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00화
피크닉 자리는 화려하다 못해 요란했다.
잔뜩 준비된 샌드위치와 간식, 차와 주스까진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주위에 잔뜩 뿌려 놓은 꽃잎과 장식품들은 뭐란 말인가.
‘……저런 곳에서 카를과 마주 앉아야 한다고?’
영애들의 티 파티도 이 정도는 아닐 거였다. 심플한 걸 좋아하는 아우라에겐 그저 과하고 부담스러웠다.
“윽.”
뒤따라온 카를 역시 놀란 듯 움찔했다. 그는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테오. 적당히 하라고 내가 분명히 말했는데.”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이건 황제 부부가 친해지길 바라는 보좌관들의 기원이 담긴 자리였다. 불행히도 이 예쁜 자리가 분위기를 더 어색하게 만들고 있지만.
“와! 예쁘다!”
리엘이 신나서 달려가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바닥의 꽃잎을 모아 제 머리 위로 뿌리곤 까르르 웃었다. 환한 태양이 리엘의 황금빛 눈동자를 적셨다.
‘그래. 너라도 행복하니 됐다.’
아우라는 체념 섞인 마음으로 리엘의 옆에 앉았다. 카를도 크게 다르지 않은 마음인 듯 약간 떨어져 앉았다. 아우라는 그런 그를 쓱 보았다.
언제나처럼 갖춰 입은 무채색의 차림. 무뚝뚝한 표정. 저런 남자가 이런 곳에서 한 자리 차지한 모습이라니.
‘되게 안 어울리네.’
아우라는 속으로 툴툴거렸다.
어쨌거나 피크닉은 시작되었다.
리엘 앞에선 사이좋은 부부 흉내를 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샌드위치를 나눠 먹었고, 차도 마셨다.
아우라는 카를이 시종 입을 다물고 있을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는 의외로 먼저 리엘에게 이런저런 말을 붙였다. 대부분 리엘을 긴장하게 하는 말이었지만.
“리엘, 별궁을 드나드는 선생은 몇 명이지?”
“일곱 명이요.”
“특별히 어려운 과목은?”
“셈을 하는 거요.”
“그럼 그쪽 선생을 하나 더 붙이지.”
“아, 안 그래도 돼요! 지금도 충분해요.”
리엘은 공부량이 늘까 봐 질겁을 했다. 카를은 리엘이 반응이 이해되지 않았다. 모자라면 더 배우면 되는 거 아닌가.
보다 못한 아우라가 끼어들었다.
“리엘, 물놀이하고 싶지 않아?”
“하고 싶어! 할래! 지금 당장.”
리엘이 벌떡 일어나 연못으로 달려갔다. 실상은 도망간 거지만.
아우라는 못 봐주겠다는 듯 카를에게 말했다.
“놀러 나온 거잖아. 그렇게 몰아붙이면 어떡해.”
“난 몰아붙인 적 없어. 관심을 보인 거지.”
“네 말투는 지시적인 데가 있어. 애들에겐 썩 좋지 않으니 조심하도록 해.”
아우라는 책을 한 권 꺼냈다. 아우라가 책을 펼치자 카를이 손가락으로 꾹 눌러 내렸다.
“너한테는?”
“응?”
“너한테도 조심했으면 해?”
그렇게 말하는 카를의 말투는 짐짓 부드러웠다. 아우라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 난 애가 아니니까.”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그의 말투에 상처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이제 와서 그가 태도를 고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나.
아우라는 들고 온 책을 펼쳤다. 리엘도 없는데 그와 더 이야기할 이유는 없었다.
카를은 그런 아우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바구니를 열었다. 바구니 안엔 온갖 종류의 와인이 가득했다.
그걸 본 아우라는 순간 울컥했다.
“피크닉에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가져와?”
“네가 안 놀아 줄 게 뻔하잖아. 여기까지 나와서 책이나 읽긴 싫고.”
“테오가-”
“……테오가?”
“이런 면에서는 좀 둔하네. 제 주군 안색도 살필 줄 모르고 이렇게 술을 내어 주다니.”
“아.”
카를이 낮게 웃었다.
“안 그래도 수석 보좌관께서 내게 금주령을 내리셨지. 건방지게. 이건 네가 마시고 싶다고 말해 놓으니 특별히 준비해 준 거야. 봐. 잔도 하나뿐이잖아.”
아우라는 기가 막혔다.
“내 핑계를 댔다고?”
“덕분이야. 잘 마실게.”
카를은 유리잔을 꺼내 와인을 따랐다. 그리고 아우라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아무 반응이 없자 그는 잔을 그냥 그녀의 앞에 두었다.
그는 제 찻잔의 차를 잔디밭에 버리고 와인을 채웠다. 그 뻔뻔함에 아우라가 그를 비난했다.
“넌 언제나 이런 식이야.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해.”
“그래. 그래서 미움받을 자격은 충분하지.”
카를이 제 찻잔을 아우라의 유리잔에 부딪쳤다. 쨍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와인을 마시는 카를의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렸다. 카를이 연못가에서 뛰어노는 리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아우라에게 말했다.
“너는 아무렇지 않게 나를 버리잖아.”
“!”
“하지만 넌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하지.”
아우라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이내 담담하게 책에 시선을 돌렸다. 사락, 카를의 귓가로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또 한 번 사락거리는 소리를 카를은 그냥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책장이 넘어갈 때였다.
그가 책장에 손을 얹었다. 글자들 위로 올라온 커다란 손에 아우라가 그를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카를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피하면 바보처럼 보일 것 같았다. 아우라는 똑바로 그를 마주 보았다.
“치워.”
카를이 대뜸 물었다.
“왜 안 버렸어?”
“뭘?”
“내가 돌려보낸 머리카락이랑 내가 뜯어 버린 드레스 단추랑 아마도 내가 보냈던 수선화.”
“…….”
“꽃은 다 시들어서 볼품도 없던데. 왜 간직하고 있었어?”
“그걸 어떻게…….”
“네가 탑에 갔던 날에.”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내가 너한테 나쁘게 말해서 네가 도망쳤잖아.”
아우라의 가슴이 아릿해졌다. 제발 그만해 달라고 울며 그에게 애걸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카를이 말했다.
“사실은 따라갔어. 그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아서.”
“…….”
“그렇게 네 방으로 갔는데 네가 없었어. 당황해서 방을 돌아다니다가 콘솔이 넘어졌고, 거기서 그런 것들이 쏟아지더라고.”
아우라는 그 말에 동요하고 싶지 않았다. 따라오든 따라오지 않았든 결과는 똑같았을 거라고. 그런 식으로 넘겨 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안 됐다.
“따라와서?”
“…….”
“따라와서 뭐라고 하려고 했는데?”
카를이 또 한 번 멈칫했다. 나무 그늘이 그의 얼굴에서 일렁였다.
“나는…… 네가 라이언과 무슨 사이건…… 젠장, 사실은 아무 상관도 없다고.”
“……”
“그런 것조차 상관없이 널 좋아하는 게…… 나도 너무 짜증이 나서 널 괴롭혔다고.”
“…….”
“그 말을 하려고 했어.”
아우라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의미한 질문을 던진 자신도, 저런 대답을 하는 카를도.
‘그래서? 지금에 와서 대체 뭘 어쩌자는 건데?’
아우라는 속으로 따져 물었다. 그리고 말없이 그의 손을 책에서 치워 냈다.
책을 다시 읽어야 했다. 하지만 글자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생각나는 건…… 이 며칠 내내 그녀의 머릿속을 점령했던 한 마디 말이었다.
‘행복했거든.’
진심으로 그가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 어째서 쓸데없는 기억까지 떠오르고 말았는지.
예전에 그와 함께 외출을 나간 적이 있었다. 토파즈 목걸이를 주는 바람에 최악으로 끝났던.
그 외출에서 아우라는 카를에게 거리를 걷는 대신 말 붙이는 걸 금지했다. 그때 카를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었다.
‘하하하……. 정말, 아우라……. 난 너를 절대 못 이길 거야.’
둥글게 휘어지던 해사한 눈꼬리. 뭐가 그리 우스운지 눈물마저 맺힌 눈. 잠시였지만 카를과의 평범한 미래를 상상해 봤던 순간.
‘이렇게 네가 살아 있는 걸 내 손으로 확인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걸.’
아니. 사실은 알 것 같았다. 알 것 같아서 오히려 무서웠다.
고작 살아 있어 주는 것. 고작 함께 거리를 걷는 것. 실없는 농담을 나누는, 고작 그런 소소한 시간. 그가 웃었을 때 새삼 느껴졌던 따뜻한 봄바람 같은 것. 문득 느꼈던 겨울이 비로소 갔다는 느낌.
카를은 자신에게 더 거창한 걸 바랐어야 했다. 안쓰러울 만큼 작은 것들이 아니라. 그녀가 충분히 느낄 그런 행복감이 아니라.
아우라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날 선 말을 뱉어 내고 그의 집무실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그리고 복도에서 우뚝 멈춰 섰을 때였다. 아우라는 뒤늦게 인정했다.
이혼 신청서와 신변 정리. 그런 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내가 살아남은 건 너와는 상관없다는 말. 그리고 그가 재혼을 할 만한 영애들을 추린 일은…… 달랐다.
카를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고, 그가 상처받길 바랐다. 동시에 자신이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사실은 그가 알아줬으면 했다.
애초에 아무 감정 없이 그를 대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을 뿐.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도.
두 사람 사이에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시간이 흐르고 흘렀지만 아우라의 책은 단 한 장도 넘어가지 않았다. 카를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리엘이 뛰어노는 연못만 보았다. 연못의 윤슬이 제멋대로 반짝였다.
그 고요함을 깨고 아우라가 속삭이듯 말했다.
“버렸어야 했는데.”
카를이 그녀를 보았다. 흘러내린 머리카락 때문에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머리카락이나 단추나 꽃이나…… 버렸어야 했는데 잘 안됐어.”
“…….”
“……불쌍해서.”
카를이 말없이 그녀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아우라의 손끝이 책장을 쓸었다.
“네가 북쪽 탑을 없애려 했던 일로 보냈던 꽃바구니, 내가 창밖으로 다 내던져 버렸어. 그렇게 다 내던지고 돌아서려는데 바닥에 한 송이가 남아 있었어. 주워서…… 버리려고 했는데.”
하아……. 아우라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못 버렸어. 갑자기 그 꽃이 너무 불쌍해 보여서.”
“…….”
“머리카락도, 단추도 마찬가지야.”
카를과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은 그랬다. 쳐다보기만 해도 미워서 너무나도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그러려고 하면 연민이 생겼다. 그래서 결국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 놓게 되었다. 마치 보물이나 되는 것처럼.
카를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버리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