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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94)화 (94/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94화

카를이 잠시 자리를 비운 집무실. 조쉬와 테오는 커다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었다.

“황후 폐하께선 정말 참석하지 않으신대?”

조쉬가 테오에게 물었다.

테이블에는 탄신제 관련 자료가 가득했다. 연회의 내용과 순서, 선물 목록, 초대장 발부까지. 두 사람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응. 어제도 시녀장을 통해 여쭤봤는데 안 오시겠대. 우리더러 알아서 하라고 하시더군.”

테오가 초대장을 받을 이들의 명단을 살피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는 뭔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아 참, 황제 폐하께서 무도회는 빼라셔.”

“……탄신제 같은 큰 행사에 무도회를 빼라고?”

“응.”

“귀족들이 가만히 있을까? 대체 왜?”

귀족들이 이런 행사에 참여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황제에게 눈도장을 찍는 것. 신나게 춤을 추며 사교를 하는 것.

테오가 조쉬를 흘긋 보았다. 넌 참 눈치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황후 폐하께서 못 오시는데 무도회를 열면 그림이 이상하잖아.”

“아.”

무도회의 첫 춤은 황제 부부가 열어야 했다. 황제의 탄신제라면 더더욱 그랬다. 이런 날에 황후가 참여하지 않으면 티가 나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조쉬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이궁으로 초대장을 보내자. 혹시 알아? 무도회가 없다는 말에 부담을 좀 덜고 오실지.”

그 말에 테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손해 볼 건 없지.”

테오가 귀족들의 목록 위에 이렇게 썼다.

[황후 폐하]

***

며칠 후, 오후 늦은 시간에 황제의 탄신제가 시작되었다. 전국의 수많은 귀족이 모여 카를의 생일을 축하했다.

인사를 온 귀족들은 종종 아우라의 빈자리를 흘긋거렸다. 황후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귀족들 사이에서 나돌고 있었다. 얼마나 심각한 병이면 황궁의조차 입을 다무는 건지. 다들 의문이 하늘을 찔렀다.

해가 지자 귀족들은 하나둘 떠났다. 무도회 없는 연회란 흥이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게 딱 카를이 원한 바였다. 시끄러운 놈들은 빨리빨리들 사라져 버리는 것.

늦은 밤이 되자 연회장은 거의 다 비어 갔다. 이제 남은 이들은 궁인과 몇몇 기사가 전부였다.

“폐하. 슬슬 돌아가 쉬시겠습니까?”

테오가 물었다. 카를은 턱을 괸 채 텅 빈 연회장만 내다보고 있었다. 그 쓸쓸한 시선이 테오는 안타까웠다.

‘결국 황후 폐하께서는 안 오셨군. 내심 기다리셨던 걸까.’

“테오.”

“네.”

“이대로 가긴 아쉬우니 술이나 한잔하지.”

“예?”

테오는 당황했다.

카를과는 데블라에서 종종 술잔을 나눴다. 다만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얼어 죽지 않기 위해서였다.

‘즉위하신 후에는 한 번도 술을 권하신 적이 없었는데. 오늘 유난히 기분이 안 좋으신 것 같아.’

하지만 요즘 카를의 음주가 잦아 걱정인 테오였다.

“연회 때문에 이미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오늘은 이만 쉬시고 따로 날을 잡아서 드시지요.”

“어차피 방으로 들어가도 마실 거야.”

“……아.”

“어차피 마실 거, 자네들과 마시면 좋잖아.”

카를이 싱긋 웃었다.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 안 그래?”

“그……럼 자리를 준비하겠습니다.”

상황을 지켜보던 조쉬가 얼른 빈 테이블을 가리켰다.

“이, 이쪽으로 오시지요.”

세 사람은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조쉬가 그나마 순한 술인 와인을 잔에 채웠다. 테오는 능숙하게 대화의 문을 열었다.

“테인 공작께서는 끝까지 오지 않으셨군요.”

“내 생일에 박수 쳐 줄 만큼 비위가 좋진 못한 모양이지.”

카를이 빠르게 잔을 비웠다. 그리고 바로 다시 잔을 채웠다. 

“테오.”

“네.”

“실시아 왕실 가계도는?”

“암시장과 지하 경매장에서 조각조각 조금씩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 조쉬, 실시아에 보낸 병사들에게서 연락은 없나?”

“아직 없습니다.”

“쥐새끼처럼 잘도 숨었군.”

주어는 당연히 라이언이었다. 국경을 넘어간 이를 잡는 건 어려웠다. 게다가 마법사의 힘을 빌렸다면 더더욱.

“하지만 정말 테인 공작과 연락을 하고 있다면 모습을 보이겠지요.”

테오의 말에 카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이 다시 술잔을 잡았을 때였다. 테오와 조쉬가 동시에 카를의 손을 막았다.

“……뭐야.”

“너무 빠르십니다.”

“맞습니다. 조금만 더 천천히 드십시오.”

“이제 겨우 두 잔째인데. 게다가 고작 와인이고.”

술의 종류가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횟수와 양이었다.

조쉬가 한 번 더 말렸다.

“폐하, 이러다가 정말 몸 상하십니다.”

카를은 그 말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몸이 상한다니. 이미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몸 이전에 마음부터가. 자신이 황제만 아니었다면 그런 말들을 속 시원히 했을 거였다.

하지만 참았다. 그들은 자신을 따르는 부하니까. 주군이 흔들리면 부하들도 흔들리기 마련이었다. 그게 지금 카를이 붙잡고 있는 마지막 이성이었다.

은근한 신경전이 시작되었다. 테오는 눈치를 보며 손을 치웠다. 하지만 조쉬는 손을 치우지 않았다. 그는 이런 문제에 있어선 나름의 강단이 있었다.

“폐하, 차라리 황후 폐하와 좀 더 툭 터놓고 대화를 하심이.”

“대화?”

카를이 픽 하고 웃었다.

“대화로 말이 통하는 건 서로에게 상처받지 않은 놈들 사이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

“내가 준 상처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황후에게 더 무슨 말을 하겠어.”

“그럼…….”

“실컷 미워하도록 두는 수밖에. 혹시 알아? 미워하는 일마저 지겨워지면…….”

카를은 말을 끝맺지 않았다. 그리고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일 뻔했군.’

보다 못한 테오가 조쉬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손이 자유로워진 카를이 기어이 잔을 비웠다. 그리고 보란 듯 다시 채웠을 때였다.

자박자박…….

가만가만한 가벼운 발소리가 저 멀리서 울려왔다. 그 주인공을 본 조쉬와 테오의 눈이 동그래졌다.

마지막으로 카를이 그쪽을 보았다. 술기운이 막 돌기 시작해 약간은 희미해진 시선으로.

“……아하.”

그는 아우라를 보며 낮게 읊조렸다.

아우라는 카를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미처 꾸미지도 못한 듯 아무런 장신구도, 화장기도 없었다. 

그 순간, 카를은 생각했다. 자신은 죽을 때까지 이 장면을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자신이 준 상처를 주렁주렁 단 아우라. 그런 아우라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 장면을.

그녀의 목적이 무엇이건 간에 상관없었다. 자신은 결국 이렇게 눈이 돌아 버리니까.

“저,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마, 맞습니다. 가 보겠습니다.”

테오와 조쉬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아우라에게 인사를 남기곤 후다닥 연회장을 나갔다.

카를은 미동도 없이 아우라를 보기만 했다. 그녀는 테이블에 뭔가를 툭 올려놓았다. 이번 탄신제의 초대장이었다.

“며칠 전에 미나가 내게 주긴 했는데…… 내가 오늘에야 봤어. 급하게 오느라 이 꼴이야.”

“……아니야. 예뻐.”

“생일 축하해.”

“고마워.”

“내가 너무 늦게 온 건가?”

아우라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파티가 끝난 거대한 연회장은 쓸쓸한 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쓸쓸함이 아우라의 창백한 얼굴과 잘 어울렸다.

“늦었지.”

카를이 말했다.

“하지만 충분히 일찍 왔어.”

그는 아우라의 손등에 길게 입을 맞췄다. 아우라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급하게 와서 선물은 없어.”

“충분하다고 했잖아.”

카를이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움직이자 미약하게 와인 향이 풍겼다.

“정 미안하면 춤이라도 춰 주든가.”

아우라가 고개를 비뚜름하게 들어 카를을 보았다. 반쯤 감은 눈꺼풀 때문에 긴 속눈썹이 두드러졌다.

“좋아.”

두 사람은 홀 중앙의 무도회장으로 갔다. 아우라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카를은 그녀의 등과 허리를 붙잡았다.

음악도 뭣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 탄신제의 첫 춤이자 마지막 춤이었다.

휑한 무도회장에 그들의 구둣발 소리만이 낮게 울렸다. 한참 춤을 추던 아우라가 입을 열었다.

“핀을 다시 찾아볼 거야.”

카를이 아우라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해.”

“뒤에서 날 훼방 놓을지라도 앞에선 방해하지 마.”

“그러지. 병사건 시종이건 편하게 가져다 써.”

“황제 폐하의 아량인가? 감사하기도 하지.” 

아우라가 빈정거렸다. 카를은 그 말투조차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카를. 조건이 하나 더 있어.”

“말해.”

아우라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내가 핀을 찾으면.”

그녀가 그를 비웃듯 말했다.

“이혼해.”

끼익, 카를의 구두가 대리석 바닥에 길게 끌렸다. 그가 아우라의 등을 더 단단히 짚었다.

“핀을 찾은 마당에 그게 의미가 있긴 해?”

핀을 찾으면 아우라는 죽을 거였다. 그 상황에서 이혼은 부질없는 게 아닌가.

“의미 없지 않아.”

어깨에 얹혀 있던 그녀의 손이 카를의 목덜미를 감쌌다.

“네 부인이 아닌 채로 죽을 수 있잖아. 내가 죽어도 넌 내 장례를 치를 자격조차 없는 거야.”

“…….”

“그건 내게 의미가 남다르지.”

카를은 비로소 깨달았다. 그녀가 어떤 힘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그에게 어떤 상처를 주기로 마음먹었는지. 그녀는 그와 완벽하게 끝내는 방법을 찾아온 것 같았다.

“똑똑하기도 하지.”

카를이 그렇게 말하며 우뚝 멈춰 섰다. 그의 손이 아우라의 등을 타고 올라왔다. 곧 목을 지나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쥐었다.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당장 이궁으로 돌아가서 죽을 때까지 나오지 않을 거야. 죽느니만 못하게, 유폐된 것처럼.”

아우라는 잘 알고 있었다. 카를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모든 생기를 잃고 이궁을 떠도는 듯했던 아우라의 모습. 그 모습에 그가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도.

아우라가 물었다.

“널 증오하라며.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었다. 신경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이 기분. 이 여자의 증오가 발끝부터 서서히 그를 타고 오르는 기분. 그 힘이 그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드는 기분.

그는 그게 무척이나 좋았다. 그녀와 이 게임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도.

카를이 아우라에게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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