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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98)화 (98/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98화

카를이 술잔에 술을 따랐다.

아우라가 본궁에 돌아온 후 식사에 곁들이는 와인을 제외하면 술을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제 죽음을 덤덤하게 준비하는 아우라의 태도. 그럼에도 카를의 감정은 고려하지 않는 냉담. 거기다 이혼 신청서까지.

그 모든 건 기꺼이 견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주고 간 마지막 서류가 그를 한계에 다다르게 했다.

남은 건 참혹하게 찢겨 흩어진 서류뿐.

“……하.”

저절로 상상이 됐다. 머릿속에서 영애들을 한 명씩 한 명씩 카를의 옆에 세워 보는 아우라. 적당한 영애가 나타나면 그 신상을 적는 아우라. 그 수많은 여자가 지나간 후 혼자 남은 카를을 머릿속에서 지우는 아우라.

어째서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지.

충격이 커서일까. 사실 무슨 말을 하며 아우라를 보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을 밀치던 손길과 날 선 한마디는 똑똑히 기억났다.

‘이기적인 자식.’

‘이젠 날 더 경멸할 일만 남았겠군.’

똑똑.

문이 열리고 테오가 들어왔다.

“폐하. 엇, 술을 또…….”

테오가 얼른 다가왔다.

“술은 당분간 안 드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카를은 대답이 없었다.

테오는 한 소리 더 하려다가 갈가리 찢긴 종이를 보고 그만두었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테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래도 어쨌거나 그는 제 일을 해야 했다. 그는 카를의 책상에 위에 있는 서류 더미를 가리켰다.

“아까 황후 폐하를 뵈었습니다. 이 서류 건은 제게 맡기셨으니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테오가 서류를 가져가려던 순간이었다.

“손대지 마.”

“……예?”

“황후가 다시 가져갈 거야. 그러니 그대로 둬.”

“하지만…….”

카를이 테오를 쓱 보았다.

“황후가 다시 가져갈 거라고 했잖아.”

“……예, 폐하.”

테오는 하는 수 없이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카를은 술잔을 채우고 바로 입에 털어 넣었다. 역시, 취기는 올라오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이마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

다음 날 아침, 아우라는 식당에 나타나지 않았다.

카를은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그녀의 뜻을 이해했다. 아우라는 전날 밤 카를의 서재를 뒤지지 않았다. 그러니 함께 식사를 할 이유도 없다는 철저한 계산이었다.

카를은 그렇게 며칠을 한참을 혼자 기다리다가 식당을 나가 버리곤 했다.

아우라가 다시 식당에 나타난 건 그로부터 사흘 후였다.

그녀는 카를을 보고 내심 놀랐다. 이센이 죽었을 때처럼 그의 안색이 무척 좋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를 맞이했다.

침묵 속에서 식사가 시작됐다. 두 사람은 내내 아무 말이 없었다. 식사가 마무리될 즈음, 아우라가 말했다.

“오늘로 내 집무실 문을 닫을 거야. 혹시 시킬 일이 있으면 지금 말해.”

달칵.

카를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와인 잔을 단번에 비웠다.

그만 좀 마셔. 아우라는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했다. 그의 앞에 놓인 와인병은 이제 텅 비어 있었다.

“그래.”

카를이 담담히 말했다. 아우라는 슬쩍 일어났다.

“이만 가 볼게. 마저 식사해.”

“나도 다 먹었어.”

그렇다기엔 카를은 제 접시에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 아우라는 그 접시를 애써 외면하며 식당을 나섰다.

아우라가 복도를 걷자 카를도 한 걸음 떨어져서 그녀를 따라 걸었다. 아우라가 슬쩍 뒤를 돌았다. 데려다주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느냐는 표정으로.

카를이 픽 웃으며 말했다.

“회의 가는 길이야. 가는 방향이 같은 걸 어쩔 순 없잖아.”

그렇게 말하면 아우라도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저토록 피곤한 얼굴로 말하면 더더욱.

그렇게 두 사람이 살짝 떨어진 채 복도를 걷고 있을 때였다.

다다닷!

누군가 달려오는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발소리에 아우라가 아차 싶었다.

“황후 폐하!”

복도 모퉁이를 돌아 리엘이 달려왔다. 리엘은 대뜸 아우라에게 안겼다.

“리엘.”

“이러는 게 어디 있어! 갑자기 그렇게 가 버리는 게 어디 있냐고!”

리엘이 아우라를 안은 채 발을 동동 굴렀다. 아우라는 낭패 어린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리엘에게 말했다.

“미안해. 급하게 본궁으로 오느라 이궁에 기별을 못 넣었어.”

“너무해! 갑자기 사라져서 놀랐단 말이야! 너무해애-”

리엘은 아우라를 붙잡고 좌우로 흔들었다. 아우라는 흔드는 대로 흔들리다가 크게 휘청였다.

“아!”

카를이 순간 그녀를 붙잡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카를은 당황해서 눈이 동그래진 아우라에게 실없이 말했다.

“언제부터 애들한테 그렇게 약했어?”

“시끄러워.”

아우라는 그를 흘겨보고는 자리에 앉아 리엘과 눈을 마주했다.

“리엘, 잘 들어.”

짐짓 엄해진 분위기에 리엘이 입을 꾹 다물었다.

“난 이제 몸이 다 건강해져서 본궁으로 돌아간 거야.”

“……정말?”

건강해졌다는 말에 리엘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지만 이내 실망감을 숨기지 못했다.

“그럼 이제 이궁에는 안 와? 난 이궁에 있을 때가 좋았는데…….”

“리엘 너도 언제까지 이궁에 있을 순 없잖아. 지금은 별궁으로 돌아갔지?”

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제는 계속 이궁에 있을 거라고 했어.”

아우라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본궁 꼭대기 층보다는 이궁이 있기 좋을 테니.

“그래. 아무튼 별궁에서 씩씩하게 지내야 해. 내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 본궁으로 오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리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우라는 웃으며 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자, 삼촌에게도 인사하고. 아무리 급해도 인사를 빼먹으면 안 되지.”

“응……. 안녕하세요, 삼촌.”

리엘은 치맛자락을 붙잡고 예를 표했다. 카를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럼 리엘, 그만 돌아가서…….”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그럼 놀러 가! 우리 이별 기념으로.”

“……어?”

“피크닉 가자. 예전에 이센 삼촌이랑은 갔잖아. 응?”

이센 이야기에 아우라의 마음이 덜컹했다.

‘그래, 이 아이에게 이센은 그냥 이유 모르게 죽은 삼촌일 뿐일 테지.’

아우라는 문득 예전에 이센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그나저나 리엘 그 녀석이 어떻게 알았는지 피크닉에 따라오겠다고 어찌나 떼를 쓰던지요. 떼어 놓고 오느라 힘들었습니다.’

리엘에게 그 피크닉은 꽤 부러운 기억으로 남은 듯했다. 아우라에겐 핀의 정보를 두고 벌이는 전쟁터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아우라는 이센이 리엘을 각별하게 여겼던 걸 떠올렸다. 리엘이 아우라를 부쩍 찾기 시작한 것도 이센이 죽은 후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 꼬맹이가 얼마나 외로웠으면 싶었다.

“그래, 가자. 그때처럼 샌드위치와 주스를 가지고.”

“정말? 내일, 내일 가도 돼?”

“내일? 안 될 것 없지. 그러자.”

“그럼…….”

리엘이 슬쩍 카를을 올려다보았다.

“삼촌도 가요.”

정적이 흘렀다. 웃고 있던 아우라의 입꼬리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카를은 눈만 깜빡이다가 자신을 가리켰다.

“……나도?”

카를도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아우라는 그가 따라갈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피크닉에 갈 만큼 한가하지도 않을뿐더러 자신에 대한 마음이 좋을 리도 없으니.

아우라가 애써 웃으며 리엘에게 말했다.

“좋은 생각이긴 한데 삼촌은 바빠. 내가 데려갈 만한 사람을-”

“아니. 전혀 안 바빠.”

카를이 아우라의 말을 끊었다. 아우라가 눈을 크게 뜨고 카를을 올려다보았다. 진심이야? 그렇게 물어보듯이.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 진심이야. 그렇게 대답하듯이.

아우라가 리엘을 의식한 듯 그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업무가 많으실 텐데요.”

“그렇다 한들 조카의 피크닉에 한 번을 못 어울려 줄 수야 있겠소.”

“정말이에요?”

리엘이 양 주먹을 꽉 쥐고 물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피크닉에 동참해 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당연히 정말이지.”

카를의 선선한 대답에 리엘의 볼이 기쁨에 발갛게 물들었다. 이궁 생활을 접어야 한다는 서운함은 벌써 사라지고 없는 듯했다.

“기대되는구나. 내일 피크닉.”

카를이 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다정한 광경을 보며 아우라는 다짐했다. 리엘만 가면 한 소리 해야겠다고.

그러나 카를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럼 난 회의가 있어서 이만 가야겠어.”

그는 유유히 자리를 떠나 버렸다. 아우라는 황당하다는 듯 그의 뒷모습을 볼 뿐이었다.

***

늦은 밤, 모든 일정을 소화한 카를이 측근들과 집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내일 시간을 내기 위해 카를은 오늘 상당히 무리했다. 그 덕에 조쉬와 테오 역시 일에 찌든 상태였다.

“조쉬.”

“네, 폐하.”

“이궁에 있는 엘리제는?”

“황후 폐하께서 본궁으로 복귀하신 걸 아쉽게 생각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래도 이궁에 있게 해 주신 폐하께 감사를 표했습니다.”

카를이 생각하기에도 이궁은 엘리제에게 퍽 괜찮은 공간이었다. 특히 바람과 볕을 쐴 수 있다는 점에서.

“보안 철저히 하고, 엘리제는 네가 잘 챙기도록 해.”

“예, 폐하.”

조쉬의 얼굴이 슬쩍 붉어졌다. 테오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조쉬는 쓸데없는 소리 말라는 듯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테오는 어깨를 으쓱하며 딴청을 피웠다.

어느새 세 사람은 황제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테오가 카를에게 말했다.

“업무가 조금 남으셨지요?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야. 혼자 하는 게 편해. 그만 들어가.”

테오가 큼, 하고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폐하, 술은…….”

“네가 다 치워 놨잖아. 잔소리 그만하고 가.”

“하하……. 예,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편안한 밤 보내십시오, 폐하.”

조쉬와 테오가 꾸벅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카를은 집무실 문고리를 잡으려다가 멈칫했다.

‘오늘은 와 있으려나. 아침 일을 생각하면 왔을 것 같긴 한데.’

카를이 문고리를 잡는 대신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똑똑.

“……하.”

헛웃음이 나왔다. 제 집무실에 들어가는데 노크를 하는 황제라. 이런 미련한 자가 있나 싶었다.

안에선 아무 반응도 없었다.

‘없나 보군.’

카를이 내심 실망하며 집무실 문을 열었다.

“!”

그는 놀라서 굳어 버렸다. 어둠 속에서 아우라가 책상에 기대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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