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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01)화 (101/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01화

카를의 손이 그녀의 손목으로 갔다. 팔찌 대신 고집스레 감은 손수건 아래로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버리지 마, 아우라.”

낮고 부드러운 음성에 아우라가 고개를 들어 카를을 보았다.

“미워해도 좋으니까 그냥 거기에 둬.”

카를은 슬픈 듯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그러나 곧 잠잠해졌다.

그의 손안에서 그녀가 주먹을 꽉 쥐었다.

“아니, 카를. 버릴 거야.”

“…….”

“나는 버리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의 눈에 슬픔이 번졌다. 아우라는 꼿꼿하게 그 시간을 견뎌 냈다. 계속 휘청거리려 하는 마음을 강하게 다잡았다. 차마 말 못 했던 기억도 미련도 이제는 다 털어 내고 싶었다. 그게 맞는 길이니까.

바스락. 그녀의 손아귀에서 얇은 책장이 구겨졌다.

그때였다. 그들 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리엘의 목소리까지.

“황후 폐하! 이거 봐!”

리엘이 양손을 오목하게 모으고 달려왔다. 얼마나 신나게 논 건지 옷이 반쯤 물에 젖어 있었다.

“그게 뭐야, 리엘?”

아우라가 손목을 돌려 카를의 손을 풀어내고 짐짓 명랑하게 물었다. 혹여나 리엘이 심상치 않은 두 사람의 분위기를 느꼈을까 봐 신경이 쓰였다. 다행히 리엘은 달려오는 내내 제 손만 내려다본 것 같지만.

“금붕어 잡았어! 대단하지?”

그 작은 손에 담긴 건 작은 금붕어 새끼였다. 리엘은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커다란 금붕어를 잡았는데 놓쳤다거나, 개구리를 잡을 뻔했다거나.

“그 금붕어.”

카를이 말했다.

“그렇게 물이 없으면 곧 죽을 거야.”

“엇…….”

그렇지 않아도 리엘의 손에서 물이 점점 빠져나가고 있었다. 입을 뻐끔거리는 금붕어는 분명 힘겨워 보였다.

“어어…… 죽으면 안 되는데!”

아우라가 말했다.

“나와 같이 연못에 풀어 주러 가자, 리엘.”

“응!”

리엘이 마음이 급한지 후다닥 달려갔다. 조금 전 일의 긴장감 때문이었을까. 아우라는 무의식적으로 와인을 마시고는 리엘을 따라갔다.

카를은 그런 아우라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리엘과 연못가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연못의 윤슬에 두 사람의 얼굴이 빛났다.

그녀가, 그리고 그녀가 있는 세상에 생기가 퍼져 나가는 듯했다. 카를은 그 광경이 지나치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지나치게.

카를은 쉽게 우는 사람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눈물은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지 않나. 지금도 이런 비참함에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그는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사람들이 언제 울게 되는지. 언제 마음이 무너짐을 느끼는지.

카를은 그녀가 마셨던 잔 입구를 손으로 쓸었다. 입술이 닿았던 곳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잠시 후, 아우라가 다시 돌아왔다.

“리엘은 좀 더 놀겠대.”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무에 기대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구겨진 책장을 펴고 한 글자 한 글자씩.

카를은 말없이 그녀의 유리잔을 다시 채워 주었다. 아우라가 그 잔을 흘긋 보았다. 그리고 한 모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

피크닉이 끝날 무렵, 바구니의 술은 거의 다 동났다. 꽤 독한 와인도 섞여 있었는데 두 사람은 가리지 않았다.

특히 아우라는 오늘 유난히 술이 당겼다. 그래야 옆의 카를을 더 의식하지 않을 수 있으니.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해가 지자 리엘이 배가 고프다고 칭얼거렸다. 저녁을 먹일 김에 그들은 함께 식당에 갔다. 두 사람 모두 취기가 어느 정도 오른 상태에서 식사를 하던 때였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

요리사가 화이트 와인을 들고 인사를 왔다. 아우라는 손부터 내저었다.

“술은 그만하고 싶어서.”

“아하, 그러시군요. 그럼 다음에 찾아 주십시오.”

“무슨 술이지?”

카를이 물었다. 황제의 관심에 요리사가 신나서 대답했다.

“서부 힌타이타 지역의 주조 장인들이 빚은 와인입니다. 워낙 귀한 거라 황실에도 한 병밖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럼 한 잔만 마셔 보지. 두고 가.”

“네, 폐하.”

요리사가 와인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아우라가 물었다.

“이미 많이 마시지 않았어?”

“요새 누구 때문에 술이 많이 늘어서. 힌타이타는 포도가 유명하니 궁금하기도 하고.”

그가 대수롭지 않게 두 잔에 와인을 따랐다. 연한 연둣빛 와인이 채워졌다. 카를이 먼저 맛을 봤다.

“좋네.”

아우라는 마시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향이 너무 좋은 바람에 결국 한 모금 마시고 말았다.

‘……진짜 좋네.’

그게 화근이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엔 와인병은 반 이상 비어 있었다.

아우라는 어떤 정신으로 리엘을 유모에게 보냈는지 몰랐다. 정신을 차려 보니 자신은 카를과 함께 그의 집무실로 가고 있었다.

가끔 휘청이는 그녀를 카를이 붙잡았다. 그녀의 몸도, 그의 손도 뜨거워서 맞닿은 곳이 얼얼할 정도였다.

‘그래. 서재를 봐야지. 서재를 봐야 해……. 빨리 핀을 찾아서 이혼해야지…….’

이혼 생각을 하니 꼭 서재에 가야 할 것 같았다. 서재를 보지 않아야 하는 이유도 있었던 것 같은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집무실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카를이 대뜸 말했다.

“오늘은 이만하고 가.”

“……왜?”

“그냥. 내일 뒤지면 되잖아. 너무 많이 마시기도 했고.”

그는 문에 제 몸을 툭 기댔다. 깔끔했던 옷매무새가 언제부턴가 흐트러져 있었다. 말투 역시 묘하게 느렸다.

아우라가 말했다.

“나 안 취했어.”

“내가 취해서 그래. 가.”

카를이 성의 없이 복도를 가리켰다. 낮에도 지적했던 지시적인 태도였다. 아우라는 이 와중에도 그 태도가 거슬려서 괜한 오기가 생겼다.

“그럼 넌 자. 난 할 일을 할 테니.”

아우라가 기어이 문을 열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뒤에서 카를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진짜 말 안 듣네…….”

카를이 그러거나 말거나 아우라는 서재에 들어섰다. 엉망진창이 되어 가는 서재를 그녀는 멀거니 바라보았다.

이곳만 보면 아우라는 이상하게 오기가 생겼다.

무너뜨리고 싶고, 헤집어 놓고 싶었다. 그가 그녀에게 준 상처들 그 반의반이라도 돌려주고 싶었다.

아우라가 책장의 책을 짚었을 때였다. 아까 들었던 카를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네가 라이언과 무슨 사이건…… 젠장, 사실은 아무 상관도 없다고.’

‘그런 것조차 상관없이 널 좋아하는 게…… 나도 너무 짜증이 나서 널 괴롭혔다고. 그 말을 하려고 했어.’

“……더워.”

아우라가 혼자서 작게 중얼거리더니 입고 있던 얇은 외투를 벗어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 드러난 둥근 어깨와 가는 팔에 푸른 달빛이 흘렀다.

등 뒤에서 카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길, 진짜.”

정확히는 욕이.

아우라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얼굴을 꾹꾹 누르듯 마른세수를 하고 있었다.

“왜 욕을 해?”

“더우면 창문을 열면 되잖아. 왜 그걸 벗어.”

“네가 열어 줘, 그럼.”

카를이 못 당하겠다는 듯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밤바람이 확 들어왔다.

“후우…….”

아우라가 깊이 심호흡을 했다. 어서 움직여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됐다. 역시 너무 많이 마신 걸까. 아니, 요즘의 그녀 자체가 그랬다. 머리로는 잘 아는 것들을 몸과 마음이 따라 주지 않아 큰일이었다.

바람에 흘러내린 머리칼이 흔들렸다. 아우라는 그것마저 어지러워 눈을 감았다. 입을 살짝 벌리고 숨을 계속 내뱉었다.

“후…….”

짧은 숨결들이 허공으로 퍼져 나갔다.

그때였다. 다급한 걸음 소리에 아우라가 눈을 떴다.

“읍!”

카를이 그녀의 얼굴을 잡고 입을 맞춰 왔다. 흠칫 놀란 그녀가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보폭으로 카를이 다가섰다.

“카……!”

그의 이름이 그의 입맞춤에 먹혀 버렸다. 혀가 발악하듯 그녀의 입안을 휘저었다. 그 자신도 제어가 안된다는 듯 그녀의 입술을 빨아들이고, 혀를 물고, 입천장을 쓸었다.

쿵.

뒤로 물러나던 아우라의 허벅지 뒤쪽에 딱딱한 게 닿았다. 콘솔이었다.

“아!”

카를이 그녀를 훌쩍 들어 콘솔에 앉혔다. 손이 거침없이 치맛단 속으로 파고들었다.

“카를, 잠, 잠깐만!”

아우라가 그의 손을 저지하려 하자 카를이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 가까이 끌어당겼다.

“내가 오늘은 가라고 했잖아.”

“…….”

“내가, 분명히 경고했잖아.”

그래.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그게 이런 의미일 줄은 전혀 몰랐다.

카를이 다시 입을 맞췄다. 그는 뭔가에 화가 난 사람처럼 그녀의 아랫입술을 물고 빨아들였다. 아우라가 고개를 틀어 그를 피하려 했지만 그는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그만, 그만해!”

아우라의 다급한 말에 카를이 비로소 멈췄다. 치맛단에 넣은 손을 거두진 않았지만 적어도 더 파고들진 않았다.

달뜬 숨이 뒤섞였다. 욕망과 오기 그리고 슬픔에 젖은 눈이 아우라를 꿰뚫듯 바라보고 있었다.

아우라는 소리치며 화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건 약속과 다르지 않느냐고. 하지만 입을 비집고 나오는 말은 떨림 가득한 비난이었다.

“무슨 짓이야?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그래, 약속했지. 그런데 아우라. 도저히 못 하겠어. 도저히 너를 놓을 수가 없어.”

“…….”

“처음부터 말했잖아. 네가 살아 있는 게 좋다고. 네가 살아 있는 것만 봐도 환장하는 새끼라고 나는 말했어. 그런데 네가…….”

카를이 못 참겠다는 듯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아프지 않게 목덜미를 무는 느낌. 그 선연한 감각에 아우라가 가늘게 떨었다.

아우라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애써 떨림을 누르고 말했다.

“난…… 난 네가 증오스러워.”

“알아.”

카를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주 잘 알아. 내가 그렇게 만들었잖아.”

그 말에 아우라는 울컥해서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밀려 했다. 그때 그가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툭 얹었다. 치맛단에서 나온 그의 손이 매달리듯 그녀의 등을 안았다.

지친 듯 낮은 숨결과 함께 카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제발…… 제발 부탁이야, 아우라.”

“…….”

“나를 밀어내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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