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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97)화 (97/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97화

아우라는 서류를 한 부 한 부 보며 그 내용을 설명했다. 서류의 내용은 간명했고, 웬만한 일은 마쳐 놓아 카를로선 그저 알기만 하면 되는 것들이었다.

카를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업무를 이 정도까지 진행해 놓기 위해 어제는 밤을 거의 새웠으리라.

탁.

아우라는 설명을 끝낸 서류 한 부를 접어 옆으로 치웠다.

카를은 아우라가 지금 뭘 하려는 건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제 신변을 정리하려 하고 있었다. 최대한 깔끔하게.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설명을 마친 서류가 수북하게 쌓였다. 마지막 서류를 한 부 남겨 놨을 때였다.

“일단 내가 맡았던 일은 여기까지야.”

긴 설명을 마무리하며 아우라가 말했다. 이해했느냐는 그 눈빛에 카를이 웃었다.

“어쩌지? 네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데.”

“뭐?”

카를은 쌓인 서류를 다시 아우라 앞으로 밀었다.

“다시 설명해 봐. 전혀 모르겠으니까.”

못 알아들었을 리가 없다. 아우라가 맡기 전에는 카를이 하던 일이기도 했으니. 아우라는 그런 카를을 빤히 보다가 서류를 열었다.

“그래, 처음부터 보자. 일단 겨울이 되면 귀족 부인들에게 선물할 모피 건부터…….”

그녀가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카를은 턱을 괴고 그런 그녀를 가만히 보기만 했다. 내용 따위엔 애초에 관심도 없다는 듯.

가까이에서 빛나는 가느다란 머리카락과 뺨의 솜털, 낮게 뜬 눈의 속눈썹, 규칙적으로 달싹이는 입술. 그런 것들이 카를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렇게 노골적인 시선을 아우라는 끝까지 모른 척했다.

마지막 한 부의 서류를 남겨 뒀을 때, 아우라가 다시 물었다.

“이제 좀 알겠어?”

“아니.”

“…….”

“모르겠어. 하나도.”

카를이 다시 서류 더미를 아우라의 앞으로 밀었다. 아우라는 울컥한 듯 뭔가를 말하려다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면으로 전달해 줄까?”

“아니. 직접 들어야겠어.”

“……그래. 설명해 줄게. 알아들을 때까지.”

아우라가 또다시 서류를 펼쳤다. 미간을 살짝 좁힌 채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나는 데블라에 있었을 때.”

“……?”

아우라가 시선을 들어 카를을 보았다. 카를은 참 알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죽고 싶지 않았어.”

“…….”

“너를 살려야 한다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죽는 건 두려웠어. 사람이니까. 그게 당연하잖아.”

“…….”

“그런데 넌 어째서 두려워하지 않아? 어떻게 이렇게 무감하게 굴 수 있어?”

그건 카를의 순수한 궁금증이기도 했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아우라의 표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언젠가 이런 질문을 받을 줄 알았다는 듯이.

“카를, 나는 정말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어.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알아. 잘 알고 있지.”

“네가 없던 3년간 북쪽 탑에서 죽지 않았던 건…… 너를 기다려서가 아니었어. 네가 날 구해 줄 거라고 믿어서도 아니고.”

“…….”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내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내가 태어나던 순간부터 왕가와 국민이 내게 쏟은 경애와 존경 덕분이었지. 내가 살아남은 건…… 너와는 상관없어.”

카를의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렸다. 아우라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이젠 내가 그들의 고통을 덜어 줄 차례야. 두렵지도 아쉽지도 아깝지도 않아.”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너 없이 홀로 남게 되는 건?”

“…….”

“그것도 두렵지도 아쉽지도 아깝지도 않아?”

“국민이야 잠시 슬퍼하고 혼란스러워하겠지만, 이게 맞는 길이야. 그들도 이해할 테고.”

“나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있어?”

“…….”

“나는 죽을 때까지 슬퍼하고 혼란스러워할 거야. 죽을 때까지 널 이해하지 못할 테고.”

아우라는 서류로 시선을 떨궜다.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별수 있어? 나약한 것까지 내가 어떻게 해 줄 순 없잖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카를은 똑똑히 기억해 냈다. 대관식 직전에 춤 연습을 했을 때였다. 아우라는 그때 그에게 자신이 탑에서 죽었으면 어땠을 것 같냐고 물었다.

방금 아우라가 한 말은 그때 카를이 그녀에게 했던 대답이었다.

차라리 기억하지 못했다면 나았으련만. 카를은 할 말을 잃었다.

아우라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 더미에 손을 얹었다.

“이건 테오에게 맡겨야 할 것 같아. 내가 따로 테오에게 설명할 테니 너는 신경 쓰지 마. 그리고…….”

그녀의 손이 아까부터 따로 빠져 있던 마지막 서류에 닿았다. 잠시 멈칫하던 그녀가 덤덤히 그것을 카를에게 내밀었다.

“네가 새롭게 부인으로 맞을 수 있을 만한 영애들의 목록이야.”

카를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우라는 그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비밀리에 작성했으니 이야기가 퍼질 걱정은 안 해도 돼. 엘리제는 뺐고, 황실에 힘이 될 만한 고위 귀족가의 여식 중에서 성품이 얌전하고 뒷말이 안 도는 사람들로 추렸어.”

“아우라.”

“후사를 낳아야 할 테니 나이 역시 신경 썼고.”

“아우라. 그만해.”

“아니. 여기까지가 내가 마무리해야 할 일이야. 황후의 자리가 비는 시간을 최대한 줄여야지. 갑자기 내가 사라지면 황실이 우왕좌왕할 테니.”

“젠장, 너 정말!”

카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우라가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카를은 화를 꾹 삼키며 그녀의 손에서 서류를 가져왔다. 그리고 펼쳐 보지도 않은 채 내던지듯 책상에 올려 두었다.

카를이 낮게 물었다.

“진심이야? 이렇게까지 해야 네 마음이 편하겠어?”

“어쨌건 카사인들도 내 국민이야. 피해를 주고 싶진 않아.”

카를은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그 ‘피해’의 범위에 카를의 마음 같은 건 포함되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그는 서류를 집더니 보란 듯 그대로 북북 찢어 버렸다. 기름칠을 한 두꺼운 표지까지 그의 손아귀에서 단번에 찢겨 버렸다.

“황후 폐하께서 바쁘신 와중에 헛고생을 하셨네. 이딴 건 정말 필요 없는데.”

“아니. 필요할 거야.”

“네가 없으면 나도 황제건 뭐건 때려치울 거야.”

“뭐?”

아우라가 놀라 그를 보았다.

“난 천출에다가 어린애 같은 놈이니까. 나는 너처럼 고귀한 긍지를 갖고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거든.”

카를이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네가 없으면 이 자리도 필요 없어. 지켜야 할 것도, 소중한 것도 없으니까.” 

그녀의 눈이 순간 흔들렸다. 잡힌 손을 빼내려 했지만 카를이 놓아주지 않았다.

아우라가 그를 비웃었다.

“거짓말하지 마. 설마하니 카를 황제께서 권력을 포기하시겠다고?”

“권력? 그래. 권력은 중요하지. 하지만 그것도 소중한 게 있을 때나 필요한 것 아니겠어?”

“그럼 국민은? 형제들을 다 죽여 놓고 이제 와서 네가 자리를 비우면 대체 누가-”

“상관없어. 말했잖아.” 

카를이 그녀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이 말했다.

“난 천출이라 너 같은 긍지는 없다고. 그래…… 어쩌면 이 자리에 어울리는 건 내가 아니라 너일지도 모르겠네.”

카를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차라리 황좌에 앉을래? 그동안 난 다른 나라의 트루 블러드를 납치라도 해 올까? 죄를 지은 인간, 아니면 늙어 죽어 가는 인간…… 그 정도 인간이면 너도 죄책감이 덜하지 않겠어?”

아우라는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미친 소리 하지 마.”

“어차피 내가 했던 모든 일이 다 미친 짓이었고, 무리였어. 데블라에 간 것도, 가짜 핀을 만든 것도, 수트라에서 널 데려온 것도, 이궁에서 널 빼 온 것도. 그렇게 맞지도 않는 퍼즐을 억지로 애를 써 가며 꾸역꾸역 끼워 맞춰 왔으니 네가…….”

카를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가 뱉어 내듯 말했다.

“그러니까 네가 상처받았겠지.”

상처라는 말에 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에게 그런 단어조차 듣기 싫다는 듯.

그녀가 차갑게 물었다.

“그러게 그런 짓을 왜 했어? 네 사랑이 그렇게 대단해?”

“행복했거든.”

“……뭐?”

“널 살리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어찌나 다행이던지.”

그가 아우라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땀이 밴 손이 서서히 내려와 아우라의 눈을 가렸다. 아우라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손끝이 아우라의 관자놀이를 짚었다. 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렇게 네가 살아 있는 걸 내 손으로 확인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걸.”

“…….”

“그래서 못 그만뒀어. 우리가 이 지경이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카를은 생각했다. 자신이 계속 그녀의 몸을 탐하려 들었던 것도 이 행복감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그거야말로 그녀가 살아 있음을 가장 확실하고 강렬하게 증명받을 방법이니.

아우라가 카를의 손을 잡아 제 눈에서 떼어 냈다. 그녀는 단단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네 한 몸의 행복? 그걸 위해 가짜 핀을 만들어 날 속였다고?”

“……맞아.”

“이기적인 자식.”

아우라는 있는 힘껏 그의 어깨를 밀었다. 카를은 힘없이 밀려났다.

아우라가 쏘아붙였다.

“핀을 찾으면 바로 이혼이야. 그 이후의 일은 내 알 바가 아니지. 네가 황제 자리를 버리건 말건.”

그녀는 서류를 가리켰다.

“이건 테오에게 넘겨. 내가 테오에게 따로 설명하겠어. 넌 이제 신경 쓰지 마.”

아우라는 그대로 집무실을 나가 버렸다.

쾅!

힘껏 문을 닫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아우라는 성큼성큼 복도를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녀가 우뚝 멈춰 서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카를의 집무실 문이 보였다.

아우라는 뭔가를 원망하기라도 하듯 얼굴을 찡그렸다.

“아니야…… 아니야…….”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도망치듯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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