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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96)화 (96/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96화

아우라는 느지막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간만에 돌아온 황후의 방에 햇빛이 흐드러지게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창밖의 햇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방에 돌아오니 현실감이 들이닥쳤다. 이제 다시 핀을 찾기 시작해야 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그것은 정말이지 화가 나고 허무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제 카를의 서재를 한 번 뒤집어 놓은 덕분이었을까. 묘하게 마음이 가벼워졌다.

아우라는 이제 핀을 찾는 일 외엔 모든 걸 그만둘 작정이었다. 황후로서의 일도, 카를과의 감정싸움도.

이혼을 결심한 건 단순히 카를을 상처 주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녀는 죽기 전에 자신의 신변을 정리하고 싶었다. 이혼은 그 첫 번째 순서였다.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카를과의 엉킨 감정도 요령껏 밀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똑똑.

노크 소리가 울리곤 미나가 들어왔다.

“폐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그래, 미나.”

아우라가 싱긋 미소를 지어 주었다. 미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하, 황제 폐하께서 아침 식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떻게 할까요?”

“아.”

‘그러고 보니 아침 식사를 같이하자고 했지.’

누가 보면 속 좋다고 할 수도 있었다. 자신을 속인 남자와 마주 앉아 밥을 먹다니.

그러나 이 역시 신변 정리의 과정이라면 아우라는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어린애가 아니었다. 보기 싫다는 이유로 그를 피해 다닐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부부였고, 그녀의 신변 정리에 카를이 해 줘야 할 역할이 있었다.

“미나, 내가 어제 부탁했던 서류는?”

“아, 예. 가져오긴 했습니다만…… 대체 이걸 왜…….”

미나는 들고 있던 서류를 내밀었다. 묻고 싶은 게 참 많은 얼굴이었다. 아우라는 말없이 서류를 받았다. 그녀는 서류 봉투를 열어 안의 내용물을 살폈다.

“고마워. 제대로 가져왔네.”

“폐하…….”

“미나, 황제 폐하의 방으로 말을 전해. 곧 식당에서 뵙자고.”

***

달각, 달각…….

식당엔 두 사람의 식기 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아우라의 늦잠 때문에 식사가 늦어졌지만 카를은 별다른 불만은 없는 듯했다.

“카를.”

아우라의 부름에 카를이 고개를 들고 그녀를 보았다. 어젯밤의 분노는 오간 데 없이 그녀는 눈에 띄게 차분해져 있었다.

“나, 안센나에 다녀와야겠어.”

고기를 썰던 카를의 눈에 순간 예민함이 어렸다. 그러나 이내 다시 나이프질을 이어 갔다.

“안센나에는 왜?”

“요즘 제니아인들을 살피지 못해서. 현재 상태를 좀 파악해야 할 것 같아.”

그는 나이프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접시의 고기는 거의 난도질이 되어 있었다. 카를이 말했다.

“그러기 전에 제니아인들에 대해 먼저 상의할 문제가 있어.”

“뭔데?”

“제니아인 구역을 안센나에서 밀론으로 옮겨 볼까 해.”

밀론은 수도 변두리의 빈 지역이었다. 본래는 군사 구역이었지만 성벽의 위치를 옮기며 마을도 비게 된 것이었다.

아우라가 놀라서 물었다.

“갑자기 제니아인들을 밀론으로 이주시킨다고?”

“그래. 지원금을 충분히 주고 카사인들과 어울려 살 수 있도록 하려고. 안센나는 너무 외지잖아.”

장단점이 명확한 제안이었다.

장점으로는 제니아인들의 삶이 나아질 거였다. 수도의 인프라는 안센나에 비할 바가 아니니까. 덜 가난해질 것이고, 더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단점으로는 제니아인들이 흩어질 거라는 점이었다. 본디 사람이란 삶이 나아지면 더 좋은 곳으로 떠나기 마련이니. 또 제니아인들과 카사인들의 갈등도 잦아질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아우라가 선선히 대답했다.

“그래. 그렇게 해.”

“괜찮겠어? 제니아인들에 대한 네 통제력도 약해질 텐데.”

“난 국민을 통제할 마음이 없어. 지키고 싶은 거지. 그들이 자립할 힘을 키우는 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고.”

아우라가 물 잔을 물끄러미 보았다. 식당의 풍경이 우습게 일그러져 있었다.

“또 흩어지는 건 무섭지 않아. 핀이 깨지면 제니아인들은 마법사들을 중심으로 자연히 다시 모일 거야.”

그것은 제니아인들이 수백 년간 지켜 온 삶의 방식이었다. 고작 몇 년 만에 마법을 경배하는 전통을 잊을 리 없었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었다.

‘두 민족 간에 갈등이 생기면 카사인들의 불만은 카를을 향할 텐데.’

그러나 아우라는 그 우려를 지웠다. 그녀에겐 그의 상황을 살필 이유가 없었다.

“제니아인 이주는 바로 시작할 거야. 밀론의 일은 수도 행정관들의 보고를 받아서 살필 수 있어. 네가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돼.”

“그럼 안센나로 가지 말라는 소리야? 밀론으로도?”

“그래. 제니아인들에 대한 처우는 공식적으로 수도 행정관들의 일이 되는 거니까. 황후가 불쑥불쑥 나타나는 것보다는 그편이 절차에 맞지.”

제니아인들을 이주시키면 카사인들의 반발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우라가 직접 제니아인들을 살피는 건 그림이 좋지 않았다.

아우라는 그의 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또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카를 몰래 제니아인들을 살필 자신이 있었다.

“그래. 행정적 절차. 중요하지.”

아우라는 그렇게 말하며 가지고 온 서류를 카를에게 내밀었다.

“이 절차도 마찬가지고.”

“이게 뭔데?”

“이혼 신청서.”

카를은 순간 할 말을 잃은 듯했으나 일단은 받아 들었다. 내용을 보니 확실한 공문서였다. 아우라의 서명은 이미 되어 있었고 카를의 서명만 남아 있었다.

“……성실하기도 하지. 언제 이런 걸 준비했지?”

기가 막힌다는 그 얼굴에 대고 아우라가 말했다.

“언제 핀을 찾을지 모르잖아. 준비해 둬야 해.”

“핀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하는 모양이네.”

“음…… 노력해야지.”

“……뭐?”

카를은 그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노력이라니. 제 목숨을 두고 어떻게 저런 무신경한 단어를 쓸 수 있는 건지. 그리고 그 무신경함은 카를의 속을 날카롭게 긁고 지나갔다.

하지만 카를은 그녀에게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그녀를 이궁에서 끄집어낸 것도 그였고, 핀을 찾으라고 한 것도 그였다. 그 핀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는 그녀를 비난할 명분은 없었다.

그는 베스트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서명을 했다. 서류를 다시 내밀자 아우라가 받았다. 그러나 카를은 서류를 놓지 않았다. 아우라가 뭐 하느냐는 듯 카를을 빤히 보았다.

카를이 말했다.

“알아 뒀으면 해서.”

“…….”

“내가 평생 한 서명 중에 가장 최악의 서명이라는 걸.”

그녀는 말없이 서류를 당겼다. 카를은 그제야 서류를 놓았다.

“그리고 카를, 괜찮으면 내일 오후에 시간을 좀 내줘.”

오늘의 아우라는 그가 예상치 못한 말만 골라서 하고 있었다. 이혼 신청서에 서명을 받아 가더니 이번엔 시간을 내 달라니.

“시간은 왜?”

“다른 건 아니고 일 때문이야. 내가 네 집무실로 갈게.”

카를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그럼. 편할 때 와.”

“좋아. 그럼 난 먼저 가 볼게.”

아우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를이 자연스레 따라 일어났다.

“데려다줄게.”

“카를.”

“?”

“열쇠의 대가는 아침 식사만이었잖아. 데려다주게 둔다곤 하지 않았어.”

아우라는 그렇게 말하며 난감하다는 듯한 미소마저 지어 보였다. 그 미소의 의미는 자명했다. 애정이건 미움이건 이렇다 할 모든 감정이 거둬진 자리. 그 자리를 차지한 사무적인 예의였다.

“그래. 가 봐.”

카를이 말했다. 그러자 아우라는 유감없이 돌아서 식당을 나섰다.

“…….”

카를은 닫힌 식당의 문을 부술 듯 바라보았다. 그는 잔에 담긴 와인을 벌컥벌컥 마셨다. 속에서 자꾸만 뭔가가 울컥울컥 올라오는 것 같았다.

이혼 신청서를 내밀고 받아 가던 그녀의 표정. 그건 마치 더는 쓰지 않을 물건을 처분하듯 무감했다. 그녀가 분노를 쏟아 낼 때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그 분노의 불씨가 꺼지면 이런 냉담함이 이어지리라는 것을.

그러나 이건,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아팠다.

***

다음 날 오후, 아우라는 카를의 집무실을 찾았다. 그녀의 뒤로 미나가 한 더미의 서류를 들고 따라 들어왔다.

카를이 물었다.

“그게 다 뭐야?”

“너와 상의할 것들. 테오, 서류를 폐하의 책상으로 옮겨 줄래요?”

“아……! 네, 폐하.”

테오가 얼른 미나에게 서류들을 받아 책상으로 옮겼다. 카를이 서류를 대충 살폈다. 모두 아우라가 맡았던 일거리들이었다.

아우라가 테오에게 말했다.

“자리를 좀 비켜 줄 수 있을까요?”

“그럼요, 폐하. 어…… 차라도 들일까요?”

“카를, 차가 필요해?”

“난 됐어.”

“나도 차는 괜찮아요, 테오.”

“아, 네.”

테오가 눈치를 보며 물러났다. 언뜻 보면 평화로워 보였으나 황제 부부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기 때문이다.

미나와 테오가 나간 후, 카를이 서류에 손을 턱 얹었다.

“그래. 이걸 가져온 이유는?”

“그게…… 내가 이제 황후 업무를 하지 않을 생각이야.”

“…….”

“핀을 찾는 데에 집중하고 싶어서. 그래서 미안하지만 이 일거리들은 네가 가져가야 할 것 같아.”

카를은 아무 말도 없이 아우라를 바라만 보았다. 아우라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갑작스러울 테지만 당분간은 네가 신경 쓰지 않을 수 있게 정리해 놓긴 했어. 다만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너도 알아야 하니까. 내 손을 타지 않으면 결국 네가 총책임자가 되는 거잖아.”

“…….”

“……어렵지 않아. 문제가 되지 않도록 내가 충분히 설명해 줄게.”

“하하.”

카를이 대뜸 성마른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손끝으로 서류를 툭툭 두드렸다.

“이걸 하려고 시간을 내 달라고 한 거군.”

“……직접 듣기 불편하면 서면으로 작성해서 줄게.”

“아니야.”

카를이 일어나더니 나무 의자를 하나 가져와 제 책상 옆에 두었다.

“앉아.”

그가 의자를 툭툭 쳤다.

“어디 들어나 보자. 네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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