 가장 큰 불행을 안겨 준 카를이지만, 가장 지극한 즐거움을 알려 준 것도 카를이므로.
“으응…….”
아우라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카를의 손이 다시 그녀의 치마 속을 찾아들었다. 그는 그녀의 허벅지를 꽉 움켜쥐었다. 데인 듯한 느낌에 아우라가 숨을 길게 뱉어 냈다.
“하아…….”
다리를 타고 점점 위로 올라오는 뜨거운 손길.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숨결. 그 모든 쾌락에 아우라의 정신이 혼미했다.
“카를…… 잠……깐.”
아우라는 무너지듯 그의 어깨에 매달렸다. 그는 그녀의 몸을 받친 채 드레스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훤히 드러난 등을 카를이 쓸어내렸다. 아우라가 부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다. 아랫배에서 뭔가가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아우라는 순간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카를이 멈칫해서 그녀를 보았다.
“카를, 정말…….”
“…….”
“모든 게 엉망진창이야.”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울 듯한 얼굴이었다. 카를이 짙은 눈으로 그녀를 보다가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믿을 수 없게도 아우라는 그 입술에 편안함을 느꼈다.
“괜찮아, 아우라. 괜찮아.”
카를이 그녀의 등을 따뜻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
“엉망진창이어도 돼.”
“…….”
“그래도 널 사랑해, 아우라.”
아우라가 눈을 감았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울 것만 같았다. 카를은 그녀의 숨이 가라앉을 때까지 그대로 그녀를 안은 채 기다려 주었다.
벅찼던 감정이 서서히 빠져나간 후, 아우라는 몽롱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정말 세상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엉망이 된 서재. 떨어지고 밟힌 책들. 부서진 벽장. 불쌍한 카를. 그런 카를의 품에 안긴 자신.
아우라는 맥이 탁 풀렸다. 여기서 더 망가질 게 있긴 할까 싶었다.
그녀는 카를을 끌어안으며 입을 맞췄다. 그의 입안은 뜨겁고 부드러웠다.
카를은 드레스를 계속 벗겨 갔다. 드러난 가슴을 쥐었을 때 아우라가 낮게 신음을 내뱉었다. 카를이 몸을 숙여 가슴을 머금고 혀로 쓸었다. 간지러운 자극에 아우라가 카를의 셔츠를 꽉 쥐었다.
“아…….”
휘청이는 그녀의 몸을 카를이 잡아 세웠다.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탓에 쾌감이 더 적나라하게 퍼졌다. 이윽고 그가 가슴의 끝을 살짝 물었다.
“아!”
머릿속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허리가 앞으로 절로 꺾이고 몸에 경련이 왔다. 같은 자극이 몇 번이나 그녀의 몸을 관통했다. 그만, 그만. 아우라가 그에게 매달리듯 애원했다. 카를은 그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침실로 가자.”
카를이 아우라를 안아 들었다. 멍하니 있던 아우라가 그의 팔을 잡았다.
“아니. 여기서 해.”
아우라가 카를을 보며 다시 말했다.
“여기서 하고 싶어.”
카를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곳에서? 라고 묻고 싶은 표정이었다.
아우라는 깨끗한 침실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그곳에 가면 그 몇 걸음 사이에 잊고 있던 현실이 몰려오리라. 그럼 그녀는 분명 그를 밀어낼 거였다.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받아 주고 싶고, 닿고 싶고, 안고 싶었다.
도저히 너를 놓을 수가 없다던 카를의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아우라야말로 그를 놓지 못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처참한 마음이었다. 이 밤이 지나면 아마 자기 자신에게 가장 혹독한 손가락질을 하겠지.
그래도, 이 처참함 속에서라도 오늘 밤은 그와 있고 싶었다. 마음이 엉망진창이라면 그 마음에 어울리는 엉망진창인 곳에서라도.
그녀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서.”
카를이 말없이 아우라의 외투 위에 그녀를 눕혔다. 이윽고 그가 다급히 그녀의 안을 파고들었다. 길을 만들며 밀려 들어오는 자극에 아우라가 신음을 내뱉었다.
“아아…….”
그녀가 밭은 숨을 내쉬며 가늘게 눈을 떴다. 카를은 그런 아우라를 잡아먹을 듯 내려다보았다.
“아우라.”
그는 참지 못하고 또 달려들어 입을 맞췄다. 벌어진 입에 혀를 밀어 넣자 그녀의 혀가 겁을 먹고 도망쳤다.
“읏…….”
고개를 돌리려는 걸 그가 붙잡아 계속 입을 맞췄다. 혀뿌리를 감아 당기자 아우라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카를은 그녀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아우라의 몸 안에서 들끓는 열기가 점점이 쾌락으로 번져 나갔다. 그 쾌락이 자신을 다 녹여 버리는 기분이었다. 몸의 가장 깊은 곳부터.
“아! 아읏! ……아!”
어느 순간, 아우라는 본능적으로 팔을 뻗었다. 카를이 그녀를 안아 주자 그녀 역시 그를 있는 힘껏 안았다. 서로의 가슴이 닿을 만큼 몸이 꽉 맞물렸다.
아우라는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이토록 절실하고 이토록 맹목적인 쾌락. 아니, 마음이라니.
“아! 아아…… 읏!”
카를이 점점 더 강하게 그녀를 몰아붙였다. 그 역시 반쯤 이성을 잃은 듯했다. 여유 없는 그 움직임이 말해 주는 듯했다. 그의 온 신경은 아우라를 향해 쏠려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황홀감이 두 사람을 지배했다. 그들은 연신 입을 맞췄다.
잠시 후, 아우라가 힘없이 널브러졌다.
“하아…….”
그녀가 숨을 길게 뱉었다. 밤바람이 불어 들어와 땀이 난 그들의 몸을 쓸고 갔다. 아우라의 맨몸이 떨렸다. 그 모습을 본 카를이 바닥에 깔려 있던 외투로 그녀를 감싸곤 훌쩍 안아 들었다.
“카를?”
“씻자. 감기 걸리겠어.”
아우라는 괜찮다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이 몸으로 자신의 방까지 가는 건 무리였다. 결국 카를의 침실로 간다면 씻고 가는 게 나았다.
카를은 침실에 딸린 욕실로 아우라를 데려갔다. 욕탕에는 물이 채워져 있었다. 언제든 황제가 목욕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둔 덕분이었다.
카를은 아우라를 욕조에 눕히듯 앉혔다. 두 사람이 들어서자 물이 넘칠 듯 넘실거렸다.
“괜찮아?”
그는 아우라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그녀는 그 손길을 거부하진 않았지만 눈을 맞추지도 않았다.
‘카를과 다시 자다니.’
이궁에 있을 때만 해도 그가 사무치도록 미웠는데. 게다가 앞으로 합궁은 없을 거라고 못까지 박았는데.
아우라는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참담하기도 했고, 자신이 경멸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편하기도 했다. 마치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는 문득 봄 무도회가 있던 날 밤을 떠올렸다.
그날 카를은 알현실로 가던 발을 돌려 아우라의 방으로 왔다. 그는 그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아우라를 원했다.
‘휴게실을 나오면서 겨우 네게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까 너에게 돌아가고 있잖아.’
아우라가 입술을 꽉 물었다. 지금 보니 자신이 딱 그 꼴이었다. 그렇게나 그를 미워해 놓고 정신을 차려 보니 한 욕조에 들어와 있다니.
그녀가 스륵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고개를 비뚜름하게 들고 그에게 말했다.
“이젠 네 서재에 안 올 거야.”
“화풀이가 끝난 모양이네. 아쉬워라.”
“…….”
“보기 좋았는데.”
카를이 젖어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아우라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이제 그만 이 엉망진창인 시간을 끝내고 싶었다. 할 일을 해야만 한다고, 그녀의 이성이 말하고 있었다.
“핀.”
“…….”
“궁 밖으로 내보냈지?”
카를은 대답 대신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우라는 카를의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단단한 근육이 손에 넘치게 잡혔다. 그 다리를 꾹 누르며 아우라가 그에게 몸을 기울였다. 살랑하고 움직이는 물결이 카를의 가슴에 넘실거렸다.
그녀는 카를의 검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언젠가 그 안에서 자신을 좋아하는 그 마음을 읽어 냈을 때처럼.
‘네가 누구에게 핀을 맡겼을까.’
깊이,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절대 핀을 얻을 수 없는 곳. 나에게 절대 핀을 주지 않을 사람.’
보일 것도 같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파고들면.
“아우라.”
카를이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
그의 다리를 짚고 있던 손이 미끄러졌다. 카를이 빠르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맨몸이 가감 없이 닿았다. 아우라가 주춤 물러났다. 카를이 훅 다가와 그녀에게 속삭였다.
“생각 좀 그만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