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95화
아우라는 멈칫했지만 이내 입술을 열어 주었다.
카를의 혀가 아우라의 입안을 맴돌았다. 그는 오랫동안 닿지 못했던 그곳을 곳곳이 파고들어 훑었다. 자신에게 이혼을 말했던 날씬한 혀까지도.
‘이혼.’
카를은 그 단어를 되뇌었다. 자신이 받치고 있는 머리에서 나온 발칙한 말을.
역시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혀가 그녀의 혀를 강하게 감았다.
“읏.”
카를은 집요하게 그녀의 혀를 괴롭혔다. 이로 살짝 물었다가 놓아주는 듯하더니 다시 물었다. 아우라는 그의 팔을 꽉 잡으며 버텼다. 자존심인지 오기인지 그녀조차도 모를 마음으로.
입맞춤이 끝났다. 아우라는 얼얼한 입술을 손등으로 닦고는 말했다.
“조건을 하나 더 붙여야겠어.”
“또?”
“너와 이런 짓도 더는 안 해. 합궁도 없을 거야.”
카를은 피식 웃을 뿐 이렇다 할 대답은 하지 않았다. 서서히 여유를 잃어 가는 듯한 그 모습이 아우라는 싫지 않았다.
“그럼 승낙한 걸로 알고 있겠어.”
“……그러도록 해.”
카를은 그녀를 반쯤은 쏘아보았다. 그리고 반쯤은 사랑스럽다는 듯 보았다.
“그리고 난 지금부터 핀을 찾아볼까 하는데.”
“지금부터? 어딜 뒤지게?”
이미 다 늦은 밤이었다. 갑자기 어디서 핀을 찾겠다는 건가. 또 그걸 굳이 카를에게 말하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네 협조가 필요해, 카를.”
“…….”
“나는 네 방부터 뒤져 봐야겠으니까.”
***
카를과 아우라는 황제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이미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인지라 푸른 달빛만이 집무실을 채웠다.
아우라는 집무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원목 가구에 수많은 서류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즉위한 직후엔 이렇지 않았다. 타샤의 일로 왈가왈부했을 때, 그때만 해도 이곳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우라는 카를을 슬쩍 보았다. 이제는 익숙해진 멀끔한 차림. 전사의 뜨거움보다는 지도자의 냉철함이 스민 얼굴. 그는 이제 그럴듯한 황제였다.
“뒤져 봐. 마음껏.”
카를이 말했다. 그러자 아우라가 그의 개인 서재를 가리켰다. 아우라가 그에게 출입을 금지당한 그곳. 그녀는 그곳부터 손댈 생각이었다.
“저길 열어 줘.”
“……원한다면.”
카를이 서랍에서 열쇠를 꺼내 서재의 문을 열었다. 그는 들어가라는 듯 길을 비켜 주기까지 했다.
아우라는 서재로 들어섰다. 몰래 들어왔을 때는 몰랐는데 서재는 밖에서 보기보다 훨씬 크고 깊었다.
“아우라. 아무리 바보라도 이미 한 번 뒤졌던 곳에 또 그런 물건을 숨기지는-”
와르르-
아우라가 책장의 물건을 모두 바닥으로 쓸어 버렸다. 그리고 몸을 살짝 뒤로 돌려 카를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못 들었어.”
카를은 순간 할 말을 잃은 듯했다. 그러나 곧 팔짱을 끼곤 벽에 몸을 툭 기댔다.
“아니야.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리고 어디 계속해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아우라는 기꺼이 다시 시작했다. 책장과 책상, 협탁의 물건들을 모조리 바닥으로 밀어 버렸다. 뭔가를 찾는다기보다는 부수는 사람 같았다.
그건 두말할 것 없이 화풀이였다. 카를이 그녀를 속인 시간에 대한 화풀이.
바닥에 온갖 물건들이 쌓여 갔다. 아우라는 구둣발로 그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밟았다.
카를은 자신의 서재가 폐허처럼 변하는 걸 지켜만 보았다. 그 폐허가 마치 아우라의 마음 같았다. 정확히는 카를 자신이 헤집어 놓은 마음. 그래서 그는 전혀 억울하지 않았다. 받아야 할 벌을 받는 셈이니.
다만 그는 궁금했다. 이 벌이 다 지나면 무엇이 있을지. 더 큰 벌이 있을 수도 있고, 용서가 있을 수도 있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무관심이 있을 거였다.
‘그걸 짐작하게 한다면 아우라가 아니지.’
아우라는 홀린 듯 책장의 책을 바닥으로 쓸어 버렸다. 카를은 책을 잡는 야무진 손끝을 물끄러미 보았다. 희고 가는 팔뚝과 푸른 달빛을 받고 있는 어깨도.
얼마나 지났을까. 아우라의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오랜 시간 움직이지 않던 몸에 무리가 온 듯했다.
“후우…….”
아우라는 책 더미를 구둣발로 밟은 채 잠시 숨을 골랐다. 그녀의 눈빛이 형형했다.
미친놈 같지만 카를은 그 모습이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온 힘을 다해 화풀이하는 모습이.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폭발시키는 모습이.
그래서 더 살게 해 주고 싶었다. 저런 여자가 죽는다는 건 말이 안 되니까.
가쁜 숨을 뱉어 내는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카를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천천히 움직였다. 팔짱을 낀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아우라가 다시 책장의 책을 움켜쥐었다. 그때 카를이 아우라의 팔을 잡았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
“……싫어.”
“힘들어서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주제에.”
“네가 무슨 상관이야.”
“쓰러져서 나한테 업혀 나가고 싶어?”
아우라도 그건 싫은 듯 입을 다물었다. 카를은 은근슬쩍 그녀를 서재 밖으로 이끌었다. 역시나 그녀는 힘이 다 빠진 채 집무실로 끌려 나왔다.
“잠깐 기다려.”
카를은 그렇게 말하고는 샛문을 열고 침실로 갔다. 잠시 후 그가 뭔가를 들고 돌아왔다.
그가 들고 온 건 팔찌였다. 그 팔찌는 꽤 두꺼웠고, 은은한 빛을 내는 작은 보석들이 둘러져 있었다.
카를이 아우라의 손목의 손수건을 풀었다. 드러난 손목에 실밥 자국이 선명했다. 상처는 다 아물었으나 흉터가 남아 버렸다.
“무겁지 않은 소재로 제작한 거야. 언제까지 손수건을 감아 둘 수는 없으니까.”
카를이 그녀의 손목에 팔찌를 채워 주었다. 그의 말대로 팔찌는 보기보다 가벼웠다. 팔을 움직여도 무리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아우라는 군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팔찌 따위 방에 돌아가 풀어 버리면 그만이니까.
“고마워. 할 일 끝났으니 이만 갈게.”
아우라가 뒤돌아 가려 했다. 그러나 카를이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아우라가 팔을 쭉 뻗은 채 그를 돌아봤다.
“놔.”
“할 말이 남아서.”
“해, 그럼.”
“내일 아침 식사 같이해.”
그녀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귀찮았다.
“그러든가.”
아우라가 그의 손을 놓으려 했다. 하지만 그래도 카를은 놓아주지 않았다.
“모레도, 그다음 날도 매일 같이해. 아침 식사.”
“그러고 싶진 않은데.”
매일 아침의 시작을 카를과 함께하고 싶진 않았다. 말만 들어도 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편 아우라는 이런 궁금증이 들었다. 차라리 밤을 같이 보내자고 하는 게 솔직하지 않나. 대체 이건 무슨 수작인 걸까.
“왜 하필 아침인데?”
“점심과 저녁은 일정이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피차 바쁘니까. 하지만 아침은 시간이 정해져 있어.”
“그럼 왜 식사인데?”
“너랑 평범한 걸 해 보고 싶어서.”
아우라는 문득 떠올렸다. 식당에서 오리고기를 먹던 그 평범한 순간을. 그때 자신이 느꼈던 행복을. 그 행복이 부서졌던 순간까지.
“……거절할래.”
“그럼 조건을 걸게.”
카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덧붙였다.
“나와 매일 아침 식사를 같이하면 이걸 줄 수 있어.”
카를이 아우라의 손을 폈다. 그리고 그 위에 서재의 열쇠를 올려 두었다.
“서재의 열쇠는 이거 하나야. 네가 원할 때마다 저곳에 들어갈 수 있어. 서재를 부수건, 다 불태우건 마음대로 해.”
이걸 아우라에게 주면 카를도 저곳으로 쉽게 들어갈 수 없었다. 들어가기조차 금지당했던 곳의 열쇠를 받다니. 아우라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 알아? 내가 정말 저 안에 핀을 뒀을지.”
카를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사실 아우라도 알았다. 그녀를 속이는 일만큼은 카를을 따라올 자가 없으니. 그런데도 확인은 하고 싶었다.
카를은 아우라의 그런 마음을 잘 안다는 듯 다시 물었다.
“어때?”
아우라가 열쇠를 가만히 쥐었다. 그리고 인사도 없이 방을 나가 버렸다.
“후우…….”
카를이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쉬었다. 손에는 그녀의 손을 잡았던 감각이 생생했다.
‘하나라도 더.’
하나라도 더 그녀와의 연결 고리를 만들고 싶었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식사라 하더라도. 매일 아침 이루어질 것이라는 약속이 필요했다.
그는 터덜터덜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잠이 왔다. 술도 두 잔밖에 마시지 않았는데. 거짓말 같았다.
카를은 문득 서재에서 봤던 아우라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폐허 속에 우뚝 선 여신 같았다. 모든 걸 부수러 강림한 여신.
달려들어 입을 맞추고 싶은 걸 참았다.
그 울분에 자신을 밀어 넣고 뒤섞이고 싶었다. 이제 날 더 미워할 준비가 되었냐고 묻고 싶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면 이렇게 대답해 주고 싶었다.
나 역시 기꺼이 받아 줄 준비가 되었다고.
***
테인 공작저의 뒤뜰. 그곳의 작은 철문이 열렸다.
끼이익-
평소 잘 열지 않는 철문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렸다. 로브를 뒤집어쓴 자가 어둠을 가르며 공작가로 들어섰다.
그는 사박사박 잔디를 밟았다. 로브 아래로 이 여름에 어울리지 않는 털신이 언뜻언뜻 드러났다.
공작저 건물의 뒷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그는 그 안으로 들어가 조심히 문을 닫았다. 그가 향하는 곳은 공작의 집무실이었다.
집무실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그는 그 원목 문을 툭 밀었다. 문이 스르르 열렸다. 집무실 책상 앞에 공작이 앉아 있었다. 불도 켜지 않은 채.
“오랜만이오, 테인 공작.”
로브를 쓴 이가 여유로운 투로 인사를 건넸다. 테인 공작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라이언 대공 전하.”
라이언은 그제야 로브를 벗었다.
“수도는 덥군. 피부가 다 상할 것 같아.”
그는 더러운 로브를 벗어 소파에 툭 올려놓았다. 그리고 멋대로 소파에 풀썩 앉았다.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얼마 전, 테인 공작은 무턱대고 실시아로 사람을 보내 라이언을 찾았다. 숨어 있던 라이언은 공작가의 사람을 알아보고 그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의 내용은 간명했다. 함께 황실을 치자는 것.
테인 공작이 술을 한 잔 따라 내주었다. 라이언은 그 술을 거절했다.
“술은 이야기가 다 끝난 다음에 먹도록 하지.”
테인 공작이 멈칫하더니 술잔을 거뒀다.
“절 믿지 못하시는군요.”
“한번 날 저버렸던 자를 내가 어떻게 쉽게 믿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카를이 즉위한 직후 테인 공작은 황실에 붙었으니.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지요.”
테인 공작은 라이언에게 내줬던 술을 자신이 마셨다.
“정치란 인정과 의리가 아니라 상황에 맞춰서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라이언이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턱을 괴고 테인 공작을 물끄러미 보았다.
“정말 엘리제가 핀을 가지고 황궁으로 갔다고 생각해?”
“네. 황제 쪽이건 황후 쪽이건 확실합니다.”
라이언은 확실하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저렇게 확신하는 자들이야말로 사기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상황이 퍽 좋지 못했다. 수트라의 군대는 일찍이 조쉬가 소탕해 버렸다. 라이언 자신도 언제까지 실시아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테인 공작이 말했다.
“실시아의 마법사 군단을 모으고 계시지요?”
“그렇지.”
‘군단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실시아엔 마법사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군사로 만들 만한 이가 적었다. 야만인들에게 충성심을 심어 주는 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자금줄도 막힌 상황이니.
라이언은 그래서 이 먼 곳에 홑몸으로 왔다. 공작가의 돈으로 마법사 군단을 모으기 위해. 거기에 공작의 군사를 더하면 할 만한 게임이었다.
“자넨 나와 다시 손을 잡고 싶은 거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건 대공께서도 마찬가지 아니십니까?”
공작의 말에 라이언이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는 끝까지 여유를 잃지 않고 말했다.
“그건 공작의 말에 따라 달려 있지. 어떻게 황실을 칠 건지 말이야.”
“…….”
“어디 자네의 계획부터 들어 볼까?”
그들은 그렇게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3년 전, 황태자와 더불어 나누던 작당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